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민(마 26:36~46)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수많은 고민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동차가 없는 사람은 자동차가 있어야 하는데 하면서 고민합니다. 그런데 자동차가 있는 사람은 주차하고 할부금 내는 것을 고민합니다. 돈이 부족한 사람은 돈이 넉넉하게 있으면 하고 고민합니다. 그런데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지키고 불리는데 고민합니다. 이래저래 고민거리가 참으로 많습니다. 자녀 양육 고민, 피부 고민, 취업 고민, 냄새 고민, 소음 고민 등등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고민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고민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과 제자들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어떤 사람은 세례 요한,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알게 하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 또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지옥의 문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줄 것이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잠그면 하늘에서도 잠길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열면 하늘에서도 열릴 것이다”(마 16:13~19).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이 말씀을 하시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뒤돌아보시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마 16:21~23).
예수님은 죽으러 가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항변하면서 말렸습니다. 얼마 전에는 멋진 신앙을 고백했던 베드로였습니다. 너의 신앙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이 사건이 있고나서 시간이 흘러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하루 전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직접 지려고 생각하니까 사실은 아찔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참혹한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간청을 드렸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전능하십니다. 얼마든지 이 방법 말고 쉽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만은 안 지게 해주십시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베드로가 말릴 때는 얼마든지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큰 소리 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을 한다고 나무라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를 꾸짖으셨던 예수님이셨지만 막상 십자가를 지고 죽으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처럼 인간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십자가를 지려고 하니 그 고통을 생각할 때 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길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베드로가 말릴 때 못 이기는 척했으면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까지 해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기 힘들어하시고 고민하셨을까요? 37절과 38절을 보면 “고민”이라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극도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사서 이 고민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고민은 거룩한 고민이십니다. 예수님은 신이면서도 다윗의 혈통에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과 연약함의 문제와 인간 근본의 문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마음은 원이나 육신이 약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합니다(41절).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결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죄악과 저주의 고통이 너무 컸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상의 모든 죄를 져야하니 그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였겠습니까? 십자가의 무게는 우리 성도들의 모든 죄악의 무게와 같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아픔은 우리 성도들의 허물의 크기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저주와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시무시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지 않았으면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왜 지셨을까요?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지셨습니다. 베드로는 항변하면서 말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적인 생각보다는 자신을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습니다. 39절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두 번째 기도하실 때도 똑같은 뜻으로 기도드렸습니다. 42절입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대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마음과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시편 144편 3절입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알아주시고 생각해주셔서 구원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마음과 소원대로 몸서리쳐지는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소원대로 우리를 생각하시고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달게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시동안 고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민의 크기는 바로 우리의 죄악과 허물의 크기만큼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실 때 우리가 생각이 나서 그 고민을 접어두고 기꺼이 우릴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님의 그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받을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이 작사하고 김석균 전도사님이 작곡한 “너는 아느냐”라는 복음송 가사를 낭독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는 아느냐.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아느냐.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너는 아느냐. 너는 아느냐 너는 아느냐. 내가 너를 살리려 나의 생명을 주었고, 내가 너의 수치를 씻으려 나의 생명을 준 것을 너는 아느냐. 나의 은혜를 얼마나 알며, 내 사랑의 노래를 너는 아느냐.”
예수님은 고독하셨고 고민이 크셨습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좋아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도 고민이 되셨지만 결국은 날 위해 저주와 고통의 십자가를 져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나의 수치를 씻겨주시고 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랑의 노래를 알고 11월의 추수 감사의 계절에 하나님께 깊이 감사를 드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