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라는 것은 성악가에게 있어서는 가장 다루기 힘든 개구장이쯤에 해당된다. 내 생각에는 그 불편함은 '덩어리'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오해를 막기 위해 일부러 이 말은 가창시 코의 중요성을 말하기 전에 하는 것이다. 내가 코라고 말할 때는 항상 뒤쪽의 코, 비강을 말한다. 코로 숨쉬는 사람은 공기를 코에 넣을 때 앞쪽 코를 이용한다. 이 기본적 차이를 아는 사람은 다음을 이해할 것이다. 나는 코 안을 향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고 코 안에서 노래한다. 방향이 아닌 장소라는 개념이다. 내쉬는 공기가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언급된 바다. 음은 코를 열면서 의식적으로 시작된다. 이미 들이 쉬는 순간부터 코는 장미의 향기를 맡을 때처럼 최대한 넓게 열려져야 하고 음을 낼 때에도 그렇게 유지되어야 한다. '숨을 들이맡는다!' 동시에 귀(유스타키오관 = 나팔관)도 또한 안 보이게 하품하려는 듯이 열어야 한다. 이 하품느낌의 폭은 하품의 시작 단계를 넘어선 안 된다. 입과 목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서도 안 된다. 소리는 두개골의 폭을 천정으로 해서 둥글어야 하고 구개를 그 공명의 바닥으로 삼아야 한다.
흡사 '치아 안으로 하품!'하는 듯한 이 안 보이는 하품을 할 때엔, 하품으로 약간 펴진 연구개가 탄탄하게 실로 떠놓은 견고한 바닥의 역활을 하고 뼈로 된 바닥인 경구개는 공명작용을 한다. 이때 구개가 긴장하는 것은 귀까지 넓게 확장하는 긴장이고 목젖은 부드럽게 달랑거린다. 그러므로 모든 성악가들의 확장은 구개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은같이 빛나는 음의 정점을 지닌 소위 상음부라는 것이 형성된다. 이 금속성 음향을 두 눈 사이의 앞쪽에서 느끼기 때문에 그러한 음이 앞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음을 준비하는 데에 있어서 구강 넓이에 구애되지 않는 비강넓이가 설정되는 한, 두부음향은 전신음향과 결부되어 있고 이것은 번개같이 빠른 속도로 일어나며 전혀 다른 것의 도움없이 일어난다. 이 밖에도 소리는 코의 도움으로 음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풍부한 상음부를 얻는다. 비유적인 의미로, 그것은 학생용 바이올린으로 스트라디바리를 만드는 것이다. 코를 쓸데없이 너무 많이 쓴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코실험'을 한다. 어떤 모음을 노래하다가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갑자기 양코구멍을 아래서부터 막는 것이다. 즉시 음을 들어봐서 코맹맹이 소리가 나면 공기가 코를 통해 밖으로 내보내지고 있었던 것이다. 좋은 음은 계속 울리는데, 이는 음이 비강공간에 선 채 흔들리기 때문에 또한 음의 파동이 코가 아닌 입을 통해서 몸을 떠나기 때문이다.
두개골이나 두음, 두부음향, 두부공명, 둥근 천정을 가진 소리, 또는 그 비슷한 것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원천적으로 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된다. 이들은 항상 구개 위의 울림을 의미한다. 음이 구강 내에서만 머무르면 유리한 방향으로의 계속적 전개가 불가능해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구개 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래턱과 혀 그리고 뺨(저작)근육이 완전히 이완되게 내버려두는 노력에 의해서만 그것은 가능해진다. 이미 말했듯이,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지식이다. 노력하지 않거나 또는 심년이 부족해서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이렇게 하지 않는 자는, 머리 속에 '신성한' 성악가의 공간을 절대로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때 '약간의' 이완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완전히 이완이어야 한다. 완전히 이완되어야 하는 부위들을 다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아래턱(턱), 혀(특히 혀뿌리), 뺨근육(저작근) 그리고 기관지의 모든 협착근, 성대순은 이미 저절로 긴장한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과를 종종 이루어낸다. 그럼에도 그들이 실패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는 예술가가 집중하지 못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함으로써, 약간 긴장하게 되어 신비한 이완구조도 함께 해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성악가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데, 성악가가 청중들을 대면하고는 음을 내는 데 있어 자신의 좋은 테크닉에 대한 신념을 순간 상실해서, 갑작스럽게 기관지 주변에 약간 압력을 주어 음을 확실히 하려고 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음을 확실하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위태롭게 만들고 만다. '확실히 가기 우한 압력'이 항상 성악가를 유혹하고 있다!
이쯤에서 삼키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해야겠다.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삼키는 일은 목에 아주 좁은 협착을 일으킨다. 회염연골(목구멍 속 기관 위에 있는 연골)은 아래로는 기도 위에 위치해 있고, 동시에 위쪽의 비가으로 통하는 길은 목젖에 의해 막혀 있다. 이제, 목을 좁히는 모든 근육이 압력을 가해서 음식물이나 음료가 식도로 들어가게끔 된다. 삼키는 조직은 매우 예민한 신경으로 되어 있어서 혀가 압력을 조금만 가해도 목적이 위를 막도록 작용한다. 그렇다면 두부로 향하는 작은 문이 닫혀 잇는데, 혀가 밀어대는 '덩어리'는 어떻게 두부공명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기관을 넓게 이완시키고 음을 코로 삼키면 쉽게 두부공명을 얻을 수 있다. 음을 코로 삼키는 일은, 숨기둥이 내 안에 완전히 가만히 머무러 있고, 내갸 내쉬지를 않고 계속 들이마시는 듯한 주관적 느낌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물론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공기가 입을 빠져나가는데, 그러나 퍼지지 않고 곧장 수직으로 위로 올라가서 노래하는 사람의 '코를 따뜻하게 하는' 것같이 느껴진다.
이것은 찬공기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다. 모음 소리를 잘 내고 있을 때에는 입 앞에 댄 거울이 흐려지지 않고, 타고 있는 촛불 또한 5센티 거리에서도 깜박이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악가는 전혀 경계선 없는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몸에 산소가 부족해서 새로운 들숨을 필요로 하게 될 때까지 모음 음을 힘든 기색없이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고도의 가창기술에 달했다는 증거이다. 숨에 결절마디가 있는 성악가는 틀린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코 이상적인 두음으로 음을 시작할 수가 없다. 내가 두음이라고 말할 때에는, 두부음향, 두부공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뒤에 언급한 두 개념은 종종 잘 못 이해된다. 그 둘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두부음향이라는 것은 성대순이 그 가장자리에서 진동하는, 순전한 성대순의 기능이다. 두부음향이라고 불리는 것은 항상 자유롭게 떠 있는 상태의 피아노(약음)로, 이는 버팀과정에서 소리가 커진다. 요들송을 부르거나 유행가 가수들이 쓰는 가성으로는 두부음향을 낼 수 없다.
이것은 숨으로 버팀이 되는 것이지, 가성은 아니다. 두부공명이라는 것은 반향 곧 공간소리의 변화와 관련이 있고 공간소리의 변화는 또 두부음향에서 생긴 음과 관련이 있다. 흉부음향이라는 개념에서는 성대순의 테두리리뿐 아니라 성대순 전체가 진동하며 흉부공명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 둘은 종종 혼용된다. 모든 음의 시작에서 그러니까 커다란 음의 시작에서도, 두음을 추구해야 한다. 저음이나 고음에서 두음으로 연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두음은 점점 더 강해지는 음에서도 항상 핵을 지녀야 한다. 항구적인 코 안의 기류로 그것이 보장된다. 이제 음을 전신 울림으로 확대하려고 하면, 아래에서 위로 밀 것이 아니라 소리의 구명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야 하는데, 이것은 두음이 충분한 강도를 가지고 있기만 하다면 유연하고 넓은 기관에서 저절로 일어난다. 음의 모든 고저와 세기에서 두음을 가진다는 것은 성악가에 대한 최선의 보증이 된다. '두음이 없는' 성악가는 곧 머리 자체가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