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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스크랩 독일에서의 30년전쟁( The War of Thirty Years
기형도 추천 0 조회 218 06.04.21 16: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독일에서의 30년전쟁                                                                  이길상

 

다. 독일에서의 30년전쟁( The War of Thirty Years / 三十年戰爭)

 

기독교세계의 최대이자 최후의 종교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는 30년 전쟁(1618 ~48)은 4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구교 측 입장에서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제 1기, 즉 전쟁의 발단은 독일의 남부 뵈멘(보헤미아)에서 신교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1618) 황제군에 의해서 진압되고 반란의 주동자들은 철저히 보복을 당했다(1620)

 

제 2기는 이에 불안을 느낀 루터파의 신교국가인 덴마크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의 지원을 약속 받고 독일에 출정했으나(1625) 독일 황제군의 총사령관 발렌슈타인에게 밀려 뤼벡 조약을 맺고 소득없이 전쟁에서 손을 뗐다(1629)

 

제 3기는 발트해의 패권을 노리고 있었던 스웨덴의 국왕이 신교국가의 연합세력을 구축하고 독일에 침입(1630), 일진 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스웨덴 국왕이 전사하고, 신교연합이 무너지면서 구교의 승리로 끝났다(1635)

 

제 4기는 구교국가이면서도 이해관계때문에 배후에서 독일의 신교를 원조하고 있었던 프랑스가 스웨덴과 연합, 독일을 침입하자(1635) 독일은 스페인의 지원을 받고 전쟁을 수행, 일진 일퇴를 반복하다가, 결국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 네덜란드 등과 독일 내의 제후들이 참가하여 지루한 협상 끝에 휴전에 조인, 베스팔렌 조약(1648)으로 독일이 불리한 가운데 전쟁은 종결되었다.

 

전쟁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독일,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국토는 황폐화되었으며, 황제 권은 더욱 약하여 이 후 독일의 분열은 더욱 촉진되었다. 반면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 받았고, 칼뱅 파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프랑스와 스웨덴은 영토를 확장하였다. - 이런 내용을 좀더 상세하게 엮은 것이 아래 글이라 생각하고, 시간이 나시면 천천히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1) 전쟁의 원인

 

30년 전쟁은 독일에서 신·구교간 종교적 갈등이 표출되어 내전(內戰)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변 각국이 종교를 빙자하여 개입, 여기에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지고 복잡한 국제전의 양상을 띄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당시의 독일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덩치만 컸을 뿐 내용상으로는 300 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어 군웅할거의 무대가 되었으며, 황제를 계승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家)는 제국의 안위 보다는 자신들의 영토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고, 다른 제후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운데 루터가 던진 파문은, 평소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자극하여, 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종교개혁이라는 소용돌이로 독일 및 유럽 전체를 몰고 갔고, 급기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겨우 봉합되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좀더 당시의 사정을 들여다 보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서 독일 안에서 신·구교도 간 화해가 일단 성립되었으나, 신교측에서는 루터파만 참석했을 뿐 칼뱅파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배자의 종교는 그 지배자의 영지(領地)에서 신봉된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 선택은 오직 영주나 도시당국자에게만 허용되었을 뿐 일반인들은 지배자가 선택한 종교를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가 신교로 개종하면 성직은 박탈되고, 영지는 카톨릭 교회에 보류(保留)하도록 되어 있어서 이것 또한 분쟁의 소지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우크스부르크 화약은 성립되었지만, 百家爭鳴의 난세에서 이것이 그대로 지켜지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체제가 50 여 년 간 겨우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간의 눈치를 살피고, 자가세력의 부식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톨릭측에서는 스페인에서 시작된 종교재판과 금서목록의 작성을, 교황청의 직권으로 광범하게 실시하고, 로욜라의 예수회 같은 것을 앞세워 실지 回復을 위한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며, 늦게 출발한 칼뱅파 역시 적극적으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를 연 앙리 4세는 자신은 구교로 개종하였으면서도 합스부르크가(家)에서 지배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협공을 견제하기 위해서 독일에 대해서는 신교측을 원조하였으며, 루터파를 신봉하고 있었던 덴마크와 스웨덴 역시 독일의 국내사정에 무관할 수는 없었다.

 

합스부르크가(家)의 황제는 그의 늙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원조를 얻어 구교 측의 세력을 확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 제후나 성직자들의 개종, 결혼, 상속 등의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협정을 적용해서 구교측의 세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런 황제와 구교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신교측에서는 1609년 신교 연합(union)을 결성했고, 이에 맞서 구교측에서는 동맹(league)을 체결하였다. 이렇게 해서 카톨릭, 루터파, 칼뱅파로 3분되었던 독일은, 다시 신·구간의 연합과 동맹이라는 2대 세력으로 정리되었지만, 사실은 그것이 불가능할 만큼 사정은 복잡했다.

 

제후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너무나 타산적이었고, 루터파와 칼뱅파는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으며, 신 구교측 모두가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외세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충돌의 소지는 여러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타협으로 겨우 무마되다가 급기야 뵈멘(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2) 전쟁의 경과

 

보헤미아(라. 영 : Bohemia / 독: 뵈멘Bohmen / 현 체코)는 슬라브계 주민이 중심 세력권을 이루고 독립되어 있었으나,

 

독일의 식민정책에 따라 1198년 독일의 영방이 되었고, 1306년에 프르셰미슬가의 대가 끊어지면서,

 

독일계 룩셈부르크가(家)의 지배를 받았다. 15세기의 종교분쟁인 후스 전쟁(1419 ~ 1436)은 독일의 지배에 저항하는 체코의 국민주의운동이었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신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독일황제 루돌프 2세는 1609년 이곳 루터파의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구교도와 같은 권리를 갖게 해 주었다.

 

그러다가 1617년 예수회의 교육을 받은 완고한 카톨릭주의자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사정은 급변, 루돌프 2세가 제후(諸侯)·기사(騎士)·도시 등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서(1609)를 파기하고 신교도를 탄압하고 구교로 회귀하였다.

 

이렇게 되자 프라하의 신교파 귀족 대표가 시민 1천명을 무장시켜 1618년 5월 23일 아침 왕성으로 몰려갔다. 성안으로 들어간 귀족 대표는 2명의 국왕 고문과 서기 1명을 상대로 부당한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였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난 대표들은 이들 세 사람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20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이들은 중상을 입었으나, 시민 군이 마구 쏘아대는 총알을 피해서 달아났다.

 

서전(緖戰)을 화려하게 장식한 뵈멘의 신교도들은 혁명정부를 조직하고, 국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합스부르크가의 본거지이자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까지 진격하여 기세를 올렸다. 한편 1619년 황제가 죽고 그 뒤를 프리드리히 2세가 잇게 되자, 뵈멘의 의회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선발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5세에게는 칼뱅파라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이에 독일 신교측에서는 루터파가 이탈하였고, 그의 의부(義父)에 해당하는 영국왕 제임스 1세는 스페인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 오히려 스페인과 같은 황실인 독일 황제에게 우호적이었으며,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태도를 바꾸어 독일의 신교도 반란을 방관하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변하자, 페르디난트 2세가 보낸 5만의 황제군은 1620년 11월, 뵈멘에 침입, 프라하 근방에서 프리드리히 5세의 3만 군대를 격파하고, 프라하를 점령하였으며 프리드리히 5세는 외국으로 망명하여 전쟁은 구교측의 승리로 첫 막을 내렸다.

 

페르디난트 2세는 더욱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철저하게 신교도를 탄압하여, 반란의 지도자들은 잡히는 데로 처형되었으며, 처형된 자와 망명자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하였고, 처형을 면한 자들에게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뵈멘 영토의 3/4이 주인이 바뀌었고, 프라하 대학은 예수회교단으로 이관되었다. 또 하나 신교의 거점이자, 뵈멘의 왕으로 추대되었던 프리드리히 5세의 영지 팔츠에 침입해서 여기에도 구교를 강요하게 되었고, 신교 연합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렇게 30년 전쟁의 서막은 구교측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외국 세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독일은 카톨릭의 땅으로 완전히 되돌아 갔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에 의한 중앙집권도 이루어져 다음 단계인 절대왕정에 합류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의 신교 연합이 완전한  패배에 이르자 이번에는 신교측의 여러 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내전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영국,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 프랑스 등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영국은 찰스 왕자의 결혼을 주선했다가 스페인 왕실로부터 거절 당한 국왕 제임스 1세가 평소에도 감정이 좋지 못했던 합스부르크가(家)에 반감을 가지고 신교파 국가들의 동맹을 계획하고 군사비의 제공을 약속하고 전쟁을 부추겼으나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30년 전쟁의 제 2 라운드에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덴마크왕국, 진작부터 독일에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1588∼1648)는, 그가 독일의 홀시타인의 영주라는 구실을 붙여서, 영국 및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얻어 1625년 그리스도교군의 총수로서 독일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황제군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Albrecht Eusebius Wenzel von Wallenstein / 1583. 9 ~1634. 2)과 틸리에게 패배하고, 양측은 뤼벡 조약으로 화해하였는데(1629), 덴마크왕은 홀시타인을 계속 영유하되 독일의 내전에 다시는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땠다.

 

이렇게 덴마크와 화약(和約)을 맺자 오래간만에 황제의 위광(威光)이 살아났다. 이 기회를 놓지지 않기 위해 다른 제후들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復舊令을 발표하였다. 이 복구령은 "구교파의 제후들은 각자의 영내에서 신교도를 추방해도 좋다. 또 신교도의 손에 들어가 있던 교회령은 구교측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지로서, 아우크스부르크화약 이전의 상태도 환원함을 의미한다.

 

복구령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각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루터파의 제후들은 큰 타격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반대하였고, 칼뱅파가 탄압 당하는 것도 못마땅 하게 생각 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2세의 복구령이 단순한 카톨릭에 의한 제국의 재건(再建)이 아니고, 황제를 정점으로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할거(割據)주의를 지향하고 이를 지키려는 구교파 제후들까지 황제의 계획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만약 이때 페르디난트 2세의 뜻대로 통일이 이루어 졌다면 독일은 오랜 분열시대를 종식시키고 절대왕정에 합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뵈멘의 반란을 진압하고 가까스로 잡을 번 했던 통일의 기회는 이번에도 제후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제후들은 황제의 이런 생각 배후에는 발렌슈타인과 그의 군대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면직(免職)을 요구했다. 이런 제후들의 요구를 황제가 순순히 받아들여 그는 면직되어 프라하로 돌아갔다.

 

이렇게 황제군을 승리로 이끈 발렌슈타인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뵈멘의 신교파 하급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합스부르크가(家)에서 일하면서 구교로 개종하였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여 그의 재산과 고리대금업으로 큰 돈을 모았다.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고국 뵈멘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몰수된 토지 등을 구입하여 다시 큰 돈을 모았으며, 덴마크왕의 침입이 있자, 용병을 구할 자금이 없는 황실의 약점을 간파한 그는 황제에게 "저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면 제 돈으로 용병을 사서 전쟁을 치루곘습니다"라고 제안하자,...

 

다급한 상황에서 다른 여지가 없었던 황제는 이를 수락하였고, 발렌슈타인은 자기가 거느린 용병으로 전쟁을 치루면서 약탈로 더욱 재산을 모으고 군대도 10만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런 약탈 과정에서 많은 제후들로부터 반감을 샀던 것은 당연하다.

 

30년 전쟁의 제 3 라운드는 뤼벡 화의가 성립된 이듬해인 1630년 6월,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Gustav II / 1611∼32)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북방의 사자왕(Lion of the north)이라고도 불린 그가 인구 150만의 광막한 스웨덴을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최대의 심혈을 기울인 것은 군비의 증강, 네덜란드의 전문가를 초빙해서 무기를 개량하고 자신이 솔선해서 새로운 무기의 사용법을 익혔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 폴란드, 덴마크 등으로 둘러 싸인 발트해의 지배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이런 그의 계획에 독일 합스부르크가(家)의 세력 북상을 묵과할 수 없었다. 따라서 덴마크가 패배한 직후 그는 직접 정예(精銳)를 이끌고 발트해 남안(南岸)에 위치한 포메른(Pommern)에 상륙, 무릎을 꿇고 신에게 기도를 드린 후 30년 전쟁에 뛰어 들었다.

 

병사들은 성서를 휴대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하루에 두 번씩 예배를 드렸으며, 약탈은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그의 군대는 연전 연승, 갈수록 군대의 숫자도 불어났다. 틸리의 구교동맹군이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하고 대규모 약탈을 자행하고 시민 3만명이 학살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독일의 신교파 제후들은 앞을 다투어 스웨덴 군에 가담했다.

 

1631년 여름 구스타브 아돌프의 정예군과 북부독일의 신교파 연합군은 라이프찌히 근처까지 남하해서 틸리의 황제군과 격돌하였다. 이 전투에서 기병대를 적절히 이용한 구스타브 군대는 승리를 이끌어 북부독일을 해방 시켰고, 그의 군대는 더 남쪽으로 내려와 독일 황제의 본거지 오스트리아의 심장부를 압박했고, 황제군의 장군 틸리를 전사케 했다.

 

다급해진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2년 전에 그로부터 면직되어 프라하에서 제왕 못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로 은거 중인 발렌슈타인에게 사자를 세 번씩이나 보내어 그를 다시 총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발렌슈타인의 등장으로 전쟁의 균형은 구교측에 기울고, 구스타브의 군대는 지쳐 있었으며, 북부독일의 신교 연합군은 방자하였다. 양측이 뉘른베르크에서 맞 부닽치자, 구스타브는 발렌슈타인에게 화의를 요청, 그러나 이를 거절한 발렌슈타인은 신교파의 거점인 작센을 향해 진군했다.

 

이곳의 신교도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뒤 따라간 구스타브 군대는 1632년 11월 16일, 라이프찌히의 남서 쪽 뤼첸에서 격돌하였다.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시작된 전투에서 구스타브 아돌프는 왼쪽 팔과 등에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국왕의 전사 소식은 스웨덴군을 분발시켜 해가 질 무렵 발렌슈타인의 황제군은 라이프찌히로 퇴각하였고, 황제군 전사자 6천, 스웨덴군 4천, 총 1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전투는 끝났다. 스웨덴군이 구스타브의 시체를 찾아 냈을 때는 병사들의 발에 짓밟혀 형체조차 분간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라이프찌히로 퇴각했던 발렌슈타인은 그 길로 프라하로 돌아갔다. 그리고 황제가 불렀으나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에 그가 황제자리를 찬탈하고자 하는 의혹이 있다고 의심한 황제는 다시 그를 파면시켰고, 결국 그는 프라하에서 암살되었다(1634) 이후 황제군의 주력은 스페인군으로 대체되었고 황제군과 스페인군은 스웨덴군을 공격했다.

 

1634년 9월, 스웨덴군의 최후의 거점인 늬르틀링겐(Nordlingen)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신교파가 이탈하기 시작하자, 작센 선제후는 황제측의 요구대로 1635년 프라하에서 휴전조약에 서명했다. 스페인군의 지원으로 스웨덴군을 격파한 황제는 국내의 제후와 도시들에 대한 지배형식을 옛날 그것으로 환원시켜 강화하려 했기 때문에, 이 프라하 조약에서는 신·구 양파 모두가 반발했다.

 

30년 전쟁의 제 4 라운드는 프랑스의 개입으로 막을 열었다. 프라하의 화의 직후인 1635년,  이번에는 막후에서 신교파를 지원했던 프랑스가 전면에 나서서 독일에 출병하고 스페인에도  선전을 포고, 스웨덴과 연합전선을 폈다. 구교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가 독일의 신교도를 돕기 위해서 전쟁에 참가했다면, 종교 이전에 다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군의 저항 또한 만만치 만은 않아, 전쟁은 일진일퇴를 반복하다가, 1637년 독일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가 카톨릭의 복귀와 독일통일의 꿈을 접은 체 사망하고, 제위를 계승한 페르디난트 3세는 전세의 불리와 스페인의 쇠퇴, 그리고 국내 제후들이 오랜 전쟁으로 시달려 모두가 평화를 외치자 41년 종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독일로서는 아무 결정권도 없었다.

 

1641년부터 열린 강화회의는 50킬로미터나 상거(相距)한 베스트팔렌의 두 도시, 믠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독일 황제는 프랑스와 스웨덴을 상대로 각각의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문제의 회의가 개막된 것은 1644년 봄, 참가자는 독일측에서 황제를 비롯한 66개의 영방 대표, 외국에서는 프랑스, 스웨덴, 스페인, 네덜란드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다른 나라의 대표들 수 백 명이 모여 협상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이 국제적 회의에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의석배분에 따른 의전문제에서부터 의사 진행과 방법, 여기에 각국마다 다른 사정과 이해관계가 얽히고,...회의는 지지부진한 가운데 술판이 벌어지고,...전투는 계속되고, 전투의 상황에 따라 회의의 양상도 바뀐다.

 

1648년 봄, 30년 전쟁의 진원지 프라하가 스웨덴에게 점령되었고, 프랑스군은 독일 황제군과 스페인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런 전세의 변화는 회의의 속도가 빨라져 그해 11월에 6년간 끌어오던 화의가 오스나브뤼크에서 조인되었다. 이것이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3) 전쟁의 결과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의 주된 내용을 간추려 보면, 프랑스는 알자스 대부분과 메츠·베르 등을, 스웨덴은 서(西)포메라니아·브레멘주교령(主敎領) 등을, 브란덴부르크는 동(東)포메라니아를 얻고, 그 밖에 바이에른·작센 등도 약간의 영토를 각각 획득하였고, 스위스·네덜란드는 독립을 승인 받았으며,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宗敎和議)가 정식으로 승인되고, 칼뱅파에게도 루터파와 동등한 권리가 주어졌으며, 독일의 제후(諸侯)는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과 외교권·조약체결권이 인정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신성로마제국에게는 사망증명서와 같은 것이었고, 제후들에게는 승리의 사령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용병들에 의한 약탈, 방화, 살육 등으로 국토는 황폐하였고, 한 때 발렌슈타인의 점성술로 있었던 위대한 천문학자 케플러도 이 전쟁의 소용도리에 휘말려 기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

 

굶어 죽거나 역병에 걸려 죽은 것은 케플러 뿐만 아니었다. 당시 1천 6백만 독일 인구가 6백만명으로 줄었고, 국토의 4/5가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는 지배자의 것일 뿐 여전히 일반에게는 지배자의 종교가 당연히 강요되었다.

 

더욱 분열된 독일에서 절대왕정에 합류한 것은 독일 전체가 아니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등의 영방국가 들이었다. 그리고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으로 다시 수모를 당한 독일에서는 급기야 민족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런 기운에 편승해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재상 비스마르크를 기용하여, 철혈정책으로 군비를 강화하고, 외교를 유리하게 이끌어 1871년 1월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베사유 궁전에서 황제의 대관식을 가짐으로서 대망의 통일을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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