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 답사는 당진,서산, 예산으로 폭 넓게 잡았지만 답사지는 단 3곳으로 정해졌다.
바삐 돌아 여러곳을 둘러 보아도 좋지만 한곳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충분히 이해하고 여유있게 음미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을거라는 답사팀의 답사철학을 따르기로 했다.
작년 카페 학술의 테마가 '고려'였음에 그 연장선에서 고려의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를 택한 것 이었다.
세곳 모두 내포지역을 대표하는 주요 고장에 걸맞게 고려를 대표하는 예술과 문화를 간직한 곳임을
재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국사지, 보원사지, 서산마애삼존불, 그리고 수덕사 까지 알찬 답사를 마쳤음에도 시간적 여유가 조금 있었다.
답사기획 때부터 거론되던 남연군 묘를 볼수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남연군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생부이다.
사실 남연군의 가계는 왕실의 방계 후손으로 쥐꼬리 만한 권력은 있을 지언정 나라를 좌지우지 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남연군은 왕실의 먼 친척으로 먹고 사는데는 불편함이 없을 정도일뿐 궁궐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행운이 찾아왔다.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이 후사없이 죽자 그의 제사를 지내줄 후손으로 발탁되어 남연군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은신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으로 남연군은 졸지에 정조의 조카뻘이 되어 왕권에 접근할 수 있을 정도의 왕실 어른이
된것이었다.
그러나 남연군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는지 혹은 그 자리의 중요성을 인식 못하였느지 또는
안동김씨의 견제에 시달렸을런지도 모르겠으나 묘소는 지키지 않고 집에 머물거나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곤 했다.
안동김씨들은 그를 여러차례 탄핵하며 자리에서 몰아내려고 했지만 그의 사촌형 격인 순조가 방패막 구실을 해 주었다.
이때 이하응도 몸을 낮추고 안동김씨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노심초사했을것으로 보인다.
이하응이 17세 되던 해에 남연군이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르고 난 그의 형제들은 유명 풍수지관으로 부터
당대 최고의 명당자리 두곳을 추천 받게 된다.
이하응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2대에 걸처 두명의 천자가 나오는 땅(二代天子之地)을 선택한다.
그런데 하필 그들이 택한 곳에는 이미 가야사라는 사찰이 있었고 묘가 있어야 할 곳은 탑이 있었다.
탑이있던 자리는 높은 언덕에 위치하여 사방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 있었다.
지금은 당연히 남연군의 묘소가 있는곳이다.
일반적인 가람 배치외는 확연히 달랐다.
불당이 앞쪽 낮은 곳에 위치하고 탑은 높은 언덕위에, 그리고 불전이 그 뒷편에 있었다.
여기가 과연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온다는 그 명당 땅인가..?
풍수에 문외한이라서 그런지 명당의 기운을 느낄수도 없었고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도 없었지만
옛 지관은 이곳이 어찌 천자지지임을 알아 냈는지 도저히 가늠이 안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연군 사후 10년만에 가야사의 혈지로 기가 가장 왕성하게 일어나는 탑지에 이장을 마쳤다.
이때부터 이하응은 파락호 행세를 하고 상가집 개 라고 손가락질을 당해도 모든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아들이 천자자리에 오르면 손봐야 할 사람과 은혜를 보답할 사람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부조리한 세상의 판을 새로 짤 구상을 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철종이 왕위를 계승할때도 흥선군에게 기회가 왔었는데 안동김씨에 의해 일찌감치 후보자 명단에서 제외되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1864년 철종이 승하하자 흥선군은 둘째아들 명복을 왕위에 올리고 그가 고대하던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으로 등극한다.
조선 땅에는 종전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가야사로 이장한지 18년만의 일이다.
첫댓글 천하의 명당이라는 지관이 말을 100프로 믿고 확신하면, 이미 마음속에선 천하의 명당이 되었으니, 만사형통한 것이고,
누군가 갈파했듯이 풍수지리의 끝판왕은 사람의 마음이라 하지 않았던가~~~
"명당"이라는 영화가 이 글에서 보였습니다.. 스치듯 보았던 영화의 파편들이 -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아름다운 무지개를 그려내 듯, 이 글이 프리즘이 되어 예쁜 무지개 하나를 제가 선물 받은 기분입니다.. ^^
언제나 그리 하셨지요.. 담백하고 편안한 참~ 좋은 글이었네요.. ㅎ
저는 명당일지는 모르지만 쎄하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조선왕릉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는데, 파락호가 묻히기에는 너무 좋은 땅이 아니었을까요? 일부러 그런건지 아무도 말 수 없지만요~
함께하지 못해 서운한 1인이나, 홍고문님의 후기글은 마치 옆에서 저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는 듯 귀에 쏙쏙 들어오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어쩜 이리도 잘 표현하시는지요.
감탄 또 감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