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1일 광화문 교보빌딩의 한쪽 벽면을 가릴 정도로 커다랗게 걸린 시 한 수가 있었다. "대추 한알"이라는 시를 지은 작가 장석주는 그 이후 더욱 유명해졌다. 그의 전원주택에 지인 몇명과 같이 놀러간 적이 있다. 금광호수를 내려다보는 전원주택의 테이블에 둘러 앉아 한담을 하면서, 그에게서 "박명"이라는 단어를 얻었다. 슬금슬금 어두워지는 주위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던진 단어였다. 수주 전에 동료시인의 시평을 하면서, 박명을 소재로 글을 썼다고 했다. 미인박명의 박명이 아니다. 얇을 "박"에 밝을 "명" 자로 이루어진 단어는 "해질녘"과 "새벽녘" 모두를 의미하는 말이다. 영어로는 트와잇라이트(Twilight)이라고 한다.
해가 지평선을 넘어 어둑해지는 저녁 무렵도 박명이고, 어둠 밤을 헤치고 지평선 넘어 옅은 햇빛이 비치기 시작하여 닭이 회치는 새벽도 박명의 시간이라고 했다. 시인은 박명의 시간이 세가지가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시민(Civil) 박명, 항해(Nautical), 천문(Astronomical)박명이 그것이다. 뒤로 갈수록 피아 구별이 더욱 힘들어지는 어두운 시간을 말한다. 시민박명은 지평선 넘어 약 6도 정도까지 해가 숨어 있는 시점의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대에 유목민이 밖에서 활동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다가오는 네발 달린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별이 안되기 때문이다. 전장에서는 이 시간이 새벽 공격의 시점이 되기도 하고, 곧 싸움을 접어야 할 휴전의 시간이기도 하다. 피아구별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새벽이라면 꽹과리를 울리고 수비군이 잠이 덜 깨었을 때를 노린 공격의 시점이기도 하고, 저녁 무렵 태양이 넘어가는 시점이라면 공격하는 측이 아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철수해야 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박명의 시간에 놓이게 되는 일이 빈번하다. 삶의 질곡이 깊은 사람들은 박명의 시간을 자주 대면할 것이고, 어떤 분들은 복이 많은지 그러한 시간을 덜 겪기도 한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삶은 언제나 판단이 분명하다. 그러나, 삶의 도전이 내게 닥치고 변화의 시점에는 내가 내린 결정이 새벽녘(점점 좋아지는)의 결정이 될지, 해질녘(점점 나빠지는)의 결정이 될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는다. 우린 박명의 시간을 두고 삶이 암울하다고 이야기 하게 된다. 예전에 겪지 않았던 잡념이 머릿속에 멤돌고, 발생하지도 않은 두려운 상상이 쌓여, 가슴이 벌렁거리고 머리가 아플 때도 있게 된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보직발령이나, 익숙치 않은 프로젝트, 의지하던 사람의 죽음, 새로운 직장으로의 이동, 미래가 안보이는 휴직이나 퇴직과 같이 계속해 오던 익숙한 일과 영 다른 상황에 처한다. 바로 박명의 시간에 들어선 것이다.
도저히 이러한 일이 내게 왜 일어난 것인지? 설명이 안될 때가 많다. 평소 감동을 주는 말을 블로그에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2011년 5월에 나는 이런 말을 기록했다. "발견한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면, 위기이거나 기회이다." 무슨 이유로 이런 말을 기록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박명의 시간을 설명한 말인 것 같다. 시인도 내게 같은 말을 해 주었다. 박명은 창조의 시간이다. 혁신의 시간이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두뇌에서는 "이건 뭐지?"하면서 안쓰던 두뇌를 활성화 시킨다는 것이다. 영국의 골목을 누비는 택시운전사의 뇌가, 정해진 코스를 다니는 버스 운전자보다 훨씬 해마부분이 발달해 있다는 보도가 이를 반증한다. 박명은 사람의 지성을 발전시킨다.
중학교 때의 은사님 소설가 박기동 선생님을 뵈오니, 이런 말씀을 내려 주신다. “ 맞짱 뜰 상대가 있다는 것은 네가 살아 있다는 증거야!” 그렇게 박명의 시간에는 어두운 곳에서 불쑥 얼굴을 들이대는 맞짱 뜰 상대가 나타난다. 불안함과 자신없음, 삶의 회의, 무기력, 우울함이 그것이다. 맞짱 뜰 상대에게 진다면 멘탈이 찾아오기 쉽다. 해는 질때와 뜰때 사이의 오랜 기다림이 있지만, 사람의 박명은 마음가짐에 따라 기다림이 길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하는 것 같다. 때로는 혼자 힘으로는 극복이 되지 않기도 하다. 우리민족은 지난시간 힘든 박명의 시간에 너무 오랜동안 거한 것 같다. 멀게는 분단현실이 그렇고, 가깝게는 메르스가 그렇다. 어제 군대친구가 일하는 일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방문했다. 그 커다란 홀에 단지 우리 팀 세명만 앉아 저녁식사를 하면서, 홀에 드리운 박명의 시간을 보았다. 대한민국이 전부 박명의 시간에 있는 느낌이다.
직장을 옮기면서 어떤 때는 9개월, 어떤때는 8개월의 시간동안 미래의 일을 잡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후배들에게 5년이 안보이면 일년이라도, 1년이 안보이면 1달이라도 계획을 짜고, 1달이 안보이면 1주일, 일주일이 안보이면 하루라도 계획을 짜서 생활하도록 조언을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계획을 가지고 생활하다 보면 생각지 않은 지적 자산과 좋은 인적 네트워크를 얻게 된다. 평소에 시간이 없어서 못보던 책이나 토픽을 공부하여 지적자산이 느는 것이고, 이해관계가 없는 좋은 만남을 통해 오랜동안 같이 할 벗을 만나기도 한다. 모두 박명의 시간이 있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다.
지나서 생각해 보면 불안한 박명의 시간 동안 예전에 만나지 못한 사람과 예전에 보지 않던 책과 기술을 익혔다. 그러한 일들이 한층 나의 역량을 향상시키고, 세상에 대한 용서와 타인에 대한 포용력도 넓혀 준 것 같다. 그럼에도 새로이 내게 다가오는 박명의 시간은 여전히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기업도 박명의 시간이 있다. 기업의 박명은 서로 다른 도메인이 중첩되는 시점이 된다. 각각의 도메인에서 볼 때 박명은 익숙한 핵심에서 훨 떨어진 외곽의 불안한 지점이다. 익숙치 않은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는 시점이기도 하고, 조직을 흔들어 재구성하는 시점이기도 하고, 두회사의 합병을 앞두고 기업문화의 갈등시간이기도 하고, 해외에 진출하여 보다 큰 민족정서와의 충돌 시점이기도 할 것이다. 박명의 시점은 항상 혼돈이 따라온다. 그래서 배울 수 있다.
시인은 경기도 안성의 전원주택을 버리고, 바다가 보이는 모처로 터전을 옮길 것이라 말했다. 안성 금광호의 전원에서는 정기를 다 빨아먹어서, 이제 그곳은 시인에게 더이상 문학적 감성을 불러 일으키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새로운 보금자리로 자리를 정하면 놀러와도 좋다는 다짐을 받아 두었다. 박명의 시간이 다가와 다시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 질 때에는 그를 찾아 볼 생각이다.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테이블에 놓인 시원한 백포도주를 마시면서 지난 일을 너스레 떨고 싶다. 적당한 알콜과 떨어지는 석양에 아마도 나의 얼굴이 장 시인의 “대추 한알”처럼 붉게 익을 것이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시인 장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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