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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저는 왕위를 포기했습니다.”
1936년 12월 11일 라디오에 둘러 앉아 국왕 에드워드8세가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린다’는 선언을 들은 영국인들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로맨스의 여주인공은 월리스 심프슨.
영국인도 아닌 미국인에 평민 출신으로 두 번 이혼했던 그녀다.
왕위에 오르기 전 에드워드 8세와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영국 왕실은 그녀를 백안시했다.
수려한 외모에 깔끔한 매너, 훌륭한 패션 스타일까지 두루 갖춰 인기가 높았던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올라도 심프슨을 잊을 수 없었다.
사랑과 왕위 중 하나만 선택해야 했던 그는 사랑을 택한다.
국민에겐 충격이었다.
왕에서 물러나 ‘윈저 공’으로 강등된 그는 “내게 가장 가까운 이는 나를 말렸지만 나 홀로 직접 결정을 내렸다”고 연설에서 여러 번 말했지만 사람들은 믿을 수 없어했다.
윈저 공은 이듬해 6월 3일 프랑스 투르 지방의 고성 ‘샤토 드캉데’에서 심프슨과 결혼했다.
연미복에 미소를 머금은 윈저 공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심프슨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사진은 세기의 로맨스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하지만 결혼식은 쓸쓸했다.
하객은 단 16명, 그중 5명은 기자였다.
영국 왕실은 한 명의 하객도 안 보냈다.
윈저 공의 어머니 메리 왕비는 심프슨에게 ‘윈저 공작부인’ 이외의 어떤 왕실 존칭도 허락하지 않았다.
왕실은 윈저 공작 부부의 영국 정착을 금지했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살았다.
영국 왕실 전문 저술가인 휴고 비커스는 최근 더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당시 신문은 윈저 부부의 결혼식을 기본적 사실만 짤막하게 보도한 반면 왕실 가족들이 한가로이 경마를 즐기는 사진은 크게 실었다.
또 결혼식 주례였던 성공회 앤더스 자딘 신부가 자신의 교구를 벗어나 주례를 섰음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렸다”고 했다.
심프슨은 그러나 강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기 길을 걸었다. 결혼식에도 자기 색을 맘껏 드러냈다.
푸른 눈동자의 심프슨은 순백의 전통 웨딩 드레스 대신 푸른색 드레스를 입었다.
드레스를 디자인한 프랑스의 디자이너 멩 루소 보셰는 드레스 색을 '월리스 블루'라 불렀다.
‘월리스 블루’는 케이트 미들턴이 입은 원피스 색과 비슷해 또 주목을 끌었다.
원피스를 디자인한 브라질 출신 다니엘라 이사 헬라옐은 “심프슨 부인이야말로 내 컬렉션의 뮤즈(영감을 주는 존재)”라고 했다.
심프슨은 또 자기 방식으로 복수했다.
영국 일간지 더 텔레그래프는 “심프슨 부인은 엘리자베스 왕비(에드워드 8세의 폐위로 왕이 된 조지 6세의 부인)를 ‘뚱뚱한 스코틀랜드 출신 요리사’나 ‘쿠키(과자를 좋아하는 엘리자베스 왕비의 취향을 비꼰 것)’로 부르며 무시했다”고 전했다.
최근 개봉한‘킹스 스피치’에서도 두 사람이 파티에서 만났지만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장면이 등장한다.
심프슨의 마력은 아직도 살아 있다.
가수 마돈나는 이 세기의 로맨스를 영화로 만들어 올여름에 개봉한다고 텔레그래프지가 보도했다. 마돈나가 각본을 공동 집필하고 감독도 맡았다.
윈저 공 부부는 35년간 해로했다.
윈저 부부의 로맨스 같은 로열 패밀리의 사랑이 꽤 있다.
가까운 일본 왕실에선 아키히토 일왕의 외동딸 노리노미야 사야코(紀宮淸子) 공주가 2005년 도쿄 도청의 공무원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했다. 둘째 오빠가 나이 서른 다섯의 여동생을 동창에게 소개했다는 설이 있다.
공주는 결혼 뒤 왕실 규범에 따라 신분이 평민으로 됐다.
그리고 ‘황적 이탈 일시금’ 명목으로 1억5250만 엔을 받았다.
조금 더 파격적인 경우는 고(故)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의 막내딸 스테파니 레이니 공주다.
공주는 왕실 경호원, 코끼리 조련사 등과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이라는 뉴스를 만들더니 2003년 네 번째 결혼했다.
신랑은 아홉 살 연하의 곡예사.
그러나 오래 못 가고 1년 뒤인 2004년 네 번째 이혼했다.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2001년 6월 네팔의 왕자 디펜드라는 결혼에 반대하는 아버지 비렌드라 국왕을 포함한 8명의 가족을 권총으로 살해했다.
비렌드라 국왕은 며느리 후보가 “정치적 반대자 집안의 딸”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