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지청장으로 근무하는 도중에도 몇 번인가 김기춘 검찰총장(현 청와대 비서실장)의
연락을 받았다. 한번은 대검 중수부에 과학수사과를 신설하려고 하는데 서울로 올라와서 근무하되 미국에 가서 과학수사 기법을
배워오라는 지시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총무처가 예산 문제로 난색을 표하면서 결국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불발이 되었다 하더라도
나로서는 김 총장의 세심한 배려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뒤 강경지청 근무를 끝내고 대검 공안부 연구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 역시 김 총장의 의사가 전적으로 반영된 인사였음은 물론이다. 대검 연구관은 총장이 비교적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자리였으므로 내 의사를 물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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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원 시절의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당시 공안 부서에 발령받는 것만으로도 잘나간다는 소리를 들을 때였다. 이른바 ‘공안 정국’이 이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대검
공안연구관 자리는 서울지검에서 공안 경력을 쌓은 검사들이 가는 게 보통이었다. 평검사 시절 공안 분야를 한 번도 거치지 않은
나를 공안연구관으로 발령한 것은 그야말로 큰 배려였다. 그것도 공안연구관 여섯 명 가운데 수석이었다. 수석 자리는 차치하고라도
“해방 이후 강경지청에서 대검에 곧바로 올라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농담이 나돌 정도였으니, 나에 대한 인사가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기춘 총장, 나를 대검 공안연구관으로 발탁…내 검찰 인생의 전환점 김
총장과 나는 학연, 지연, 혈연 등 아무런 개인적인 인연이 없었다. 그가 법무연수원장으로 있을 때 내가 연구관으로 모신 일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실낱같은 인연이 이렇게 변방에서 허덕이던 나에게 대검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으니 이
어찌 운명의 손짓이라고 아니할 수 있는가. 이것이 내 검찰 인생의 전환점이 돼 결국 고위직까지 오를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후 대검 공안과장과 부산지검 공안부장을 거쳐 서부지검 특수부장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 나는 김 총장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