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대종사의 봉래산 수양과 본회의 준비공작
대종사께서 일찍기 입산을 뜻하사 3월경에 오창건을 데리시고 전북 부안군 산내면 월명암에 행차하사 10여일 유연留連 후 환가하시고, 7월경에는 다시 송규를 그곳에 파견하사 미래 근거를 정케 하셨더니, 이에 이르러 단원의 공사가 이미 끝남을 따라 조합의 후속사무를 여러 사람에게 각각 부탁하시고 기년간幾年間 수양의 계획을 세우사, 10월 20일에 오창건을 데리시고 월명암에 행차하실 새 단원 및 영광 일반 신자는 모두 섭섭한 눈물로써 대종사를 배별拜別하였고 대종사의 행색은 심히 표연漂然하여 복잡한 진세를 뒤에 두시고 곧 운무雲霧를 향하여 신선의 길을 떠나신 느낌이 있었다. 그리하여, 서해 연변을 순회하며 그 익일인 21일에 원목적지인 월명암에 도착하시니, 오랫동안 고대하던 송규는 환희 용약한 마음으로 배알하였고, 당시 월명암 주지화상 백학명도 또한 반가히 영접하여 심히 친절하였다.
(주) 대종사의 봉래산 행차는 그 이면에 어떠한 이유가 있엇든가? 이제 그 대략을 말하자면 일一은 오랫동안 복잡한 정신을 다시 휴양하기 위하심이요, 이二는 재래불법의 교리와 제도를 실지 참고하야 장차 혁신할 본회의 교리와 제도를 초안하려 하심이요, 삼三은 사방에 잇는 인연을 서로 연락하야 장차 회문 열 준비를 하기 위하심이요, 사四는 분망한 세상에 또한 중인의 지목을 피하기 위하심인 듯하다.
대종사께서 임시 월명암에 유숙하사 주자의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써서 영광 단원에게 불니시다. 때에 전주 김제 등지에 거주하던 송적벽 김남천 김혜월 이청풍 등이 대종사의 소식을 탐지하고 곧 달려와서 슬하에 친시親侍하기를 자원하는지라, 이에 12월경에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 후록後麓에 수간 초옥을 매수하여 위치를 정하시고, 수삼數三 제자로 더불어 간고한 처음 살림을 시작하시다.
시창 5년 (경신)
대종사께서 실상 초옥에 계시사 당분간 수양에 전력하시더니, 때에 영광 김제 전주 등지에 거주하는 신자 등이 은연중 서로 소식을 통하여 그 심산궁곡에 방문하는 인원이 차차 계속되는지라, 대종사께서 일변은 여러 사람의 출입이 너무 다번多煩할까 염려하셨으나, 일변은 또한 그 사람들의 정성에 감응하사 매양 흔연 영접하시어 조석으로 강법론도講法論道함을 게을리 아니하시니, 일반 신자 등은 심신이 더욱 상쾌하여 험로 내왕에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아니하며, 근시近侍한 제자 등은 낮에는 산전을 개척하여 생활의 자료를 삼고, 밤이 되면 또한 법석에 참예하여 청법락도로써 자미를 삼았으니, 당시의 법설 요지는 대개 관심 입정과 견성 성불하는 방법을 많이 설하시었다. 3월에 회성곡回性曲이라는 소설 상중하편을 지어셨으나 이도 또한 사람을 교화하는 정식 교과서가 아니라 하여 그 후 드디어 유전치 아니하였다 한다.
4월에 대종사께서 처음으로 본회 교강을 발표하시니 가로되, 인생의 요도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인바 사은은 천지·부모·동포·법률의 피은 보은 배은을 말씀한 것이요, 사요는 남녀 권리동일·지우차별·무자녀자 타자녀교양·공도헌신자 이부사지를 말씀한 것이니, 이는 곧 인생의 마땅히 행할 도로서 세상을 구원할 요법이 되고, 삼강령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계정혜를 단련하기 위하여 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를 말씀한 것이니, 이는 곧 공부인의 마땅히 밟을 도로서 생령을 제도하는 요법이 되며 팔조목은 신·분·의·성 4조로써 진행력을 삼고 불신·탐욕·나·우로써 사연건을 하나니, 이는 곧 삼강령 공부를 운동하는 요법이 되는바, 그 강령이 심히 간명하고 교의가 심히 원만하여 일반신자로 하여금 조금도 미혹과 편벽에 끌리지 아니하고 바로 대로에 들게 하는 본회의 원정교법元定敎法이시라, 그리하여 4월 이강以降으로는 모든 신자에 대하여 교화 방식이 먼저 이 교강 이해로써 공부의 주력을 삼게 하시다. 이때에 대종사께서 밖으로 승려를 교제하사 재래 사원의 모든 법도를 일일 청취하시고 안으로 수삼數三 제자로 더불어 본회의 모든 교과서 초안에 분망하시니 <조선 불교 혁신론>과 <수양연구요론>등이 차례로서 초안되다.
(주) 조선불교혁신론은 재래 조선불교를 시대에 적응하야 대중교화를 의미한 것이요, 수양연구요론은 수양전문의 방식과 각항연구조목을 지정하야 공부인으로 하여금 그 공부의 실경을 밟게 하는 경전이다.
시창 6년(신유)
대종사께서 실상에 주가住駕하신지 수년에 신도의 내왕이 더욱 빈번해지고 거처하신 주택은 너무나 협착하여 운용상 심히 불편을 느끼고 있더니 7월경에 김남천 송적벽 등의 발의로써 수간정사數間精舍를 그 대상臺上에 신축할 새, 송적벽은 기평基平과 축대를 담임하고 김남천은 목역木役을 담임하여 고단한 힘으로써 근근히 성조를 진행하던 중, 월명암 주지 백학명 화상은 뜻 않은 가재목을 보조하였고 그 외에도 각지 신도의 약간 후원이 있었던바, 동년 9월경에 이르러 이에 필역하다. 이때에 대종사께서 각지 신도의 인원이 점점 증가됨을 보시고 다시 단법團法 시험을 하기 위하사 6월경에는 영광 지방에 남자 1단을 조직하시고, 8월경에는 영광·김제·전주 등지를 합하여 남자 1단, 여자 1단을 조직하셨더니 그 후에 정원이 고르지 못하고 통치가 서로 귀일치 못함으로써 장차 후회後回를 기다려 다시 실행하기로 하고 조단 사무를 당분간 중지하시다.
대종사께서 신축 정사에 계시사 새로 초안된 교과서로써 여러 사람의 근기를 따라 예비 훈련을 시험해 보시니 그 성적이 심히 양호하여 모든 신자의 정법에 대한 이해가 일층 진보하였다.
(주) 대종사의 병진 이후로 교화하신 순서를 약론하면 병진년은 어떠한 법을 인용하든지 오즉 발심으로써 교화의 주체를 삼으섯고, 정사 무오 기미는 신성 단결 공심 등으로써 교화의 주체를 삼으섯고, 경신년 춘하간은 성리설과 입정설을 많이 말삼하섯고, 경신년 추동 이후로는 신제 교강으로써 교화의 주체를 삼으시엿다.
자自 시창 7년(임술) 지至 8년(계해)
대종사께서 입산 후 4년을 경과하사 장차 정식 회문 열만한 준비를 대략 마치시고 이미 하산의 시기를 기다리시며, 내면으로 그 계획을 생각하시더니, 임술 12월경에 오창건 송도성을 데리시고 진안군 성수면 만덕암에 행가하사 최도화 전삼삼 전음광 등을 회견하시고 계해 3월에 다시 봉래정사에 환가하사 계시더니, 5월경에 김제에 거주하는 서동풍 서중안 등을 만나시다. 동년 6월경에 서중안이 다시 그 부인 정세월과 동반하여 봉래정사에 와서 대종사를 뵈옵고 말씀하여 가라대, 이곳은 도로가 험난하여 교통이 심히 불편하고 장소가 또한 협착하오니 마땅히 교통과 장소가 편리한 곳을 선택하여 모든 사람의 전도를 널리 인도하여 주심이 시대의 급무라 하여 지성으로써 간청하였다. 대종사께서 드디어 그 말씀에 응락하사 중안으로 더불어 장차 산을 떠나서 정식 회문 열 계획을 의논하시더니, 때에 마침 영광으로부터 모부인母夫人의 병보가 내도하였는지라, 대종사께서 중안과 더불어 다시 동기冬期에 상봉하기로 약속을 정하시고 문정규를 데리시고 줄포를 경유하여 수로水路로 급거히 본댁에 반가返駕하시다.
대종사께서 일찍이 하산을 뜻하신 후로 봉래 회상에 관한 모든 문서를 정돈하사, 그 유공 성적을 고사考査한 바 있었으니 그 씨명은 아래와 같다.
○전무노력자專務勞力者 : 김난천, 송적벽, 김혜월, 이청풍, 송도성, 오창건, 송규
○후원자 : 김광선, 이만갑, 구남수, 김기천, 문정규, 이춘풍, 서중안, 이일근, 송월수, 장적조, 이대련화, 최도화, 김동순, 박호장, 강일생화, 김정각, 장정수, 홍청송월, 이강련화, 박원석
대종사께서 영광에 환가하신 후 동년 7월경 모친 상사를 당하시와 애통중 상장례를 필하시다. 이때에 각지 신도 등이 대종사를 뵈옵기 위하여 많이 영광으로 회집하니 영광 교실이 너무나 협착하여 모든 대중을 용납하기로 심히 불편하고 또는 그 기지가 비습하여 영원한 교실 위치가 적당치 아니하므로 이에 교실 이축의 건을 발론하셨던 바, 모든 사람이 일치 찬동하여 드디어 범현동 전록前麓에다가 기지를 정하시고, 8월에 건축 공사에 착수하여 목조 초즙木造草葺 10간 1동, 8간 2동을 동년 10월에 이르러 필역하니 건축에 동력同力한 씨명은 아래와 같다.
○전무주력자 : 오창건, 김기천, 이재철, 송규, 박세철, 이동안, 송도성, 이춘풍, 송적벽, 김월봉, 김광선, 김남천
○후원자 : 서중안, 서동풍, 송벽조, 이완철, 서기채, 유건, 이순순, 김명랑, 김흥철, 문정규, 유기만, 신정권, 김영철, 김순천, 양하운, 김화옥, 이대련화, 장적조, 이강연화, 이만수월, 정청강월, 강일생화, 이일근, 전삼삼이었고 그외에도 2, 3 동리에 촌인의 조력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