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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역설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신앙생활은 세상적인 삶의 원리에 정반대되는 일들이 참 많다. 그 예로,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한 것이나- 송사하여 겉옷을 달라하거든 속옷까지 주라고 했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가주라 말씀 등- 이렇게 세상적인 생각과 주님이 주시는 지혜가 서로 반대되는 역설이 될 때가 많다. 또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는 가르침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생각과는 정 반대이다. 오늘 그 중에 몇 가지 중심되는 역설을 살펴보려고 한다.
1. 내가 약할 때 강하다.
내가 약할 때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가? 약한 사람은 지팡이를 짚든지, 휠체어를 타든지- 자기보다 강한 것에 의지하게 된다. 내가 강하면 다른 것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 내가 약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의지하든지- 자동차에 의지하든지- 지팡이에 의지해야 설수 있고 활동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1장 9절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말씀해준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치고, 우리가 약하여질 될 때- 우리는 강하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플러스 인생’이란 신앙잡지에서 읽은 간증이다. 어떤 자매님이 교회에 나오다가 별 재미가 없어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교통사고로 목 신경이 끊어져 하반신 마비가 되어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살아갈 일이 막막해졌다. 어찌할 도리가 없이어,그때부터 새벽기도에 나오고, 기도원에 가서- 평생에 안 해본 금식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집에 와서 남편에게 안수 기도하니까, 남편이 일어나 버리고 만 것이다.
약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았지- 강했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 건강하고 자녀들이 건강한데 왜 하나님을 찾겠는가? 그러나 병원에서 남편이 이제 평생 하반신 마비로 살 수밖에 없다고 선언을 하니- 그때야 강 한자를 찾은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약할 때 강하다는 것은 바로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붙잡고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꿀만한 큰 사건들은 강한 사람들보다는 대부분 약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운동을 할 당시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은둔생활을 하는 가운데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또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다고 하는「천로역정」은 존 번연이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괴로울 때- 하나님께 엎드려 신앙고백한 것을 천로역정으로 엮은 것이다. 밀턴은 그의 유명한「실낙원을 그는 장님이 되어서 아무것을 볼 수 없을 때 상상의 눈을 뜨고 실낙원이라는 아름다운 장편시를 지은 것이다.「레미제라블」은 나폴레옹 3세 때 빅토르 위고가 국외로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할 때-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여 적은 책이다. 음악의 거성인 베토벤은 청각 장애가 와서 음악을 들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자기 이외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훌륭한 작품을 완성했다.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는 소아마비였다. 휠체어를 타고 다녔지만,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4선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힘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위에서 힘이 와야지 내 힘 가지고는 조그만 일밖에 못합니다. 큰일을 하려면 위에서 힘이 와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힘을 얻으려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약할 때 강함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해 주시고 우리를 품어 주시고 안아 주시고 업어 주시기 때문이다.
2. 내가 하나님께 항복할 때 이기는 자가 된다.
사실, 하나님을 반대하고, 그의 뜻을 거역하면서- 내 중심으로, 내 고집대로 산다고 하는 사람은 겉으론 강한 사람처럼 보여도- 실상은 형편없이 약한 자이다. 그러나 내가 깨어져서- 하나님께 항복하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하나님께 항복하여 나온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주신다.
야곱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처자들과 많은 짐승들을 거느리고 얍복강을 건너고자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가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쳐 왔기 때문에- 고향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형이 있는 곳에 사자를 보내어 형, 에서를 달래보려고 했는데- 사자의 말에 의하면, 형, 에서가 동생을 죽이려고 400명의 장정들을 데리고 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듣자 야곱은 간담이 녹았다. 그는 강을 건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 체- 기도를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많은 예물을 준비하여 앞서 종을 보내고- 자기 처자와 짐승 떼까지 얍복강을 다 건너게 하고 난 다음- 자기는 건너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건너가라! 건너가라!”고 했지만 야곱은 “안 된다”고 고집을 불였다. 얼마나 고집이 세든지 초저녁에 씨름을 시작한 것이 새벽에 해가 뜰 때까지 항복을 하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손을 들어 환도 뼈를 치니 뼈가 어그러져 쓰러졌다. 야곱은 절름발이가 되고만 것이다. 이제 큰일 났다. 형이 오면 도망치기도 틀렸다. 환도 뼈가 어그러져서 걸음을 걸어도 그냥 걷지 못하고 몇 발자국도 달아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고 “나를 복내려 주지 않으면 당신을 놓지 않겠나이다.” “네 이름이 뭐냐?” “야곱입니다” 야곱은 쉽게 말하면 사기꾼이라는 말이다. “네 이름은 이제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 불러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졌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긴 자라고 말했을까. 그가 하나님께 항복을 하니 하나님은 항복한 자를 승리자로 불러 주신 것이다.
사실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졌는데 하나님은 진사람 보고 “너는 이겼다”라고 말씀하셨다. 항복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야곱이 하나님께 의지하니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온 형, 에서의 과거의 원한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에서 뛰어내려서 동생을 껴안고 화해하고 죽음을 면하고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싸우지 아니하고 승리를 갖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 항복해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버리면 내 어디 가리까.’ 그 찬송처럼 하나님께 항복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다.
3. 내가 빈 그릇이 될 때 가득해진다.
우리 생각에는 처음부터 가득한 그릇을 가져야지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내가 인생에 빈 그릇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이 채워주시지- 무언가를 가득히 담고 있으면 피울 곳이 없습니다.
죄악과 세상이 가득하면 하늘나라를 채울 수가 없다. 하늘나라가 들어올 틈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다는 것은- 죄와 세속을 회개하고 비워 버려야 천국이 들어올 자리가 있는 것이다. 천국은 빈 마음에만 임한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3절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와 세상을 다 회개하고 빈 그릇이 되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해진다. 탐욕을 비워야 축복이 오는 것이다. 마음에 욕심이 꽉 차서 자기 욕심대로 무엇을 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말씀한다. 나무나 돌을 가지고 형상을 만들어 절하는 것만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탐욕이 곧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자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영생을 얻기 위해 찾아온 부자 청년을 향해-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하신 것이다. 그런데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그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 이때 주님이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고 말씀하셨다.
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십일조와 헌물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돈이 나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공급자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다. 십일조란, 내가 벌어드린 이 돈이- 내 힘으로 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재물을 얻을 능을 주셨음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이 물질은 내 욕구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탐욕을 버려야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 내 빈 마음에 하나님이 오시고- 복을 부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말라기 3장 10절-12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한다.
젊은 사업가인 워너 메이커가 하루는 장미 화원을 잘 가꾼 어느 가정을 방문했다. 그 집의 주인은 워너 메이커를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서- 백장미와 흑장미 등 온갖 종류의 장미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러더니 장미꽃들을 꺾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놀란 워너 메이커가 물었다. “아니, 왜 가지를 모두 칩니까?” 그러자 집 주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다. “좋은 장미 덩굴을 만들려면 가지를 다 쳐버려야 됩니다. 내가 가지를 쳐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워너 메이커는 가지를 잘라내도 잃는 것이 없다는 말에 큰 교훈을 얻고 충격을 받았다. ‘아. 내 사업에 여러 가지 가지를 쳐서 자꾸 나누어 주어야 축복을 받는구나!’ 가지를 그대로 두면 꽃들이 조그마한 것만 달리는데- 가지를 쳐 주니까 몇 송이 피더라도 큼직하고 보암직하게 피는 것처럼- 복도 자잘한 것은 다 나누어 줘야 큼직한 복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워너 메이커는 이 사실을 깨닫고- 선한 일에 그의 재물을 드림으로 그의 사업은 점점 축복을 받아 나중에는 미국의 대 재벌이 될 것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 38)
우리는 욕심을 비워 빈 그릇이 될 때에- 하나님이 그 그릇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축복은- 인색하지 않다. 옛날 시골 장에 곡식을 내온 인심이 후한 농사꾼처럼-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리고- 사랑과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 이웃의 필요를 나눠주고 흩어줄 때- 하나님께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
4. 내가 죽을 때 영원히 살게 된다.
우리에겐 영혼의 속 사람과 육신의 곁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둘 중에 어느 한 쪽이 죽어야 다른 쪽이 산다. 세상 사람은 속사람이 죽어 있기 때문에 육신만 살다가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어차피 썩어질 겉 사람을 죽여야 속사람이 강건해 지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요한일서 2장 15절-17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한다.
이 세상의 욕심은 다 세상에서 왔고, 육신의 정욕에 속한 것들이다.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만지는 대로 다 가지고 싶고, 다 누리고 싶다고, 허랑 방탕한 육신의 삶을 살면- 영은 죽고 만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영의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육은 싫지만- 영은 사는 것이다. 주일날, 세상 일로 바쁘다고, 교회에 자주 빠지면- 육신은 좋을지 몰라도- 그러나 영은 말씀을 먹지 못하고, 굶주리지 않겠는가? 기도생활 안하고, TV 앞에만 앉아 있으면- 육은 좋지만 그러나 영은 말라 죽게 된다. 세상에 화려한 것에 취해서 세상을 따라 가면 육은 좋겠지만- 영은 죽는다. 영은 교회에 와서 말씀 듣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면- 항상, 나의 육신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여 죽였다고 인정해야 하고- 이제는 내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새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입술로 선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이전의 옛 사람은 죽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었다가 주의 영으로 부활한- 새사람이 된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새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변화를 항상 생각하고, 나는 새사람이다고 믿고, 이 사실을 입술로 말하고- 새 신분에 맞는 삶을 살려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 받는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엔 육체는 점차 죽이고, 영은 점점 살아나야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태어나게 해주었지만- 그 다음은 자기가 먹어야 한다. 그래야 잘 자란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되고, 장성해야- 하나님 나라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성경에는 내가 약할 때, 주님을 의지함으로 강하게 되었다 고백하며, 내가 하나님께 항복해서 두 손 들었을 때- 하나님은 나를 이기는 자로 만들어 주셨고- 나의 욕심을 비워야-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되고,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시인해야 영원히 살게 된다고 말씀한다. 이와 같은 역설의 축복이 십자가의 진리와 함께 여러분의 삶 가운데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강한 자가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라 항상 자신을 부인하게 하시고-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께 깨어지고, 항복함으로,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시며,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항상 비워 드림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을 입게 하시고- 날마다 자신을 죽은 자로 여김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