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39. 유교문화 성지, 대구 달성 대니산 반경 10리(4)
(현풍권 세거지와 재실)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우리는 지금 대구시 달성군 현풍읍과 구지면에 걸쳐 있는 대니산 반경 10리 내 유교문화를 살펴보고 있다. 종택·향교·서원에 이어 이번에는 여러 성씨 세거지와 재실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현풍권을 살펴보고 이어 구지권을 살펴보자. 참고로 앞서 살펴본 못골, 솔례 등은 생략한다.
연안 차씨(延安車氏), 현풍읍 ‘자모리(自慕里)’, 모원재(慕遠齋)
400년 내력 연안 차씨 집성촌 자모리(自慕里)는 대니산 북쪽에 있다. 자모리는 본래 ‘모로촌’ 또는 ‘자무리’로 불렸다. 마을 개척 당시 마을 주변 갈대숲이 마치 노인의 허연 수염을 닮았다고 해서 모로촌(毛老村), 마을이 해가 지는 서쪽에 있어 자줏빛 자, 저물 모, 자모(紫暮)라 했다가 나중에 자모(自慕)로 바뀌었다고 한다. 자모리는 임진왜란 때 형성된 마을이다. 입향조 차순라(車順羅)가 지금의 달성군 논공읍 하리[약산마을]에 살다가, 임진왜란 때 차명상·차명용·차극생·차극상 네 아들을 데리고 자모리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주민 대부분이 연안 차씨였으나 지금은 그 수가 많이 줄었다. 마을에는 입향조 차순라를 기리는 ‘모원재(慕遠齋)’가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현풍읍 오산1리 ‘말뫼’, 추모재(追慕齋)
말뫼는 대니산 북동쪽에 있다. 현풍 읍내에서 대니산 쪽으로 가다가 첫 번째 만나는 마을이다. 이천 서씨 세거지 말뫼는 역사가 350년 정도 되며, 입향조는 서일손(徐逸遜·1644-?)이다. 오래전부터 이곳은 이천 서씨 집성촌이었고 현재도 몇 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천 서씨가 살고 있다. 일부 향토사 자료에는 진주 강씨와 영월 엄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한다. 마을 안쪽에 입향조 서일손을 기리는 재실 ‘추모재(追慕齋)’가 있다. 말뫼는 다른 말로 ‘말무덤·맘마듬·말미·마묘(馬墓)’ 등으로도 불리는데 모두 말무덤에서 파생된 말이다. 마을 전설에 따르면 옛날 이 마을에 장수 기질을 지닌 아이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지레 겁을 먹고 아이를 죽였다고 한다. 얼마 뒤에는 명마(名馬) 한 마리가 태어났는데,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마을 뒷산에서 울다 죽었다.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한을 품고 죽은 아기 장수가 명마로 다시 태어났지만 주인을 만나지 못하자 스스로 죽은 것이라 여겼다. 마을 사람들이 죽은 명마를 마을 뒷산에 묻고 ‘말뫼’라 부른 것이 지금의 마을 이름이 됐다고 한다.
연주 현씨(延州玄氏), 현풍읍 오산2리, ‘홀개’
홀개는 대니산 북쪽에 있다. 현풍 읍내에서 도동서원으로 가다 보면 옛 현풍초등학교 포산분교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오산2리’ 마을 표지석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면 ‘홀개’ 마을이다. 홀개는 300년 내력 연주 현씨 세거지로 처음 터를 잡은 입향조는 현만극(玄萬極·1662-?)이다. 그가 고향 천안을 떠나 홀개에 터를 잡은 것은 스승인 백사(白沙) 윤훤(尹暄)과의 인연 때문이다. 윤훤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따라 경상도 일대를 왕래하면서 이곳 홀개를 눈여겨 봐둔 것. 홀개 안 마을 입구 서쪽 산비탈에 현만극과 그의 아버지 현경준의 묘 등이 있고, 마을 안에 현만극을 기리는 재실 ‘낙은재(洛隱齋)’가 있다. 여느 자연부락처럼 홀개에도 마을 수호신이 깃든 당산나무가 있다. 할배나무는 마을 안쪽 못 뒤편에 있는 소나무, 할매나무는 느티나무로 바깥 마을과 안 마을 사이 길가에 있다. 홀개는 ‘홀’(笏·신하가 조복(朝服)을 갖추고 임금을 뵐 때 양손으로 모아 쥐는 작은 기물)에서 유래됐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마을 형국이 한자 ‘笏’ 자를 닮았고, 마을 앞 낙동강변에 나루가 있어 ‘홀개’ 혹은 ‘홀포(笏浦)’라 했다.
현풍 곽씨, 현풍읍 ‘원당(院塘)’, 추원당(追遠堂)·월계정(月溪亭)
원당은 대니산 동쪽에 있다. 현풍 읍내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다. 현풍 곽씨 영남파는 크게 3개 파로 나뉘는데 현풍 원당 ‘목사공파(牧使公派)’, 영천 마단(麻丹) ‘경재공파(警齋公派)’, 현풍 솔례 ‘청백리공파’다. 목사공파 원당 입향조는 현풍 곽씨 17세 곽창도(郭昌道)로 인근 현풍읍 성하리(城下里)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거 했다고 한다. 원당은 본래 의령 남씨들이 살았다고 하며, 원당이란 이름은 못 너머에 있는 마을, 또는 도동서원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마을에는 문중 서원인 ‘암곡서원(巖谷書院)’, 암곡서원 전신인 옛 ‘포산사(苞山祠)’, 문중 재실인 ‘추원당(追遠堂)·월계정(月溪亭)’ 등이 있다.
경주 최씨, 현풍읍 대리(大里)2리 ‘범안골’, 추모재(追慕齋)·모죽정(慕竹亭)
범안골은 대니산 남쪽 솔례마을 서쪽에 있다. 대리2리 자연부락인 범안골은 다른 말로 ‘호항동(虎項洞)’이라고도 한다. 범안골은 지금으로부터 약 380년 전인 1649년(인조 27년) 청주 판관을 지낸 경주 최씨 최중남(崔重南)이라는 인물이 처음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범안골은 마을 뒷산이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국, 호항동은 마을이 호랑이[虎]의 목[項]에 해당한다는 데서 유래됐다. 또 마을 주변에 닥나무가 많아 ‘딱밭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재실로는 최동은·최중남·최경형을 기리는 ‘추모재(追慕齋)’와 최운묵을 기리는 ‘모죽정(慕竹亭)’이 있다. 마을 남쪽 밭 가운데 수령 200년 은행나무가 있는데 마을 수호신이 깃든 당산나무다. 하나의 그루터기에서 움튼 11개 가지가 한데 엉겨 있어 수령에 비해 나무가 커 보이며 흥미로운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영월 엄씨, 현풍읍 성하2리 ‘웃물문’, 공신정(拱辰亭)’
웃물문은 대니산 북동쪽 낙동강변, 중부내륙고속도로[옛 구마고속도로] 현풍휴게소(하행) 서쪽에 접해있다. 성하리(城下里)는 마을이 현풍 서산성(西山城) 아래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성하리에는 두 개의 자연부락이 있는데 남쪽에 아랫물문[성하1리], 북쪽에 웃물문[성하2리]이 있다. 영월 엄씨 세거지 웃물문은 마을 역사가 약 500년이다. 입향조 엄계(嚴誡)는 갑자사화 때 집안이 풍비박산나고, 부자(父子)가 뿔뿔이 흩어지는 유배형을 당했다.[엄계의 누이가 성종의 후궁 귀인 엄씨] 이때 현풍현에 유배된 엄계는 낙동강가 언덕 위에 단을 쌓고, 매일 새벽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2년 후 그는 연산군에 의해 아버지, 형과 함께 각각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했다. 웃물문 낙동강가 언덕에 엄계를 기리는 ‘공신정(拱辰亭)’과 그가 북향사배(北向四拜) 하던 곳에 유촉비(遺躅碑)가 세워져 있다.
에필로그
대니산은 정상을 기준으로 동쪽이 현풍, 서쪽이 구지다. 대체로 현풍권은 지금도 전통문화경관을 잘 유지하고 있고, 구지권은 전통과 현대문화경관이 공존하고 있다. 대니산 둘레길은 드라이브 코스로도 아주 매력적이다. 전통과 현대, 대니산과 낙동강이 계속 이어져 심심할 틈이 없다. 단, 아는 만큼 보인다고 예습을 좀 해야 제대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