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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이라면 단감으로 유명한 경남의 소읍이다. 이 시골의 벽지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 운영되고 있는 진영검도관이 있다. 이 검도장 어린 초등학생들이 지난해 4개의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4번 모두 상위권에 입상하여 화제가 되었다.
제4회 FYD배 전국초등학교검도대회 저학년부 단체전 3위, 제2회 연합회장기 국민생활전국검도대회 초등학교고학년부 3위, 제1회 문화관광부장관배 국민생활체육전국검도대회 초등학교저학년부 단체전 우승, 제6회 전국초등학교검도대회 저학년부 단체전 우승 그런데 이 진영검도관은 개관한지 불과 만 3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검도장이다. 경남 진영읍에 위치한 진영검도관을 운영하는 박기철(45세, 4단) 관장을 찾아 어떻게 이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들어보았다. 검도장은 나의 수련장 근래에 들어 도시에서도 초등학생들에게 검도를 가르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요즘 아이들은 조금 힘들고 어려운 일은 아예 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에 비하면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도 아이들이 없어서 못 가르치는 형편이다. 또한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60% 이상이 고령자들이므로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일반 젊은 계층이 적어서 일반인 중심의 검도장 운영 또한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그래서 박기철 관장은 진영검도관을 개관하여 1년 동안 4명의 아이들과 일반인들을 무료로 가르쳤다. 그리하여 차츰 입소문이 퍼져 아이들이 하나 둘 씩 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서 현재는 40여 명의 아이들이 수련하고 있다. 현재도 그 아이들 중 20% 정도는 무료로 수련을 한다.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도시에서도 초등학생들이 검도를 배우지 않아서 팀이 해체되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인데 그가 이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기까지는 눈물겨운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처음에 도장을 차려 놓고 텅빈 도장을 지켜보고 있으니 마음이 찹찹하더군요. 그런데 이곳이 내가 수련할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고작해야 인구가 1~2만 정도의 시골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도장을 운영하기에는 더욱 더 힘든 상황이었죠. 그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 이렇게 될 바에야 아이들이라도 가르쳐서 봉사라도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무료로 아이들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니 어디서들 알고 찾아오는지 조금씩 아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결국은 그 아이들이 우리 도장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처음 가졌던 마음가짐으로 욕심을 내지 않고 이 아이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을 굳히게 되어 성심성의껏 지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서 아이들의 실력도 점점 오르기 시작하여 작년에는 저희가 참가할 수 있는 모든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던 것이죠.”라고 박기철 관장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이들은 나의 거울 “아이들은 가르치는 대로 합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지도자가 매사에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해야 됩니다. 가령 사범이 A를 하면서 B를 하라고 가르치면 아이들은 사범의 말에 따라 B를 하지만 A스타일로 버릇이 들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아이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그런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고 바르게 가르치려면 항상 사범이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박 관장은 아이들에게 주입식, 강압적인 방법으로 수련시키기 보다는 가능하면 스스로 찾아서 할 수 있도록 지도하며 사범은 안내자의 역할만 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하였다. “너무 지나치게 간섭하고 챙기게 되면 아이들 스스로 독립심도 없어지고 계속 사범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그런 아이들은 처음에는 잘 길들여진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켜보면 더 이상 발전이 없으며, 항상 남에게 의존하여 기대는 무기력한 아이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독립심을 키워주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강한 아이들로 길러야 하는 것이죠.” 또한 검도는 무기를 들고 하는 운동이므로 항상 엄격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도장삼례를 비롯하여 집에 돌아가서도 부모님께도 깍듯하게 인사할 수 있도록 철저히 시킨다. 그러면 부모님들도 달라진 아이들의 모습을 대하고는 흐뭇하게 생각하게 된다.
한문을 가르치는 검도장 진영검도관에서는 매주 수요일에는 한문을 가르친다.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에서도 한자를 많이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는 중·고등학생이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쓰지 못 하는 학생들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매주 수요일에는 수련시간을 쪼개어 전담 강사(훈장 선생님)를 초빙하여 한자를 기초부터 조금씩 가르쳐 보았다. 그동안 1년 정도 시행해오고 있는데 아이들도 좋아하고, 학부모님들의 반응도 매우 좋은 편이다. 오히려 수요일 한문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도 있다. 한문을 가르치는 강사도 아이들이 검도를 배워서 그런지 다른 아이들보다 집중이 잘 되어 학습효과도 높다고 말한다. 이제 한문공부는 진영검도관에서 하나의 수련과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골이지만 시설은 짱!! 박기철 관장은 도심에 있는 도장들을 가끔 방문할 때마다 너무나 답답해서 못 견딜 정도라고 한다. 물론 그가 진영에서 검도장을 열기 전에는 그 역시도 도심의 도장에서 운동을 하였지만 이제는 환경을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에게 크게 치고 나가라고 말은 하지만 크게 치고 나갈 공간이 있습니까? 그렇지 못한 공간에서 운동을 시키면서 말로만 크게 치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박기철 관장 주변의 아는 사람들이 진영검도관을 방문할 때마다 다들 도장의 규모(120평 정도)나 시설을 보고 놀란다. 시골에서 이렇게 큰 도장을 운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렇게 운영하여 도장 세라도 나오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왕이면 크고 좋은 시설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뛸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검도장하면 지하에서, 좁은 공간에서만 할 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와서 배우는 아이들이 바로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옵니다.” “이게 없으면 아이들이 운동하며 부딪히지 않을 텐데” 라고 박기철 관장은 검도장 내의 기둥을 쓰다듬으며 혼잣말로 되뇌었다. 그의 아쉬워하는 표정에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진영검도관은 정리정돈이 너무나 잘 되어 있다. 이 또한 부지런한 박 관장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새 소식의 전령사 박기철 관장은 항상 새벽 3시가 넘어서야 퇴근한다. 아무리 도장이 늦게 끝난다고 해도 새벽에 그렇게 늦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는 경향신문 경남공장에서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가 맡은 일은 신문이 나오면 지방의 지국으로 신문을 배달하는 업무이다. 현재는 전남 여수지역에 매일 신문을 수송한다. 그가 이렇게 새벽에 일해야만 하는 것은 검도장을 운영해서는 생계가 보장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이런 생활에 대해 한 번도 한탄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이런 자신의 환경을 고맙게 생각하고 자신도 어렵지만 늘 남을 도우며 산다. “시골이라 검도장 운영이 어렵지만 그래도 저는 만족합니다. 저 역시 그곳에서 제가 좋아하는 검도를 매일 수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는다. 유도에서 검도로 박기철 관장은 원래 젊었을 때 유도를 하였다. 유도 공인 5단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1986년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결국 왼쪽 다리의 관절과 왼쪽 팔의 관절을 잃었다. 더 이상 유도는커녕 거동하기조차도 힘들게 되어 한동안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1989년 어느 날 한번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합소리에 이끌려 그곳으로 가보니 검도장에서 사람들이 수련 중이었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매우 격렬해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옆에서 기본을 수련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저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입관을 하였다. 바로 그 곳이 창원검도관(이해화 관장, 연사 6단)이었다. 처음에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몸으로 어떻게 검도를 배우냐며 극구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창원검도관 이해화 관장은 그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며 검도에 입문할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에게 새로운 검도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아마 그 때 내가 검도를 하지 않았다면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결국 검도가 나의 인생을 바꾸었던 것이죠. 부족한 점이 많은 저를 인내로서 지도해주신 이해화 관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내 사전에 장애는 없다 박기철 관장은 1989년 창원검도관에서 검도를 처음 배우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직업도 바뀌었다. 사고가 나기 전에는 식품대리점을 직접 운영하던 것을 접고, 경향신문사 공장에 입사하였다. 그는 불편한 몸 때문에 남들보다 검도수련을 하는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음으로 야간에 활동하는 신문사 일이 그에게 오히려 적절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운동도 그전에는 유도를 했기 때문에 주로 잡아당기는 운동이었는데 이제는 주로 밀어야 하는 운동으로 바뀌게 되어 적응해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에다 검도수련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왼쪽 다리와 왼팔의 두 관절에 철심을 박았음으로 그런 상태에서 검도의 기본을 익히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기본을 익혔고 조금씩 대회에도 출전하게 되었다. 여러 번 경남의 지방대회에서 입상을 하였다. 박기철 관장은 경기에 출전할 때마다 주로 선봉으로 뛰었다. 1999년 제2회 마산MBC배 검도왕대회 장년부에서 우승을 하여 검도왕이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2000년 7월에 열린 제13회 사회인검도대회 장년부 단체전에 선봉으로 출전하여 준우승을 하였다. 몸이 성한 일반인들도 결승전에 진출해보기가 쉽지 않은데 그는 기필코 해내고야 말았다. 실로 인간승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해 가을 4단에 승단하여 10월 그는 진영검도관을 개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박기철 관장은 지난 겨울에 일본 규슈의 구마모도에 다녀왔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검도수업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박 관장이 알고 있는 부산의 한 지인을 통해 일본 규슈 구마모도의 케료중학교(京陸中學校)에 그의 아들을 보내어 검도수업을 시키기로 하였다. 아들인 박성현은 현재 마산의 해운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며, 검도선수이다. 그런데 그는 아들에게 검도를 늦게 가르쳤다. 왜냐하면 박 관장이 검도를 좋아한다고 해서 아들에게도 검도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본인이 스스로 검도를 해보고 싶다고 하여 가르쳤는데 지난해 2학년 2학기 때 해운중학교에 검도선수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이번에 그의 아들과 함께 일본을 다녀온 박정훈 군은 박 관장의 진영검도관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검도를 배워서 다른 중학교에 다니다가 지난해 1학년 겨울 방학 때 해운중학교의 검도선수로 전학을 가게 되어 현재 2학년에 재학 중이다. 그들이 방문한 구마모도 케료중학교(京陸中學校)에서 일본아이들과 함께 똑같이 정규수업을 받고 방과 후에 검도수련을 하는 방식으로 한 달 동안 지냈다. 아이들의 일본 경험이 처음이라서 이번에는 박 관장이 직접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한 달 후 데리고 왔다. 물론 아이들이 아직은 일본어 실력이 못 미쳐 수업을 제대로 받지는 못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기간이 한 달 정도이므로 그렇게 길지 않고 일단 먼저 시켜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아이들도 좋은 경험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갈 때는 어떤 것이 필요한지 스스로 느꼈으며, 무엇보다도 일본의 검도를 조금이나마 직접 느끼고 돌아올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박 관장의 사고는 항상 앞서간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타협하기보다는 직접 부딪히고 극복하는 검도정신으로 적극적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더 좋은 세계를 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미래이기도 하지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늦은 밤 도장문을 걸어 잠그고 그의 직장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새소식을 전하기 위해 …
구마모도에서의 한 달 안녕하세요. 마산해운중 3학년 재학중인 박성현입니다. 저번 겨울방학을 계기로 검도에 대한 경험을 하고자 1년 후배인 정훈이와 일본 구마모도에 갔습니다. 김해공항에 9시쯤에 도착해서 11시 50분 비행기를 탔습니다. 정훈이와 저는 처음 비행기를 타는 거라 무척 기분이 들떴습니다. 그래서 계속 창문 밖만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으로 가까이 하늘을 보는 순간 “아, 내가 하늘에 날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해공항에서 후쿠오카 공항까지는 불과 45분이면 도착하지만 갈 때의 기분은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 눈을 떠서 창문을 보니 섬 하나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비행기 안의 안내방송이 들렸습니다. “이 비행기는 조금 있으면 일본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승객여러분들은 착륙할 때까지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십시오.”그 말이 끝나고 약 10분 후 비행기는 일본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하였고, 나는 일본에 첫 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직 공항이라 다른 나라라고는 실감은 못했지만 어디선가 한국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입국 신고를 하고 가이드 아저씨를 따라 홈스테이 할 집까지 공항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버스를 타고 2시간 남짓 버스 안에서 잠을 잔 뒤 도착한 곳은 구마모도시내였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짐을 꺼내어 무사시 회사 상무 아저씨의 차를 타고 홈스테이할 집에 가서 짐을 풀고 자기소개를 한 뒤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은 14일 일본의 ‘성인식의 날’ 이었는데요. 청소년들이 20살이 되어 청년이 되면 남자는 정장을, 여자는 키모노를 입고 축하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학교 가는 길을 익히러 나간 날이었기 때문에 홈스테이하는 집 아저씨께서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케료중학교(京陵中學校)에 도착하여 학교를 둘러 본 뒤 집으로 돌아가 다시 몸을 씻고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15일부터 학교에 갔습니다. 교장선생님께 일어로 자기소개를 하고 교무실에 들어가서도 자기소개를 일어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여기까지 온 것을 생각하니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2-5반에 배정을 받은 뒤 1교시부터 6교시까지 수업을 받는데 일어로 수업을 해서 그런지 수업 내용은 몰랐지만 선생님이 시키는 데로 했습니다. 수업을 다 마치고 검도를 배우기 위해 학교 체육관에 가서 호구를 풀며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 검도 코치 선생님께서 검도 시간표를 내주시며 매주 수요일에는 저녁운동까지 하고 토요일에는 경기, 일요일은 무도장에 가신다며 우리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처음 운동은 큰동작부터 시작해서 받아치기, 공격연습으로 끝났습니다. 약 2시간 남짓 운동을 했는데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의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아 경기연습을 했습니다. 검도 특기생들은 남, 여 총 합하여 30명 쯤 되는데 2팀으로 나누어 경기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훈이랑 저는 3학년과 대결을 했는데 역시 일본 아이들은 검도스타일이 우리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일본에서는 검도시간에 검도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틈틈이 생활예절 교육도 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경기 날이 왔습니다. 우리는 홈스테이 하는 집 아저씨의 차를 타고 구마모도시의 한 초등학교 체육관에서 경기를 했는데 경기장이 6코트나 나올 만큼 컸습니다. 구마모도 시의 검도 팀만 해도 16개나 되는 것을 보면 이만한 경기장이 여러 게 있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10시쯤에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정훈이와 저는 후보로 뛰었는데 번갈아가며 나갔습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경기가 토너먼트방식이지만 일본에서는 리그전 경기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선에서는 우리 팀이 우세하였는데 점심을 먹고 난 후 본선에서는 정훈이와 제가 입이 벌어질 정도로 잘하는 선수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마치 고등학교 형들이 경기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우리 B팀은 아쉽게 본선에서 탈락했지만 A팀은 아직 본선에서 경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경기결과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정훈이와 저는 많이 지친 탓에 다음 날 일요일 오후까지 침대에 누워 자야했습니다. 일본 홈스테이의 아주머니, 아저씨가 저희들에게 관광도 가끔씩 시켜주시고 외식도 많이 시켜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많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케료중학교(京陵中學校)에서는 저희들에게 좋을 추억을 많이 심어주려고 한국 사람을 초청해서 한국음식도 만들어주고 설날을 대신해서 이벤트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일본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 일본의 문화에 대해 많이 알았습니다. 다음에 다시 갈 기회가 있으면 일본어를 반드시 배워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케료중학교(京陵中學校) 2-5반 담임 다쿠치 선생님, 그리고 2-5반 친구들, 검도코치 선생님, 감독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글 _ 박성현(마산해운중 3학년) 구마모도 검도기행 안녕하세요. 저는 마산 해운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박정훈입니다. 이번에 성현이 형과 일본 구마모도에 검도수업을 받기 위해 경험삼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1월 11일 아침 짐을 챙겨 김해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성현이 형이 먼저 김해공항에 나와 있었습니다. 일본어 통역을 맡은 가이드 아저씨와 동행을 하였습니다. 그 아저씨가 우리들을 일본 구마모도에 데려다주게 됩니다. 11시 50분쯤 탑승수속을 마치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비행에 올랐습니다. 저는 이번이 처음 타보는 비행기였기 때문에 너무 기분이 좋았으며 들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하늘로 떠오르자 머리가 아파오고 멀미 날 듯 어지러웠지만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으니 금방 나아졌습니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조금 있으면 일본 후쿠오카에 도착한다고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비행기가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하였고 우리는 입국수속을 밟았습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일본땅에 발을 내디디니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떤지, 일본은 어떤 문화가 있는지. 그동안 무척 알고 싶었는데 이제 하나하나 이루어지겠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우리가 공항에서 빠져나오니 가이드 아저씨께서 홈스테이 할 집에 가려면 공항버스를 타고 2시간쯤 가야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일본 돈으로는 약 2,000엔 정도의 차비를 내고 2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를 차를 타고 가야했습니다. 차안이 조금 포근해서 2시간 정도가 걸렸지만 편안하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마모도시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다시 승용차를 타고 약 30분쯤 걸려 홈스테이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집의 주인인 아저씨, 아주머니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들어가 본 일본인의 집은 작지만 아담하면서 너무나 깨끗했습니다. 그 곳에 짐을 풀고 가이드 아저씨와 홈스테이 아주머니, 아저씨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일본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대충 눈치로 생각하니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라고 하시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가이드 아저씨께서 마지막으로 나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얘들아 너희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온 것이니 너희가 말도 안 듣고 엉뚱한 행동을 하면 한국을 망신시키는 거라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몇 가지 충고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는 일본 케료중학교(京陵中學校)에 가서 보통 한국에서 하는 수업처럼 6교시 수업을 마치고 방과 후에 검도수련을 하였습니다. 체육관 역시 깨끗하고 최신 시설이 갖추어진 훌륭한 체육관이었습니다. 체육관의 바닥이 얼마나 깨끗한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일본 아이들은 검도수련시간에도 절도 있고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자세로 수련에 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일본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본받을 점이었습니다. 검도수련이 끝나고 나면 각자 자신이 사용한 호구, 죽도 등 장비들을 스스로 가지런히 정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우리처럼 쓰고 난 장비들을 아무렇게나 다루는 아이들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검도 선생님께서 토요일 날에는 경기가 있다고 하시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성현이 형과 나는 이번 경기에서 잘해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2시간씩 검도연습을 하고 며칠 후 초등학교 강당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경기장의 크기도 굉장히 커서 무려 6코트가 나올 정도의 큰 경기장이었습니다. 우리는 후보로 뛰면서 일본 아이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굉장히 잘 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경기결과는 매우 좋은 편이었습니다. 우리는 홈스테이에 도착하자마자 너무나 피곤해서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마다 따로 저녁에 하는 운동에도 참가하였습니다. 이 운동을 마치고 나면 성현이 형과 나는 거의 힘이 다 빠져서 너무 피곤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자전거로 1시간 정도 걸려서 등하교를 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몸도 마음도 너무나 지쳐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아졌고 짧은 일본생활을 생각하며 우리는 꾹 참아야 했으며, 남은 기간만이라도 좋은 인상을 일본 사람들에게 심어주려고 애썼습니다. 드디어 한 달이 지나고 마지막 날이 되어 선생님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홈스테이 아주머니, 아저씨께도 인사하드리고, 정들었던 일본친구 호가에게도 작별인사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에 제가 다시 일본에 가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후회 없도록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끝으로 이 글을 쓰며 그 사이 일본에서 사귄 친구 호가와 담임선생님과 검도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글 _ 박정훈(마산해운중 2학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