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 창녕인물비사㉓>
한말 거유 대눌 노상익과 소눌 노상직 형제의 항일
“천황 폐하께서 은총을 내리셨소. 노교리! 감사하며 은사금을 받으시오!”
칼을 차고 집에 찾아온 밀양헌병대 소장이 일황이 내렸다는 은사금을 받으라고 회유하며 강요했다. 노교리盧校理라 불린 사람은 묵묵부답 한참 동안 헌병대 소장을 바라보았다. 대의명분에 어긋난 일이라 은사금을 완강하게 거부하며 눈을 부릅뜨고 대답했다.
“은사금이라니! 그것은 매국노들이 받아먹는 것이요. 어찌 망국의 대부가 이에 관여할 것인가? 물리치시오!”
“천황 폐하를 모독하다니! 이자를 당장 잡아서 끌고 가자!“
헌병들이 달려들어 밀양 단장면 태룡동파견소로 끌려갔다. 형이 끌려가자 동생이 따라갔다. 1910년 11월의 일이었다.
형은 사헌부 장령을 지낸 대눌 노상익大訥 盧相益(1849~1941년)이요, 동생은 자암서당의 소눌 노상직小訥 盧相稷 (1855~1931)으로 창녕이 본향으로 옥야의 첨지중추부사 옥촌 노극홍 후손이다. 나라가 망하자 형제는 창녕에서 밀양 단장으로 이거 은거하고 있었다. 구금된 얼마 후에 대눌은 풀려났는데 며칠 후에 다시 을사늑약 반대 발언 혐의로 영남루 근처 헌병대에 압송되어가자 소눌도 따라갔다. 대눌은 고초를 겪고 사흘 만에 풀려났지만, 그 후부터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해 7월에 순종이 퇴위하고 나라가 망하자 대눌은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병이 날 정도였다. 그해 8월에 일제가 강제로 국권 침탈 나라를 빼앗았다.
대눌과 소눌 형제는 극재 노필연克齋 盧佖淵(순조,1827~1885)의 아들로 김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극재가 창녕 옥야에서 생림면으로 이거를 하여 살고 있었는데 1865년에 거유인 성재 허전許傳이 김해부사로 왔을 때 대눌 형제가 그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아버지 극재 노필연이 1879년 가족과 함께 선대가 살았던 동산리 국골로 귀향하였다. 형과 동생은 우애가 돈독했는데 형은 15세 된 동생을 데리고 향시에 응시하는 등 여러 곳을 동생과 동행했으며 추원재, 동산서원 등에서 같이 학문에 정진하였다.
창녕 국동에서 공부하던 대눌은 고종 18년(1882) 34세 때 별시 문과에 급제(아원亞元, 장원 다음)했다.(창녕현지, 과거 참조)
소눌은 26세에 한성시, 28세에 동당시(진사과), 29세에 응제(왕의 특별한 명에 의해 임시로 치르는 과거)에 응하여 급분給分을 받는 등 모두 합격하였다. 1883년(28세)의 젊은 나이에 추원재에서 유생들을 모아 강학을 시작하여 과거시험보다는 강학에 열중하였다,
대눌은 사헌부 지평 때 부친상을 당해 향리로 돌아와 복을 입고 동생 소눌과 함께 이방 봉곡 묘소에서 3년 시묘살이를 했다. 복을 벗은 10여 년 후인 1892년 사헌부 장령(정4품), 성균관 전적, 정삼품 통훈대부에 올랐다. 그러다가 1894년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소눌은 경술국치 후 슬픔에 잠겨 강학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낙향한 대눌은 이방에서 잠시 김해 옛집으로 갔다가 밀양 금곡으로 옮기자 소눌도 따랐다. 금곡 금산서당에서 소눌은 강회를 계속했는데 1896년에 10리 떨어진 노곡으로 대눌이 옮기자 또 소눌도 따라가 자암초려를 지어 강회하니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대눌은 노호정과 풍뢰정 등에서 유유자적하였다.
이등박문이 부산으로 왔을 때 대눌은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영남루에 예비 구금되자 동생 소눌이 따라가 옥중 수발을 했다. 1908년 12월, 순종이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순행 왔을 때 형제가 함께 마중을 나갔으며 이튿날 대눌은 마산까지 호종하기도 하였다.
경술국치를 당하고 일왕의 은사금을 거부한 대눌에 대해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63세 때인 1911년 11월 홀연히 만주로 망명하였다. 동생도 한 달 후에 따랐다.
형제는 만주 안동현 접리촌에 거주했는데 농장을 매입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며 독립투사로 신산한 삶을 살았다. 안효제, 박은식, 신백우 등과 함께 한인촌을 조성하고 이주 한인들의 권익 보호 및 생활 향상을 위해 활동했다. 대눌은 <통사절요> <동역고> 『대한망국사열전』 등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한편 형과 함께 살았던 소눌은 이방 국동에 살던 아들 식용이 1912년 11월 병사하자 형 대눌이 귀향하라는 명에 따라 귀국했다.
소눌은 이방 본가에서 1913년 전에 살았던 밀양 단장 무릉리 노곡동으로 이거 자암서당에서 강회와 저술에 힘을 기울였으며 서책을 간행하는 데 힘을 쏟았다. 회갑 맞아 잔치를 열자고 아들이 말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919년에 파리장서에 서명하여 밀양 헌병대에 구금되어 고초를 치렀다. 청원서 연서자 137명 중 소눌은 일곱 번째 서명자였으며 그의 학맥 제자가 무려 14명이 되었는데 문하생들이 풍뢰정에 모여 서명하였다고 한다. 그는 밀양 한곳에 머물지 않고 창녕, 김해, 마산을 오가며 강론하니 문하생이 천여 명에 이르렀다.
1922년, 만주에서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대눌은,
"내 나이 이미 80에 가깝고 여기서도 원수의 일본 관헌에게 모욕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선산 아래 내 뼈를 묻겠다"라면서 74세 때인 망명 10여 년 만에 결연히 귀국하였다. 노곡동으로 환국 후에 대눌은 자손들의 돌봄도 마다하고 절이나 섬들을 떠돌아다니며 지내다가 1929년 생림면 금곡 선영 산자락에 '천산재'를 짓고 두문불출하며 저작 활동을 했다.
1929년 소눌은 노환이 심해지자 치료차 마산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차도가 없이 1931년 3월 마산부에서 별세하니 향년 77세로 형 대눌은 83세였다. 소눌은 근대 영남 유학자 중에서도 성호 이익의 학통을 따르는 실학자이고 독립운동가로 생애를 마감한 것이었다. 『소눌선생문집』 48권을 자암서당에서 간행하였고, 200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대눌은 1941년 9월(93세) 별세하여 고향 뒷산에 묻혔는데 밀양 풍뢰정, 김해 천산재에 배향되었으며 2017년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
<창녕신문> 2026년 4월 6일 연재분
첫댓글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조금의 손해를 감수하고도 서로의 행복을
기뻐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안녕하세요~??♥
격려는 기적을 낳습니다.
격려는 꽃과 같아서 그것을 주는
사람의 손에도 향기의 일부를 남기기 때문입니다
작은 도움 친절에도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
♡ 기분 좋은 하루┃
┗━━♡━━━┛
행복이란 향수와 같아서
먼저 자신에게 향수를 뿌리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향기를 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랑합니다°³о Have a Good Time.♥♧♡
좋은 글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를 읽고 간직해 주기 만을 하면
행복해 합니다.글은, 우리 삶에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지혜와 깨달음을 주고 아름다운 세상도 보여줍니다
좋은 글과 함께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오늘도 ㈀Ι쁨㉠ł득항l복㈎득 하시길바랍니다~!!!
┌──**─--**★─♧ ı ĿØЦЁ УØЧ ─-**★*─────┐
├。 НðРРУ Ðау。 ♡ ~ 행복○i 가득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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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조금의 손해를 감수하고도 서로의 행복을
기뻐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안녕하세요~?? ♥"
살아가면서 자신감이 정말 중요합니다..
용기를 갖이고 도전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 )) -__날씨 변화가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따끈한
┃▦┃┛커피 한잔의 여유,코끝을 스치는 향이
┗━┛ 하루의 고단함을 녹여줍니다.~♡♡
인생을 살면서 상대를 배려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배려가
진정한 사랑이겠지요?
♡"사랑합니다"о♧ Have a Good Time..♧♡
필요 없는 정보와 시간은 과감하게 정리하고
자신에게 맞는 좋은 습관을 시종일관 유지한다면
여유롭고 풍요롭게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행운은 스스로 운이 좋다고 믿을 때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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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НðРРУ Ðау。 ♡ ~ 행복○i 가득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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