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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囚人'을 위무하는 치유의 시와 만나다 -문인탐방3 –박윤배 시인 * 들어가는 글:
[박윤배 시인 약력] 1962년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했고 충북제천에서 성장 1984년-1985년 개신문학상(충북대) [박윤배 시인의 시3편] 수인囚人.2
*박윤배: 네 반갑습니다. 누군가 안녕을 물어주고 근황을 알려달라고 하면 왠지 부끄러워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미당 선생은 무슨 일 좀 있으면 좋겠다고 봄날 아무 일 없음이 서러워 시로 쓰지 않았던가요. 저는 요즘 시를 쓰는 일 보다도 일련의 어지러운 시국 사태의 영향인지, 겨울 내내 멍하니 앞산만 보며지냈지요. 앞산 이라하면 “잉어등”을 말함인데 제가 지내고 있는 이곳 가창 <시창작원형상시학>에서 마주보는 산이지요. 잎 지운 활엽수림 틈새로 허기진 산짐승 한 마리 만나보고 싶었는데 결국 보지 못하고 겨울을 나고 말았네요. 산짐승은 보진 못했지만 이제 절기로는 봄이 되었으니, 저 잉어등이 초록 비늘을 달고 꿈틀대기를 좀 더 기다려보는 거지요
*이 령: 嘉昌, 말 그대로 풍광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뜨리에 창가에 앉아 초록비늘을 단 잉어등이 꿈틀대기를 기다린다는 말씀을 들으니 마치 고요한 산사에서 선사께 선문답을 구하는 나그네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의 장소일까요? 선생님의 일상이 더 궁금합니다. *박윤배: 저에겐 참 묘한 곳이지요. 얼마 전 “흘러가다 보면 길이 있겠지 ”하는 시를 썼고 그 시에서 밝혔듯이 흘러와서 또 다른 곳으로 흘러갈 때까지 머물러 충전하는 장소가 아닐까 생각해요. 대구 고성동에서 8년간 시창작원을 운영하다가 우연찮게 이곳 건물주의 제의로 창작원을 옮겨온 곳이지요. 이곳에 와보니 옛 지명이 “냉천”인 곳으로 대구시내보다 기온이 4도 쯤 낮은 곳이고 엄청난 골바람이 부는 곳이기도 하지요. 아마도 이곳은 생의 전반부를 보내고 후반부의 생을 모색하는 곳 이라고나 할까요. 한편 생각하면 제가 유년시절을 보낸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작골이라는 곳과 너무나 흡사한 풍광이어서 다시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든 느낌을 받곤 하죠. 새로운 출발을 꿈꾸려는 막연한 생각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의 장소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곳에서의 일상은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지요. 시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들 찾아오다보니, 처음 갤러리 관장으로 머물기로 한 것이 시를 가르치는 게 주업이 되고 말았지요. 월화수목금 오전 오후 저녁 시창작수업을 하고 있으며 카페도 경영해야하고 보니 정신없이 바쁘기도 하죠
*이 령: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으시다 시를 쓰게 되셨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박윤배: 네 미술교사를 하다가 시를 쓰게 된 게 아니구요. 시를 쓰다가 미술교사가 되었다고 해야겠죠. 그리고 미술교사를 20년 하고 명예퇴직을 한 것이죠. 공직이라는 구속된 의식의 옷을 벗고 다시 자유로운 시를 쓰는 것이겠죠. 거슬러 올라가서 시를 언제부터 가까이 했는지를 더듬어보면 아주 어릴 적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 시절에도 후에 보니 존경했던 선생님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것 아닌가 싶네요. 초등 때 만난 시인 선생님들은 홍석하, 신갑선 시인이 계셨고 중고등 때는 김준현 김기종 선생님과 문학 활동에 스승 박지견, 설창수 시인 등등 주변에 튼튼한 울타리가 있어서 저절로 문학에 대한 꿈이 생겨나지 않았나 싶네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제천고등학교 학교 문예반은 물론 제천시에 있는 여러 고등학교 연합 동아리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냈고 문집 및 시화전활동을 열정적으로 하곤 했지요. 독서와 시작에 너무 골몰하다보니 성적은 물론 건강을 해치게 되어 1년 휴학을 하는 동안 미술을 배운 것이, 대학진학에 있어 진로선택에 미술로 선택한 계기가 되었지요. 대학에 진학 후 문학에 여전히 미련이 많아 충북대동아리 <창문학>에 들어가서 선배들로부터 혹독한 창작 수업을 받게 되었지요. 당시 지도 교수는 평론가 전영태 교수였으며, 인문대 국문과 이동순 시인의 많은 강의를 수강하곤 했지요. 생각해보면 동아리 의 선배들, 현재 활동하는 문인으로 보면 김홍은 <수필가>를 비롯해서 장문석<시인> 안태영 <소설가> 김시천 <시인> 정한용<평론가 · 시인> 정효구<평론가> 등등 선배들과 아래로는 정진명<시인>등을 비롯해서 현재 문단의 많은 문인을 배출한 동아리에서 제대로 시를 공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그러나 그렇게 문학에 심취하게 된 계기는 어쩌면 언어에 대한 어떤 결핍을 이겨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죠
*이 령: 언어에 대한 결핍을 이겨내고자 하는 몸부림이 문학에 심취하게 된 계기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철학의 대상이 무엇이냐는 질문조차 철학이 해결해야할 문제이듯 결핍을 이겨내고자 하는 몸부림도 결국은 더 큰 결핍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질문을 좀 드리겠습니다. 강원도 평창이 고향이시죠? 특별한시절의 추억이 있으신지요? 가족사의 한 페이지를 살짝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 *박윤배: 강원도 평창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면 대화면 대화리 산 484 번지죠. 산모퉁이를 하나 돌아야 이웃집을 만날 만치 깊은 골짜기죠. 화전을 일구는 부모님은 늘 바쁘셨고 거의 낮에는 가족들이 얼굴을 맞댈 수가 없었고 그렇게 대화가 없다보니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았지요. 돌과 계곡물과 나무와 새와 대화를 나누며 놀았고 초등학교 2학년 까지는 학교가 너무 멀어 아버지 지게에 업혀 가거나 며칠씩 학교부근 친척집에서 학교에 다니곤 했지요. 한글도 읽거나 쓰지 못한 채 3학년 때는 충북 제천의 이모 집에 맡겨져 학교를 다녔지요, 그러다보니 특별한 기억이란 시골에서 당시의 흔히 있는 그런 추억들인 것이고 추억이 워낙 많다보니 특별한 추억은 딱히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무의식 속에 어떤 장면들이 자꾸 떠올라 나중에 물어보니 놀랍게도 그 장면들이 돌 무렵 혹은 서너 살의 일이었는데 어떻게 그 장면들을 기억하는지 가족들은 놀라워하기도 하죠. 그중 대표적인 기억이 이승복사건이 일어났을 때 군인들이 집에 와서 머물렀고 총소리가 많이 들렸고 집 앞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부엉이 새끼들 그리고 학교 가는 길 계곡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장면 그리고 성냥을 가지고 놀다 산불을 내고 불속에 갇혀 두려워 우는 내가 아직도 어떤 지워지지 않고 의식을 지배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비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가 지게목발을 두드리며 부르시던 처량한 정선어러리 가락이 알게 모르게 내 뼈 속에 울림으로 들어앉아 버렸는지도 모르죠.
*이 령: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고독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시작에 몰두하시는 모습이 많은 후배 시인들에게 귀감이 되십니다. 1989년 <매일신춘문예> 당선, 1996년 <시와 시학> 신인상 당선, 이후 시집<쑥의 비밀> <얼룩> <붉은 도마> <연애> <알약>을 발간하며 오랫동안 시작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그간의 시적변화가 궁금합니다. *박윤배: 결국 시를 쓴다는 것은 현재의 나에게 만족하지 않기에 어떤 발전적인 변신의 몸짓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매일신춘문예>에 시 「겨울판화」가 당선되기까지 학생문단에서의 중앙문화상(중앙대), 외문문학상(한국외국어대학), 개신문학상(충북대), 대학문학상(원광대) 등에서 시부문 당선을 하면서 당시 안도현 시인이 수상한 상을 이어서 수상하면서 나름 시를 쓰는 일에 자신이 있었으나 동아일보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시고 군 복부를 마치고 대구에 교직 발령을 받아 매일 신춘에 당선되기까지 당시의 시들은 젊은 날의 열정을 고구려적인 패기로 그려내려 했었지요. 또한 광산촌의 어두운 풍광을 통해서 아버지 어두웠던 생의 기록을 찾아가는 형식을 다소 리얼리즘적으로 그려내었다면 매일신춘 당선 시점에 이르러서는 문학성을 고민 김춘수 시인의 영향을 받아 이미지를 첨가하기 시작했죠. 당선소감에서 밝혔듯이 당시 이데올로기가 붕괴되면서 자본주의에서 오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생겨나는 갈등을 서정으로 위무하고 치유하는 문학으로의 시 쓰기 각오를 밝히기도 했지요. 그러나 모든 문제는 내안에서 시작되었고 나와 상관이 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막연하지 않아야한다는 정신을 바탕에 두려고 했었던 거지요.
박윤배: 글쎄요. 되도록 이면 전에 썼던 어떤 기교나 구조로부터 탈피해보려는 노력을 하죠. 앞서 밝혔듯이 시 쓰기는 종전의 나로부터 새로운 모색이니까요. 그리고 기존의 시인들의 시와는 다른 신선한 모양을 추구하죠. 그러나 매우 막막한 것은 표현하는 언어가 가지는 한계가 그러하듯 누구나 쓰는 언어이기에 가끔 내가 쓴 시가 시인의 이름을 가려놓으면 과연 내 시라고 할 만 한가? 독창성에 대해 고민을 하죠. 의미전달 보다는 어째든 다른 각도에서 다른 시각을 가지려는 고민을 새로운 시를 쓸 때 마다 늘 하는 것이죠. 내가 진화해야 나 아닌 누군가에게 시를 가르칠 수 있다는 생각도 그러하고 이론을 따르기 보다는 이론을 새로 만든다는 것이 제 시에 대한 고민이자 방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령: 최근 선생님의 삶에 화두가 있다면요? 박윤배: 삶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죠. 어떤 목적에 성급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내가 쓴 시가 나를 변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킨다면 그 시는 또 누군가의 삶을 변화 시키겠죠. 고등학교 적에 쓴 시가 그러하더군요. 나도 까맣게 잊고 있던 시를 이게 당신이 쓴 시라며 36년 만에 보여주던 한 사람이 있더군요. 그 사람은 당시에 내가 시화전에 걸었던 시를 외우면서 그 긴 세월을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되뇌며 살아왔다 하더군요. 그의 말을 들은 이후 시인이 쓴 시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삶은 그냥 흘러가겠지만 삶의 한 방편이 시인에겐 시이고 보면 시는 어느 순간 불씨처럼 다시 살아나고 누구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앞으로는 되도록 따듯한 시를 쓰려하죠 이 령: 원론적인 질문을 드립니다. 선생님께 시란 무엇일까요? 혹은 시인이란 어떤 의미 일까요? 박윤배: 역대로 수많은 시인이 시를 두고 무어라 정의 했던 간에 나의 시는 어린 시절 호기심에 들어가 보았던 동굴 같아요. 좀은 입구로 몸을 들이밀고 들어가니, 천정과 바닥에서 자라는 종유석들과 밖의 기온과는 다른 온기가 느껴지는 아늑함이랄까. 캄캄하면서도 점차로 눈이 사물을 분간하게 하는 신비함이 있죠. 아파 소리를 지르면 벽에 붙어있던 박쥐가 날아오를 것 같아 그래서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생명과 공존하는 그런 동굴이죠. 아무튼 제게 그렇다는 느낌을 말해본거에요. 이에 비추어 시인은 어떤 의미 일까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동굴에서의 색다른 경험을 누구에겐가 언어로 들려주는 전도사가 아닐까요? 결코 찾아온 누군가에게 상처를 들쑤시지 않고도 치료를 해주는 사람 일 테고 적어도 상처를 도려내더라도 낳게 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언어로 혹은 주술로 치료해야겠죠? 이미 세상에는 칼을 잘 다루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런 대열의 유혹이 있더라도 끝끝내 자신의 길을 가야겠죠? 그 길은 구도의 길과 닮았을 수도 있으나 삶의 순간 울컥하는 감성의 발현을 통해 색다르게 보고 색다르게 생각하고 색다르게 말하는 사람이 시인이 아닐까요.
*이 령: 근작시집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선생님께서 천착하고 계시는 사유, 혹은 그러한 일련의 주제에 영향을 준 다른 관심분야가 있으실 것 같아요? *박윤배: 근작 시집이면 <알약>을 말하시는 것 같은데 이번 시집 이전과 달라진 점은 시인의 사상이나 주의보다도 이미 우주의 모든 질서와 사물들이 품고 있는 생명의 경이로움과 시간의 법칙 같은 것들은 그 자체가 시를 품고 있어 오히려 시인의 일갈은 답습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보는 것, 만져지는 것, 등등 의 느낌을 그대로 옮겨 적어두면 독자도 나름 공감 한다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물과 사물의 구별되는 경계를 그 사물이 품고 있는 용도와 기능 고유의 이름을 허물고 서로 관통하게 하므로 구속이나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려는 몇 펀의 실험적인 시들도 이번 시집 <알약>에 포함되어 있지요.
*박윤배: 글쎄요. 세상에 시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던가요. 단지 글로 순간의 영감을 구슬로 꿰어 어떤 장식물을 만들지 못할 뿐이죠. 등단이라는 무형의 의식을 거쳤다고 해서 자신은 시인이고 시를 쓰지 않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는 생각은 편견인 것이지요. 때 묻은 사람과 때를 지우려는 사람, 정신의 두 부류 중에 시인은 그래도 때를 지우려는 쪽에 시인은 서야하겠지요. 자신이 가장 힘들고 아픈 것 같지만 많은 이들은 세상의 바닥에서 더욱 힘들게 살고 있고, 그렇게 살기에 바빠서 시를 잊은 사람들에게 좋은 시 한편으로 위안이 될 그런 시를 써야하지 않을까요. 시인이라면 우주의 허공에 상상의 안테나 하나쯤은 띠워 두고 말하지 않는 사물의 말에도 귀 기울여야겠지요. 저의 경우 등단할 때의 시를 바라보는 생각이 그러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고 단지 진술방식이나 대상 인식의 변화 과정이 약간 바뀐 정도라 할 수 있지요. 워낙 시인은 많고 더더욱 요즘은 노후의 여가 생활을 위해, 한 때 꿈이 문학에 있었던 분들이 다시 그 꿈을 이루려 시 공부를 하기도 하는데 그 시의 길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아서 등단을 어설픈 겉 치례의 외투로 생각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는 점에서 다소 걱정과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시인이 되는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은 절대 아니죠. 단지 사는데 바빠서 시를 쓰지 못했던 것 뿐 이겠죠. 아무튼 저 부터 시와 삶의 일치를 이루려는 노력이 선행 될 때 타인인 독자도 감동할 시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령: ‘내 혀에서 허공을 지나 그대에게로 건너갈 말들이 쓴맛을 뭉개는 단맛으로 읽혀지길 기대한다’ -시집『알약』시인의 말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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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 많았어요 후배님!
시인을 통해_,
알약을 안 먹어 내가 맹뚱 한 걸 깨달았네
달디단 약이라니
눈 꼭 감고
한 알만 먹어볼까
그냥 흘러갈까..................................--
선배님~~♡
잘 지내시지요?
시를 통한 위약효과 ㅎ
건안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