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송은석(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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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죽음으로써 충을 이룬 전이갑·전의갑, 한천서원
프롤로그
소설 초한지는 삼국지와 더불어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소설이다. 중국 진(秦)나라 말, 천하는 혼란에 빠졌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호걸들이 일어나 스스로 왕을 자임했다. 이들 중 힘은 산을 뽑고도 남고 기운은 세상을 덮고도 남는다는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의 용장 항우와 세상을 돕고 백성을 기르는 능력이 탁월했던 ‘보세장민(輔世長民)’의 덕장 유방, 이 두 걸출한 영웅 간의 천하 쟁탈전을 다룬 소설이 바로 저 유명한 초한지다.
형양성 전투 = 동수대전
초한지의 최종 승자는 유방이다. 유방은 항우를 제거한 뒤, 한(漢)나라를 세우고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세상은 그를 일러 한고조 유방이라 칭했다. 하지만 천하의 유방도 항우와의 천하 쟁탈전 과정에서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그때마다 천우신조였을까. 매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200년 전, 유방과 항우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 중에 ‘형양성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에서 유방은 거의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렀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런데 이 전투가 있은 지 약 1,100년 뒤,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유사한 전투가 벌어졌다. 바로 대구 팔공산 자락에서 벌어진 ‘동수대전’이 그것이다.
매미가 허물 벗듯 위기를 모면하다, 금선탈각(金蟬脫殼)
초한지 또는 중국 역사서에 기록된 형양성 전투의 모습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방의 이간책에 의해 항우는 자신의 오른팔인 책사 범증을 잃는다. 이로 인해 항우는 형양성에 주둔하고 있는 유방을 죽여 그 화를 풀고자 한다. 한편 형양성의 유방은 날이 갈수록 성안의 양식이 줄어들자 결국 성을 포기하고 탈출하기로 한다. 유방은 식량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며 항우에게 거짓 항복 선언을 한다. 그리고 그날 밤 유방은 자신의 수레를 타고 형양성 동문으로 나와 항우에게 투항을 한다. 하지만 이때 동문으로 나온 유방은 가짜 유방이었다. 진짜 유방은 그 틈을 타 형양성 서문을 통해 탈출했다.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범증을 잃은 것에 이어, 또 다시 유방에게 속은 항우는 대노했다. 항우는 가짜 유방을 불에 태워 잔인하게 죽였다. 당시 유방의 옷을 입고 유방의 수레를 타고 마치 유방인양 항우에게 거짓 항복을 한 이는 유방의 부하장수 ‘기신(紀信)’이었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그런데 대략 2,200여 년 전 중국대륙에서 벌어졌던 이 형양성 전투의 스토리가 어째 좀 낯익지 않은가! 다음의 이야기도 계속 한 번 살펴보자.
서기 927년, 대구 팔공산 남쪽자락에서 왕건과 견훤이 일전을 벌였다. 전세가 불리하여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왕건. 하지만 그에게는 주군을 위해서라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릴 줄 알았던 충신들이 있었다. ‘신숭겸·김락·전이갑·전의갑’ 등이 그들이었다. 왕건과 신숭겸은 서로 옷을 바꿔 입었다. 그리고 김락·전이갑·전의갑 등의 장수들은 왕건으로 변장한 신숭겸을 마치 왕건인양 호위하며 포위망을 뚫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과부적, 이들은 견훤군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 하지만 견훤이 이들의 계략에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 사이에 왕건은 마치 ‘매미 허물 벗듯’ 평민 차림을 하고 이미 전장을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역사에서는 이 전투를 ‘동수대전’이라 기록하고 있다.
위 두 전투는 지금으로부터 각각 2,200년 전과 1,100년 전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실제 전투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전투에서 주장이었던 유방과 왕건의 탈출 방법이 똑 같다. 변장한 가짜 주장이 상황을 헤집는 동안 진짜 주장은 평민 복장을 하고 몰래 사지를 벗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계책을 일러 손자병법에서는 ‘금선탈각(金蟬脫殼)’이라 했다.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어놓고 그 자리를 떠나가듯, 거짓 상황을 만들어 놓고 몰래 탈출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행정리 한천서원(寒川書院)
동수대전에서 고려 태조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장수들 중에는 전이갑·전의갑 형제가 있다. 이 두 장군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우리 고장인 달성군 가창읍 행정리에 있는 한천서원을 들 수 있다. 한천서원은 1838년(헌종 4), 행정리 일원을 세거지로 하는 전씨 문중과 지역사림이 함께 건립한 서원이다. 서원은 정면에서 마주보았을 때 좌측에 강당, 우측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충절사로 이름 붙은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서원 앞에는 수령 천년을 자랑하는 서원의 상징 은행나무가 서 있으며, 강당 뜰에는 고인돌로 보이는 큰 돌이 하나 놓여 있다. 참고로 팔공산 동화사 집단시설지구 내에 ‘전이갑 장군 순절비’가 있으며, 대구 북구 도남동에는 두 장수의 충절을 기리는 ‘도남재’와 ‘이충사유허비’ 등이 있다.
에필로그
한천서원 강당에 걸려 있는 중봉 조헌 선생의 칠언절구 시 한 수를 감상하면서 이번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참고로 시에 등장하는 ‘악공’은 당나라 때의 이름난 장수 울지경덕을 말한다.
팔공산전장(八公山戰場)
동수하이전초군 (桐藪何耳戰楚軍) 동수(팔공산)전투는 초·한의 전투와 같았으니
동문일사한왕분 (東門一死漢王奔) 동문에서의 한 죽음에 한왕(유방)이 달아날 수 있었도다
분명기신존유씨 (分明紀信存劉氏) 분명 기신(장군)이 유씨(유방)를 살린 것이니
착비악공현무훈 (錯比鄂公玄武勳) 악공의 공로와 다름이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