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영웅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문득 떠오른 것은 엉뚱하게도 우리 영화 '1번가의 기억'이었다. 한층 더 엉뚱하기로는 정작 떠오른 인물이 주인공과 아주 거리가 멀다는 사실. 챔피언이 되려던 아버지의 꿈을 좇아 권투를 시작했다가 줄곧 두들겨 맞는 여자 복서 하지원도 아니었고, 재개발 현장에서 '버티기'로 일관하는 판자촌 주민들을 협박해서 내쫓는 양아치 노릇을 하다가 갑작스런 심경 변화로 주민들의 편에 선 임창정도 아니었다. 그저 날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컨테이너 박스 위에서 힘차게 도약했지만 고작 1m 남짓 날아간 뒤 거부할 수 없는 중력에 이끌려 늘 땅으로 패대기쳐지고 마는, 그래 놓고도 팔 다리 하나 부러진 곳 없이 멀쩡한 몸으로 이튿날 다시 비상을 꿈꾸는 한 소년. 영화 끝 부분, 어찌 보면 너무도 유치찬란한 그 비행 소년의 성공을 보며 환호작약하며 마음속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용역 깡패들을 신나게 두들겨 패지도, 몰염치하고 무자비한 재개발업자를 응징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훨훨 날았을 뿐인데도, 잠시 명치 끝에 묵직한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의 슈퍼 영웅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할리우드 슈퍼 영웅들을 살펴보자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올해 개봉한 '아이언맨'은 국내 관객만 340만명을 동원했고, 가공할 위력을 가진 초록색 괴물로 변신하는 '인크레더블 헐크' 역시 올여름 극장가에 선보였다. 한 영화 전문잡지는 '슈퍼 히어로(영웅) 대백과사전' 특집판을 내기도 했다.
미국인이나 영화 전문가들은 어떨지 몰라도 1970, 80년대 어린 시절을 살아온 세대들에게 있어 슈퍼 영웅의 정점은 단연 '슈퍼맨'이다. 물론 슈퍼맨 역을 맡았던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삶 역시 가히 소시민적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을 다한 별 크립톤 행성에서 날아온 외계인 슈퍼맨. 그는 인류 구원을 위해 강림한 예수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빛의 속도로 우주를 누비고, 죽은 애인을 되살리기 위해 지구 자전 방향을 되돌리는(그래서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설정은 어이가 없지만) 능력은 가히 신의 범주에 속할 법하다.
지구인과 똑같은, 그것도 하필이면 여러 인종 중 백인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이 어디선가 날아왔다는 가정이 황당하다면 돌연변이들로 뭉친 엑스맨이나 판타스틱4, 스파이더맨, 헐크는 조금 덜 황당한 축에 속하겠다. 그래도 오십보 백보지만. 우주 탐험 도중 만난 방사선 구름에 노출된 뒤 마치 미리 짜놓기라도 한 듯 각기 다른 초능력을 보유하게 된 판타스틱4, 유전자 조작 거미에 물린 뒤 엉덩이도 아니고 손바닥에서 거미줄을 쏘아 대는 스파이더맨, 과학 실험 중 감마선에 노출된 뒤 분노를 통제할 수 없게 되면 바지만 남겨두고 몽땅 옷이 찢어지는 초록색 괴물로 변하는 헐크.
그나마 감당할 수 없는 재력을 바탕으로 슈퍼 영웅의 반열에 오른 배트맨과 아이언맨은 과학적 한계 논란은 제쳐놓고 그나마 현실적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 부모의 죽음과 동굴의 공포로 트라우마에 시달린 나머지 복수심과 정의감(어느 쪽이 우세한지 알 수 없지만)으로, 타락도시 고담의 악당 퇴치에 재력을 쏟아붓기로 한 배트맨. 가장 최근 국내에 알려진 아이언맨과 배트맨의 재산 보유액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들은 재산 공개를 거부(?)했다. 능력만 놓고 본다면 아이언맨이 한 수 위다. 스파이더맨이나 배트맨은 고층 빌딩이 없으면 맥을 못 추지만 아이언맨은 어디든 날아갈 수 있다. 물론 열전도율이 높은 금속 갑옷을 입고 영하 100℃에 육박하는 극저온 상태의 상층대기를 누비고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아이언맨의 매력 중 하나는 '폼생폼사'다. 매끈한 금속 수트는 '나도 저런 거 하나쯤'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섹시하다. 게다가 적의 탱크에 로켓탄을 쏜 뒤 명중 여부도 확인하지 않고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채 휙 돌아 뚜벅뚜벅 걸어오는 모습이라니. 공중에서 일합을 겨룬 뒤 상대가 쓰러지기도 전에 칼집에 칼을 넣어버리는 검객과 사뭇 닮아있다. 아울러 웬만한 슈퍼 영웅의 능력은 죄다 주워 모은 듯한 가공할 위력이 있으면서 행동은 개망나니와 다름없는 다소 엉뚱한 영웅 '핸콕'도 등장했다.
◆우리에게도 슈퍼 영웅이 있을까?
돌아오면 우리 추억 속에도 슈퍼 영웅은 많았다. 만화영화 속에 등장했던 그 많은 로봇들. 마징가, 그레이트 마징가, 그랜다이저, 그로이저-X, 철인 28호. 거기에다 로봇 태권브이까지. 그런데 태권브이를 빼고는 전부 일본 출신이다. 아톰이 그렇고, 독수리 오형제와 캐산까지 일본에서 건너왔다. 말 그대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초능력을 발휘하는 슈퍼 영웅은 우리에게 없는 것일까?
지난 1988년 '600만불의 사나이'와 로보캅, 터미네이터를 능가할 뻔했던 슈퍼 영웅이 우리 영화에도 등장했다. 바로 영화배우 박중훈 주연의 '바이오맨'(우주특공대 바이오맨이 아니다). 재벌 기업인 장만준은 장남인 공학박사 영일을 시켜 비밀리에 연구 중이던 반도체 설계도를 괴한들에게 탈취당한다. 장만준의 차남 도일(박중훈 분)은 문제의 설계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홍콩으로 가지만 어렵게 회수한 설계도를 빼앗긴 후 악당들의 총격에 숨지고 만다. 도일은 최첨단 과학기술을 통해 숨지기 직전 사이보그 인간으로 재탄생하고, 인터폴 요원과 함께 악당들을 추격한다는 줄거리. 하지만, 바이오맨은 우리의 추억이 아닌 기록 속에 남아있다. 조악한 컴퓨터 그래픽이나 스토리 전개 때문에 그럴싸한 할리우드와 재패니메이션 출신 슈퍼 영웅과 대적하기에는 다소 무리였던 것 같다.
우리 역사 속에는 그런 영웅이 없었을까? 언뜻 떠오르기는 홍길동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 역시 초인적인 괴력을 발휘하는 외국산 슈퍼 영웅에 비해 능력만 놓고 본다면 다소 초라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근 드라마에 등장한 '일지매'나 '최강칠우' 역시 현실감을 강조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상상력의 빈곤함 때문인지, 슈퍼 영웅이라 부르기엔 역부족이다. 내년 개봉 예정인 영화 중에는 '전우치전'이 있다. 누명을 쓰고 그림 족자에 갇힌 조선시대 도사 '전우치'가 500년 후에 봉인에서 풀려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괴들에 맞서 싸우는 활약상을 그린 영화란다. 실제 전우치는 역사 기록에도 남아있다. 조선 중종 때 서울에서 미관말직으로 지내다가 사직하고 송도에 은거했던 도술가로 알려져 있다. 소설 속에서 하늘을 나는 전우치는 왕을 속여 황금들보를 얻어낸 뒤 가난에 신음하던 백성들을 구제하며, 족자 속 그림을 실제로 만들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그런 전우치가 영화 속에서 어떻게 각색될지 자못 궁금하다. 따지고 보니 초인간적 괴력을 발휘한 인물은 '변강쇠'가 유일해 보인다. 하지만, 소변 줄기로 바위를 깼다고 해서 슈퍼 영웅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진정 원하는 슈퍼 영웅은?
역대 한국영화 흥행 순위 1~100위를 살펴봐도 딱히 '슈퍼 영웅'으로 부를 만한 인물은 없다. 초인들이 등장하기로는 '아라한 장풍 대작전' '화산고' 등이 있지만 '뻥'이 세기로 이름난 홍콩 영화 속 무협인들에 비해서는 다소 약해 보인다. 악당을 혼내주는 캐릭터로는 '공공의 적'에 나오는 강철중이 있다. 형사에서 검사가 됐다가 다시 형사로 돌아온 강철중은 좌충우돌형 인물로, 가장 최근 얼굴을 내민 미국산 슈퍼 영웅 '핸콕'과 오히려 닮아있다. 하지만 강철중은 하늘을 날지도, 달리는 열차와 부딪치지도 않는다.
우리 영화에는 왜 슈퍼 영웅이 없을까? 한 영화 전문가는 "미국의 독특한 사회 구조에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미국은 200여년의 짧은 역사 속에 적잖은 전쟁과 안팎의 분쟁을 겪었다. 인디언을 학살하고 흑인 노예와의 갈등을 겪었으며, 이후 지구의 경찰국가로 자임하면서 개입하지 않은 전쟁이 없을 정도다. 비록 물질적 번영을 누리지만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언제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상황이 절대 힘을 추구하게 했고, 슈퍼 영웅이 이를 대신한다는 것.
우리나라가 영웅 만들기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회사원 김성준(34)씨는 "튀는 사람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영웅을 만들지 못하는 원인"이라며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명분 속에서 누구 하나 두드러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암묵적 동의가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다"고 말했다. 한 대학생은 "미국 영화는 일단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영웅들이 탄생하는 데 대해 '그럴 수도 있어'라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만약 우리나라에서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처럼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슈퍼 영웅 행세를 하거나 과학 실험, 우연한 사고, 돌연변이로 초능력을 지닌 누군가가 서울 같은 대도시를 활보한다면 '그래, 잘났다'라고 비웃을 것"이라고 했다.
상상력의 빈곤 때문으로 분석하는 이도 있다. 직장인 조윤호(35)씨는 "영화 기법이 뒤지더라도 스토리 전개만 탄탄하다면 우리도 슈퍼 영웅이 등장하는 작품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될 것"이라며 "게다가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는 '미국이라면 저럴 수 있어'라고 한 수 접어주는 반면 우리 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해'라는 비판적인 시각을 앞세우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영웅의 등장 자체에 대해 반감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노력이 아닌 태생적 능력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뿐 영웅 자체는 인정한다는 것. 대학생 강모(24)씨는 "재벌 2, 3세에 대한 반감과도 일맥상통한다"며 "부모를 잘 만나서 혹은 타고난 배경이 좋아서 성공하는데 대해 한편으로 부러움도 있지만 공정치 못하다는 반감이 더욱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영웅으로는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세계를 제패하는 스포츠 스타가 어울린다는 것. 박찬호, 박세리의 성공은 우리 시대의 희망 아이콘이었고, 최근엔 박지성, 김연아, 박태환이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꿈과 이상을 보여주는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 주부 정미경(38)씨는 "할리우드 영웅은 그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영웅일 뿐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노력하며 아파하는 진짜 영웅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