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주의
테스피스(최초의 배우이자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에서 19C 낭만주의 출현 직전까지를 고전시기라 부른다. 합리주의 사상에 바탕을 둔 이성적이고, 균형이 강조된 연극을 말한다. 고전주의는 그리스, 로마의 연극을 창작의 원천으로 하고, 그 표현 형식, 관조 태도를 규범으로 삼는 연극 예술 사상의 개념을 말한다. 고전주의는 삼일치법을 엄수하며, 과거의 재생에서 완성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이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희랍고전(-배우들은 코러스와는 구별되며 성격 묘사가 아주 강하게 드러나는 가면을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문화가 발전되어 감에 따라 인간과 당면한 사건에 더욱 몰두하는 경향을 보였다.)이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로마 고전(-희랍의 모형에 그들의 문예 생산을 크게 의존했다. 그 예로 B.C.240년에 희랍인 서사극 창시자인 안드로니쿠스는 공연을 위해 희랍적인 배경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류의 극은 소위 희랍 옷을 입은 연극으로 불려지며 2세기말에 이르러서야 로마 옷을 입은 연극이 탄생할 수 있었고 공연보다는 읽기 위한 희곡 유행)이나, 이는 로마 특유의 실용주의 사상에 휩싸여 로마만의 고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희랍고전의 재탕에서 머물렀다. 시대는 흘러 엘리자베스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역사에 길이 남은 세익스피어를 만나게 된다. 그는 비록 3일치를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운명, 내면세계를 그린 점에서 뛰어난 평가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는 신고전주의가 탄생하게 되었다. 몰리에르의 {수전노}, 라쉰의 {페드라} 등은 이 시기의 작품이다.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불안, 무한추구, 질서와 논리에 대한 반항 (합리주의와 고전주의에 대한 반항)을 그 원리로 하며 주관적이고 감정적, 상징적, 신비적인 특색을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는 독일에서 1790년경부터 시작되었고 영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다. 프랑스는 대혁명, 나폴레옹의 대두등 정치적 상황으로 하여 1823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극작가로는 오스트리아 최고의 극작가라는 평을 받은 그릴파르써-괴테와 실러의 영향을 받았다-와 클라이스트-괴테에게 대항하려고 노력함- 등이 있다. 그릴파르써의{조상의 여인}이나 {사포} 등은 매우 유명한 작품이며 클라이스트의 작품으로는 {펜테레지아}와 {깨진 항아리} 등이 있다.
사실주의
사실주의 연극은 현대 연극의 시초라고 불린다. 사실주의가 시작된 19C 후반은 산업혁명으로 산업화와 도시 집중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결정론적 유물사관이나 유기적진화론 등이 대두되던 시기로서 사실주의는 이상적인 현실을 배격하고, 권선징악적이고 기계적인 구성이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로서는 현대극에 영향을 준 헨릭 입센({사회의 기둥들}, {인형의 집}, {유령}), 영국 연극의 위상을 높인 버나드 쇼, 체홉({벚나무 아가씨}, {세 자매}, {바냐 아저씨}) 등이 있으며, 그리고 사실주의 연극 이론을 확립했다고 할 수 있는 스타니 슬라브스키({스타니 슬라브스키 연기 이론}-연극 이론서)가 있다.
표현주의
표현주의는 19C 말∼20C 초에 대두되었다. 이 시기는 근대와 현대의 과도기적 전환기로서 양자론이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된 시기이기도 하다. 표현주의는 자연주의의 극단적 사회 고발의 어둡고 무거운 무대와 신 낭만주의의 허상에 대해 반기를 들고 나온 것으로서 인간 내면의 신비와 원초적 체험을 표출하고 제시, 이상세계에 어긋나는 현실 세계의 구조적 부조리 고발의 구체적 해결을 위한 감정적, 체험적 제시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표현주의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무대장치의 빠른 전환과 시청각을 총 동원하여 환몽기법을 통한 내면의 본질 파악의 흐름과 사회개혁이라는 적극적 행동을 지향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작가로는 유진 오닐({지평선 넘어}-퓰리쳐 상 수상, {털 복숭이 원숭이}, {밤으로의 긴 여로})을 들 수 있다.
부조리극
195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극 및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연극.
1940년대의 사르트르나 카뮈도 세계의 부조리와 그에 맞서는 자유로운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묘사했으나 1950년대의 부조리극 극작가들은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초현실주의 등의 수법을 빌어 부조리를 재현하고 그 구체적 이미지를 부여하고자 했다. 카뮈는 자신의 글 〈시시포스의 신화 The Myth of Sisyphus〉(1942)에서 인간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며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용어는 부조리 작품들을 쓴 극작가들과 그들 작품의 공연을 가리키는 말로 다소 느슨하게 쓰이기도 한다. 특정한 형태의 부조리극 운동은 없었지만, 새뮤얼 베케트, 외젠 이오네스코, 장 주네, 아르튀르 아다모프, 해럴드 핀터 등 다양한 극작가들을 비롯하여 그밖에 몇몇 작가들은 하나의 공통된 입장을 공유하고 있었다. 즉, 인간이 어떤 목적을 발견하고 자신의 운명을 제어하려는 몸부림이 헛될 뿐이라는 비관적인 입장을 함께하고 있었다. 이 견해에서 볼 때 인간은 절망과 혼동, 불안을 느끼고 있는 버려진 존재이다.이 극들의 성격을 결정지었던 사상들이 극의 구조를 결정하고 있다. 따라서 부조리극 작가들은 전통극의 논리적 구성의 거의 대부분을 폐기하여, 부조리극에서는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오던 류의 극적 행위를 찾아보기 힘들다. 즉 부조리극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아무리 혼신을 다해 연기를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분주한 연기를 통해 강조되는 점은 그들의 실존을 변화시키는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1953년 처음 무대에 올려진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En Attendant Godot〉에는 줄거리가 배제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뜨내기로 분장하고 나오는 2명의 정처 없는 남자가 날마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도 그들이 누구인가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데, 기다리는 것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아울러 기다리는 것이 과연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신도 없는 상태로 기다림을 계속한다. 이를 통해서 이 극은 처음도 끝도 없는 순환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부조리극의 언어는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으며, 진부한 상투어와 말장난, 반복어, 문맥과는 무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1950년에 초연된 이오네스코의 극 〈대머리 여가수 La Cantatrice Chauve〉의 등장인물들은 자리에 앉아 누구나 아는 뻔한 얘기를 반복해서 말하는데, 나중에는 그 소리가 무의미하게 들린다. 이를 통해서 이 작품은 언어로 하는 의사소통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행동과 말의 조합 때문에 이 극들이 표면적으로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희극적일 때가 있지만, 작품의 기저에는 형이상학적인 비탄이 깔려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코메디아 델라르테, 희가극(보드빌), 뮤직 홀 등에서 나온 희극적 전통의 영향과 무언극 및 곡예와 같은 무대 연기술이 결합되어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동시에 부조리극에는 초현실주의자들과 실존주의자, 표현주의 유파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사상의 영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부조리극은 애초에 연극의 관례를 무시해서 충격을 주고 20세기 중반의 관심사를 적절하게 표현하여 인기가 있었지만,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다소 쇠퇴하게 된다. 즉 부조리극이 한 걸음 더 나아간 실험을 시도하도록 새로운 전위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데 기여했지만 그들의 형식적인 시도 중 일부는 연극의 본류로 흡수되었다. 대표적인 부조리극 작가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예술에서 새로운 방향을 탐색해오고 있으며, 그밖의 작가들은 동일한 성향의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사실주의
자연이나 현실생활을 정확하고 자세하며 꾸밈 없이 묘사하는 예술적 경향.
사실주의는 상상력에 따른 이상화(理想化)를 거부하고 밖으로 드러난 겉모습을 자세히 관찰한다. 넓은 의미의 사실주의는 여러 문화의 다양한 예술적 경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미술에서는, 검투사와 노파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사실주의를 찾아볼 수 있다. 카라바조, 네덜란드의 풍속화가들, 호세 데 리베라와 디에고 벨라스케스 및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같은 스페인의 화가들, 프랑스의 르냉 형제 등을 비롯한 17세기 화가들의 작품은 그 접근 방식이 사실주의적이다. 18세기 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디포, 헨리 필딩 및 토바이어스 스몰릿 등의 작품도 사실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주의가 하나의 미학적 계획으로서 의도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였다. 1850~80년에 나온 프랑스 소설과 그림에서는 사실주의가 주류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주의라는 용어는 1826년 〈 메르퀴르 프랑세 뒤 디즈뇌비엠 시에클 Mercure francais du XIXe siecle〉지(誌)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여기에서는 과거의 예술적 업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현실생활이 제공하는 모델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바탕을 두는 예술가 원칙을 나타내기 위해 이 낱말을 사용했다. 프랑스의 사실주의 주창자들은 아카데미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갖고 있는 인위성을 거부하고 예술작품이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려면 동시대 의식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을 같이했다. 그들은 중하류층의 서민들과 평범한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 꾸밈 없는 사람들의 삶과 모습,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문제와 관습 및 도덕관을 묘사하려고 애썼다. 실제로 그들은 그때까지 무시당했던 동시대의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 즉 심적인 태도, 물리적 배경, 물질적 조건 등을 재현하는 작업에 진지하게 몰두했다. 사실주의는 19세기초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지적인 발전에 자극을 받았다. 즉 주로 평범한 사람을 예술 작품의 주제로 삼는 독일의 반낭만주의 운동, 사회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사회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기록하는 전문적 언론의 등장,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는 사진술의 발달 등이었다. 이런 모든 발전은 동시대의 삶과 사회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다.
회화
사실주의 미학을 의식적으로 선언하고 실천한 최초의 화가는 귀스타브 쿠르베였다. 그의 대작 〈화실 The Studio〉(1854~55,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1855년 만국박람회에서 거절당하자, 그는 특별히 지은 가설 천막에 '사실주의, G.쿠르베'라는 이름을 달고 이 작품과 함께 여러 작품을 모아 전시했다. 쿠르베는 그의 그림을 통해 이상화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고, 평범하고 동시대적인 것에 예술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그는 일상생활상을 솔직하게 묘사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적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앞서 1850~51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던 〈오르낭의 매장 Burial at Ornans〉(1849, 루브르 박물관)과 〈석공들 Stone Breakers〉(1849, 이탈리아 밀라노, 개인 소장)은 검소한 농부와 노동자들을 꾸밈 없이 사실대로 묘사하여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쿠르베가 농부들을 미화시키지 않고 대담하고 거칠게 제시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미술계에 격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주제와 표현 양식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닦아놓은 터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바르비종파는 1830년대 테오도르 루소,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 장 프랑수아 밀레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그 지방의 특징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프랑스 바르비종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독특한 화풍과 서로 약간씩 다른 관심사를 갖고 있었지만 자연의 웅장하고 위풍당당한 측면보다 소박하고 평범한 측면을 강조하여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 그들은 문자 그대로 그림처럼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그림에서 벗어나 면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형태를 충실하게 묘사했다. 밀레는 〈키질하는 사람들 The Winnower〉(1848) 같은 작품에서 농부들을 위엄있고 장대하게 묘사함으로써, 그때까지 중요한 인물들을 묘사할 때만 사용했던 모습을 보잘것없는 서민에게도 적용한 최초의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주의 전통과 관련이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로 프랑스의 화가 오노레 도미에가 있다. 그는 프랑스 사회와 정치를 풍자화한 전형적인 도시 화가였다. 그는 파리의 빈민가와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노동계층의 남녀, 비열한 변호사, 사악한 정치가 들을 그림의 주제로 선택했다. 그 역시 쿠르베처럼 열렬한 민주주의자로 풍자 화가의 명분을 정치적 목적에 직접 활용했다. 도미에는 프랑스 사회의 부도덕성과 추악함을 힘찬 윤곽선, 대담하게 강조한 사실주의적 세부 묘사, 거의 조각 같은 형태 처리 등의 기법을 사용하여 비판했다. 미술에 있어서 사실주의는 프랑스 이외에 19세기 미국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윈슬로 호머의 바다를 주제로 한 힘차고 표현력이 풍부한 그림들, 토머스 에이킨스의 초상화와 뱃놀이 광경 등은 당시의 삶을 솔직하고 냉정하며 정확하게 관찰한 그림들이다.
사실주의란 20세기 미술의 뚜렷한 흐름의 하나로서 일상생활에 대해 좀더 정직하고 예리하며 대상을 이상화시키지 않는 시각을 제시하고자 하는 미술가들의 욕망과, 이 미술을 사회·정치 비판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8인회'(The Eight)라 불리는 미국 화가들은 도시생활의 어두운 면을 신문 기자처럼 신랄하게 묘사한 풍경화를 그렸고, 한편 독일의 미술운동인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의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인의 냉소적인 사고방식과 환멸을 사실주의 양식으로 표현했다. 또한 사회사실주의라 부르는 대공황기의 미술 운동도 그당시 미국 사회의 불공평과 해악을 가혹하고 노골적인 사실주의로 묘사했다. 1930년대초부터 소련에서 공식적으로 후원을 받은 마르크스주의 미학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삶을 충실하게 객관적으로 묘사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사실주의와 거의 관계가 없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직함'이란 국가의 이데올로기 및 선전의 필요성과 일치해야 했고, 용감하고 강인한 노동자와 기술자들의 초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대개 대상을 자연주의적으로 이상화하는 자연주의적 기법을 이용했다. 이런 그림에 묘사된 노동자와 기술자들은 하나같이 영웅적인 적극성을 보여주는 대신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부족하다.
한국에서 사실주의는 통칭 '구상'이라는 용어와 동일시되어왔다. 이는 서구의 아카데미 사실화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유입되어 미술교육의 근간을 이룸으로써 사실상 구상적인 미술 전체가 이러한 아카데미 사실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카데미 사실화란, 사실의 중요성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면서 시민계층의 삶을 인상 깊게 묘사하고 찬미하는 방식으로 생겨났던 서구 사실주의 미술이 19세기 중·후반에 들어와 보다 아카데미적이며 관습적·상업적인 '부르주아 사실주의'로 변화해간 것을 말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미 관례화된 주제(풍경·정물·누드·인물) 시각에 대한 기법적인 혹은 감각적인 변용에 그쳤고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한국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인상파의 한 갈래인 양식과 혼재되어 형성되면서 나름대로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는 묘사중심의 회화를 형성했지만 기본적으로 피상적 수준에서의 현실재현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서구의 아카데미즘적인 사실주의 화풍을 직접적으로 들여온 화가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파리에서 유학했던 이종우였으며 이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우리의 아카데미즘의 한 양식으로 굳어졌다. 주요작가로는 이종우·김인승·심형구·김창락 등이 있다
상징주의
바그너(1813~1883)
.독일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에 영향을 줌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는 음악극 이라는 새로운 예술형태 창조
메테르 링크(1862~1949)
. 리얼리티는 우리의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다라서 작가는
관객에게 자신의 직관과 상응하는 심리상태의 감정을 갖도록
해야한다. 그 방법으로는 상징적인 대상물과 생위를 통해서만
관객에게 암시할 수 있다고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