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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李完用)묘 익산에 묻힌 사연을 찾아 용화산-선인봉코스을 걷다◑
을사오적의 우두머리 이완용이는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이 고향인데 1926년 죽어서 익산에 묘터를 잡아 장사지내었다니 익산과 어떤인연으로 묻히었는지 자료를 찾아보고 2011-10-11 이완용묘터로 알려진 용화산을 걷다.
오늘도 자연에 순응하기 위해 서동공원을 출발 익산 용화산(342m)-선인봉-외산마을을 걸어보며 매국노 이완용을 생각해보다.
<용화산 정상은 해발342m로 서동공원을 출발 약40분 걸으면 정상에 오른다>
<용화산 정상에서 이정표가 서동공원과 아리랑고개를 화살표로 방향을 표시하고 있다.>
<용화산-선인봉 지도>
⇒이완용 익산에 묻힌 사연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1858년에 태어나 68세까지 살았으니 천수를 살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질긴 목숨 모질도록 이어나갔다 해야 할까? 그때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 되던 시점이었으니 그는 부귀영화와 함께 장수까지 누린 셈이다.
이완용은 경기도 광주 출생인데 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에 있었습니다. 선산이 익산에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용하다는 지관이 '전국 최고의 명당'이라고 지목한 곳을 자기 묘자리로 미리 잡아둔 곳이었죠.
이완용의 묘는 주산인 선인봉 중턱에 있었다. 좌청룡 우백호인 좌우산맥이 계곡을 이루는 중간에 자리한 이묘에서 머리를 들어 앞을 보면 靈氣(령기)어린 이 지역 최고봉인 미륵산이 朝山이 되어 이묘와 맞절을 하고 있다.
이완용의 묘는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내산동에 있었다. 묘는 仙人舞手形(선인무수형)으로 시신이 평안히 잠들게 할 것 같은 명당중의 명당 이였다. 묘는 부부 합장으로 묻혀 있었다. 관은 가죽나무에 옻을 입혔고 강회(剛灰-生石灰)로 둘러쌓여 고스란히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다.
관(棺)은 가로 1.5尺 세로 6尺 뚜께 6cm 棺 뚜껑에는 빨간 글씨 朱色字(주색자)로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中樞院副議長(중추원부의장) (正二位 大勳位 侯爵 牛峯 李公之柩 정이위 대훈위 후작 우봉 이공지구)란 글씨가 선명히 씌어져 있었다. 牛峯은 이완용의 본관, 棺속에는 생전에 입던 관복과 평상복 3~4벌 그의 일생동안의 행적이 기록된 誌石(지석)이 있었다.
이 무덤은 1979년 破墓될 때까지 50년 동안 철저히 보존되어 왔다. 이완용의 무덤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 태조 산이 무덤 뒤에 있는 대부분의 산소와는 달리 태조 산이 동시에 조산노릇을 하면서 무덤 앞쪽에 위치하는 回龍顧祖穴이라는 文武雙全의 부귀영화를 가진 후손들이 즐비하게 나온다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하지만 1979년 4월 증손자형제와 손자며느리가 참석하여 파묘를 하고, 유골은 화장하여 인근 장암천에 뿌려졌다. 파묘 이후 후손들은 모두 이민을 갔다.
이완용 묘터로 추정되는 익산 낭산면 내산동 일대, 지금은 가묘도 사라지고 석재 채취 현장으로 변해있다.
당시 '경성일보'에 의하면 "사이토(齋藤實) 총독 등 13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극도의 애도 속에" 장례식이 열렸다. 일제 강점기 고종과 순종의 국장을 제외하고 조선인의 장례로는 가장 성대하고 장엄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는 이완용의 업적을 높게 사 그의 장례식을 기록영화로 만드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완용장례당시 강경에서 낭산까지 도로가 개설되지 않아 장례행렬이 지나갈수 없어 일제는 강경에서 낭산까지 도로를 개설하였으며, 장례행렬이 강경에서 낭산까지 길게 늘어섰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일제치하 이완용의 권세가 어떠했는지 하늘을 찌를듯 높았다고 보여집니다.
<선인봉정상에서 낭산방면의 풍광은 낭산저수지가 보이고 아름답다.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가 자리잡은 명당이 있어 이완용은 선인봉 자락 중턱에 묘를 쓴듯하나 살아생전 백성의 편에 서야지 나라 잃은 백성의 한을 아시는지. 비석 하나 제데로 세우지 못하고 후손에 파묘하여 강가에 뿌려졌다니 역적의 후손이라 얼마나 손가락질을 받았으면 파묘하여 강가게 뿌려졌을까...........>
<선인봉 정상에 군 훈련용으로 설치한 훈련지도가 베니아판에 채석장 내산동 위치가 그려져 있다.>
<묘위치 : 이완용 묘터로 추정되는 전북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내산동 일대(일명내장부락)- 선인봉중턱, 지금은 가묘도 사라지고 석재 채취 현장으로 변해있다.>
⇒이완용 활동내용
▷생몰연도 : 1858〜1926
▷제2차 한일 협약 (을사조약) 을사오적 - 이완용 · 이근택 · 이지용 · 박제순 · 권중현
▷한일신협약 정미칠적 - 이완용 · 송병준 · 이병무 · 고영희 · 조중응 · 이재곤 · 임선준
▷한일 병합 조약 경술국적 - 이완용 · 윤덕영 · 민병석 · 고영희 · 박제순 · 조중응 · 이병무 · 조민희
친일파의 거두로서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자는 경덕(敬德)이다. 그리고 호는 일당(一堂)이며 아버지는 석준(奭俊)이며, 10세 때 판중추부사 호준(鎬俊)에게 입양되었다.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 출생이다. 1870년에 양주 조씨 병익(秉翼)의 딸과 결혼했으며,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 ·검교(檢校) ·수찬(修撰) ·동학교수(東學敎授)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였다.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에 들어가 영어를 배운 뒤 응교(應敎), 세자시강원 겸 사서(司書)를 지냈다. 1887년 주차미국참사관(駐箚美國參事官)으로 도미(渡美), 이듬해 5월 귀국한 후 이조참의(吏曹參議) 겸 전보국회판(電報局會辦), 외무참의(外務參議)를 역임하였다.
그 해 12월 미국 주차대리 공사가 되어 다시 도미했다가 1880년 귀국하여 대사성(大司成) ·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을 역임하였다. 1895년 학부대신(學部大臣)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형인 이윤용(李允用)과 함께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있던 앨런의 알선으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임최수(林最洙)·이도철(李道澈)·이재순(李載純) 등과 더불어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다시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하고 그 후 친러파로서 외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1년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있다가 친일파로 바뀌어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乙巳五賦臣)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 해 12월에 의정대신서리 ·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당시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한편 이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음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지게 되자 일본은 이토로 하여금 고종의 양위를 요구했다. 이완용은 이에 동조하여 양위를 건의했다가 두 번씩이나 거절당했으나 계속 강압하여 결국 황태자에게 양위하게 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격렬한 반대운동이 일어나는 한편 분노한 군중들이 남대문 밖 약현(藥峴)에 있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1907. 7. 20). 가재와 함께 집이 전소하여 이완용의 가족들은 이토의 보호로 몇 달 동안 왜성구락부에 들어 있다가 저동의 전남영위궁(前南寧尉宮)으로 옮겨 살았다. 이 때 불탄 그의 재산은 약 10만원 정도였다 한다
헤이그밀사사건 후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讓位)할 것을 강요, 순종을 즉위시키는 등 매국행위를 하다가 1909년 이재명(李在明)으로부터 자격(刺擊)을 받았으나 상처만 입었다. 즉, 1909년 12월 22일 상오 11시 30분이었다. 이완용이 명동천주교회당에서 거행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는 것을 이재명(李在明)이 군밤장사로 변장하고 교회당 문 밖에서 밤을 굽고 있다가 달려들어 단도로 찌른 것이다. 옹위하는 이완용의 집 하인을 먼저 찔러 죽이고 땅에 엎어진 이완용의 복부를 여러 번 찔렀는데 이완용은 병원의 가료로 죽음을 면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일본에 의해 국권을 피탈당하게 한 후 그 공으로 훈1등 백작과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공채 15만 원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일본은 1910년 6월 하순경에 '일한병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한국 황실에 대한 대우, 한국 원로대신에 대한 조처, 한국 인민에 대한 통치방법, '병합'의 실행에 필요한 경비문제 등을 의논했고, 그 결과 한국 황제 일가의 1년 세비를 150만 원 지급할 것, '합방' 공신에게는 응분의 작위를 주고 세습재산으로서 공채를 하사할 것, '합방' 공신에 대한 수당으로서 현 수상에게는 백작 작위와 15만 원, 일반 대신에게는 자작 작위와 10만 원, 기타는 남작 작위와 5만 원을 줄 것, '합방'의 소요경비로서는 공채 3000만 원을 발행할 것 등이 결정되었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1년 조선귀족원 회원을 역임했다. 1919년 3·1운동을 비난하는 경고문과 담화를 3차례에 걸쳐 〈매일신보〉·〈경성일보〉에 발표했으며 1920년 12월 후작으로 승급했다. 1921년 중추원이 개편된 후에도 계속 중추원부의장을 지냈다. 그외에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교육조사위원, 총독부산업조사위원,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원,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조선농업교육연구회 고문, 선만노몽연구협회 고문 등의 많은 명예직을 겸하며 친일행적으로 일관했다.
<고종 7년 1870년부터 고종 9년 1872년까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낸 이호준(李鎬俊)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卑)가 금마의 익산향교에 있다. 비석의 이호준(李鎬俊)의 이름이 100년 세월의 흔적에도 선명하다.
친일 매국의 중심이었던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1898년 3월 전라도관찰사에 부임한 적이 있는데, 이때 자신의 양부인 이호준(李鎬俊)의 비석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완용의 양부 우봉이씨 이호준 집안
이완용은 10살 되던 1867년 4월 20일 같은 집안의 먼 친척인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이완용을 양자로 들일 때 이호준의 나이는 47세였다. 그 때 이호준에게는 평양 기생에게서 낳은 열네살 짜리 아들 이윤용이 있었으나 서자에게는 집안의 대를 잇게 하지 않는 당시의 관례에 따라 양자를 들인 것이다. 이완용을 양자로 들이던 해, 이호준은 오늘날의 청와대 의전비서관 격인 예방승지로서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고 있었다.
이호준의 집안은 우봉 이씨 가운데서도 최고의 명문가다. 이호준의 7대조인 이상은 호가 타우이며 경종때 이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다. 또 이상의 바로아래 즉 이호준의 6대조인 귀락당 이만성 역시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만성은 우의정을 지낸 이숙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상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부자가 모두 송시열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만성의 조카인 도암 이재는 영조때 노론의 핵심 인물로소 대제학을 두차례나 지냈다. 한마디로 이호준의 가계는 조선 후기 이래 집권 세력인 노론계열의 중심에 속했다. 그런데 이집안의 특징은 빈번히 혈육이 단절되어 양자로 가계를 이어왔으며 또 이들이 집안을 크게 빛냈다는 점이다.
이완용의 양부 이호준 역시 양자로 입적되어 대를 이어 받았다. 이로 미루어 이완용도 우봉 이씨 집안에서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됨에 따라 이와 같은 명문가의 양자로 선택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호준 그의 처는 여흥 민씨로 이조판서를 지낸 민용현이 그의 장인이다. 역시 여흥 민씨를 처가로 갖고 있으며, 그보다 한 살 위인 대원군과는 친구 사이이자 사돈 관계이다. 그의 서자 이윤용이 대원군의 서녀와 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 이호준은 고종의 등극에도 무시못할 공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만성 [李晩成, 1659~1722]
본관 우봉(牛峰). 자 사추(士秋). 호 귀락당(歸樂堂) ·행호거사(杏湖居士). 시호 충숙(忠肅). 1696년(숙종 22) 진사(進士)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전적(典籍) ·좌랑(佐郞)을 거쳐 지평(持平) 겸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교리(校理) ·응교(應敎)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했다.
1706년 대사헌 겸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가 되었다. 1709년 다시 대사성이 되어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예기유편(禮記類編)》에 주자(朱子)의 글귀를 고친 것을 지적, 그를 논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삭직되었다.
이듬해 복관되어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716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내고 경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어 이조판서로 옮겼다. 노론(老論)으로서 1721년(경종 1) 병조판서가 되어 왕세제(王世弟:英祖)의 책봉을 주청, 실현되었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국문(鞠問)을 당하고 옥사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복관되었으며 영암(靈巖)의 죽정서원(竹亭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 《귀락당집(歸樂堂集)》이 있다.
원임 이조판서 이만성이 옥중에서 죽었다. 이만성의 자(字)는 사추(士秋)이고 우봉 사람이다. 아버지는 이숙 인데, 숙종 때 우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이만성은 큰 키에 아름다운 수염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풍채가 훤하였다. 어려서부터 기운을 믿고 우뚝한 자세로 남에게 구속받기를 싫어하였는데, 커서는 의지를 굽히고 글을 읽었다. 인현왕비 민씨가 폐위되자, 이만성은 문을 닫고 들어앉아 있었다. 처음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왕비가 복위된 뒤 3년이 지나 갑과로 급제하였고, 사헌부로 들어가 지평이 되었다. 처음 영의정 유상운이 과거를 주관하여 그의 아들 유봉휘를 급제시키자, 이만성이 상소하여 그 정상을 아뢰었다.
이 때문에 유봉휘가 마침내 합격이 취소되고 말았다. 이조에 선발되어 들어가서는 좌랑이 되었고, 이어 응교로 승진 임명되었다. 그때 마침 바다에 적이 나타났다는 경보가 있었으므로 이만성에게 충청도 지방을 순무하면서 항금진과 안흥진을 설치하고 (청주의)상당성을 수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영의정 이유 등이 존호를 올리기를 청하니, 이만성이 유창의 말을 인용하여 임금에게 존호를 받지 말기를 청하고는 인하여 백관의 정청에 나가지 않았다.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경기관찰사로 나갔다.
이조판서로 있을 적에 친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으며, 복제(服制)를 마치고 나서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숙종의 병세가 위독할 때 이만성이 궁궐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이때를 당하여 의심스러운 단서가 수없이 많았고 유언비어가 번갈아 일어났으나, 이만성이 의연히 대처하였으므로, 안팎이 모두 의지하여 중하게 여겼다. 아침저녁으로 뜰에 나아가 여러 관원들이 곡할 적마다 유독 이만성은 단정히 앉아 하루 종일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처음 이삼이 이만성을 만나보고 충청절도사가 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이만성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해 겨울 적신 김일경이 환관 박상검과 동궁을 위태롭게 하기 위한 모의를 하고 급한 일을 알리는 편지를 올렸으므로 조정이 텅 비게 되었고, 이만성도 부안현에 유배되었는데, 명령을 듣고 귀양길에 올라서도 낌새를 나타내는 기색이 없었다.
부안현에 이르러서는 날마다 논어를 읽었는데, 재앙이 일어날 기틀이 점차 자신에게 핍박되어 와도 오히려 책을 걷어치우지 않고 말하기를, "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다. 다음해에 옥사가 일어나니 이만성이 이삼을 충청절도사로 내어보낸 데에 죄를 지어 벌을 받게 되어 드디어 체포되었다. 이만성은 떠나갈 적에 임하여 원기가 태연 자약하였고, 한 마디도 자손을 위한 계책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가족이 이만성과 결별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색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대면하게 되자 김일경도 말하기를, " 물을 것이 없다." 하였다. 이만성이 옥에 갇혀 있다가 죽었는데, 나이 64세였다. 영조 원년에 복관(復官)시키라고 명하고, 또 하교하기를, " 여러 신하들 가운데 오직 이만성이 가장 원통하였으니, 그의 자손을 등용하라."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경종(수정) 2년8월15일
붉은해 서산에 떨어지니
울부짖던 산새 간곳 없어라
화사한 꽃잎마저 향기 사라지니
인생도 이와같이 떨어지는 것을...
처마밑 낙수물 소리
듣다보니 고운살결 패어지네
청청한 호수가 무리지은 백로들
덧없는세월 미운냥 힘없는 날개짓 흔들고...
무심한 밤하늘에 기러기들
만경창파에 홀로 선 돗단배라
높이 뜬 달마저 웃음 잃은 혼백이고
백년 인생여로 잠깐 이었구나...
꿈같은세월 백발이 되어가니
찬바람에 갈대 울어대고
무너지는 육신 삭풍마저 불어
허망한 세월이 어느듯 황혼이어라...
아 ~~~
가슴이 시려 오는것을 어찌하랴 .
- 이정규 詩人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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