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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그는 자유로운 검술 동작을 선보였는데, 힘이 넘치고 장중하며 호쾌하기 이를 데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동작 하나하나가 쾌속 절륜하면서도 우미화려하기 짝이 없어, 춤을 추는지 무예를 시연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검술시연이 끝나자 넋을 잃고 있던 청중은 천지가 떠나갈 듯한 박수로 화답했다. 김일한 곁에 바짝 붙어 앉아있던 에머럴드 리가 김일한에게 속삭인다.
“공자님도 잘 아시다시피, 저런 검법은 문외한들에게는 화려하고 멋지게 보이지만, 실전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죠.”
일한도 공감이 가는지라 고개를 끄덕인다.
“이건 보여주기 위한 쇼이니 그럴 수 밖에 없겠죠. 그의 동작의 숙련도를 보건데, 그는 검술에 대단히 조예가 깊은 것 같소.”
바로 가까이로 다가와 있던 백의녀 매아리가 입을 비쭉거리며 대꾸한다.
“저 정도는 검술을 삼년만 배워도 충분히 시연해낼 수 있어요.”
예로부터 전해오는 무예 격언에 “백일도百日刀 천일창千日槍 만일검萬日劍”이라는 문구가 있다. 도법과 창법, 검법에 숙달될 수 있는 시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원래 무술용어로, 한쪽에만 날이 있는 칼을 도刀라 하고, 양쪽에 날이 선 칼을 검劍이라 하는데, 도법은 백일 즉 삼 개월 정도 익히면 숙달되고, 창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데는 천일 곧 삼년 가까이 걸리지만, 검법에 통달하려면 근 삼십년이 소요된다는 게 이 격언의 진의다.
그 만큼 검법은 매우 까다롭고 익히기 어렵다는 것이 속담의 강조점이다. 그러므로 검법을 삼년만 배워도 환기찬이 시연한 정도를 보여줄 수 있다는 매아리의 발언은, 그를 대단히 깎아 내리는 비아냥거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 환기찬이 군중에게 답례한 후 말한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저의 하찮은 검술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제가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그의 뜻밖의 도전에 관중석은 일순간 웅성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마치 매아리의 발언을 들은 듯한 그의 태도에 김일한도 아연했다.
“이것도 정해진 순서인가요?”
백의녀 매아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에머럴드 리에게 묻는다. 그녀가 매아리를 향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행사 진행요원에게 물어봐야 알 것 같은데요, 아마 저 분이 임의로 이렇게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그에게 어느 정도 재량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매아리 아가씨가 나가서 한 수 좀 가르치는 게 어때요?”
김일한이 웃으며 백의녀 매아리에게 말한다.
“피이! 공자님이나 나가보세요. 저 사람이 저렇게 건방을 떠는 것은, 나올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환기찬은 청중을 사방으로 둘러본 후 말했다.
“제게 검술의 가르침을 주실 선생님이 한 분도 계시지 않다면 아쉽지만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쪽에서 한 사나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모든 관중이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이십사오세 정도 되어 보이는 한 멋진 미장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군중들 사이를 헤집고 연무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일한이 보니 그는, 무예를 시연하기에 편한 상하 백색의 한복을 걸쳤는데, 허리에는 장검을 차고 있었으며, 긴 머리를 잡아 올려 가마꼭지 쪽에서 묶어놓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자칭 김이한이라는 신비로운 청년이었다.
“아니, 저분이 어떻게?”
에머럴드 리가 탄성의 소리를 발한다.
김이한은 공연장 중앙으로 나아가 청중에게 인사한 다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오늘 이 분 공자님과 검술을 겨루어보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대부분의 청중은 환호했으나 검술을 아는 사람들은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검에는 눈이 없다. 자칫하다가는 한쪽이나 서로가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잃을 염려도 없지 않았다.
김일한은 나가서 제지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김이한이 보여준 지금까지의 언행으로 볼 때 결코 허튼 짓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형씨,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김이한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전 환기찬이라 합니다.”
“어떻게 대결할까요?”
“서로 자유롭게 검술을 겨루되, 상체의 치명적인 곳들은 피하기로 하죠.”
“좋습니다. 시간을 어떻게 정할까요?”
“오분 정도가 좋겠습니다. 청중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니, 서로 주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방을 전개합시다. 제가 한 번 공격하면 다음번에는 귀공께서 공격하는 것으로 하고, 이렇게 번갈아 공방을 보여주면 어떨까요?”
“알겠소.”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사방의 군중에게 절을 한 후 양쪽으로 갈라섰다. 둘은 지체하지 않고 공격과 방어에 돌입했는데, 먼저 환기찬이 가벼운 공격에 나섰다.
그는 크게 한 소리 기합을 지르며 검을 휘둘러 김이한에게 짓쳐 들어갔는데, 그 능수능란한 솜씨가 천하일품이었다. 김이한도 즉각 검을 들어 그의 공격을 일일이 분쇄했다.
그의 공격이 끝나자 이번에는 김이한이 역시 맹공을 가했다. 환기찬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의 공격을 매우 가볍게 받아 넘긴다. 두 사람은 드디어 용호상박의 쟁투에 들어갔는데, 서로 좌우로 돌며 회리바람을 일으키고 공중으로 도약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 땅에 닿을 만큼 엎드리는 등, 기기묘묘한 동작들과 수법들을 보여주었다.
군중은 손에 땀을 쥐고 숨도 크게 쉬지 못한 채 고요한 가운데 양인의 시합 장면에 넋을 잃었다.
에머럴드 리가 김일한에게 속삭인다.
“환기찬이라는 사람이 결코 허풍을 떤 게 아니에요. 저 정도면, 대단한 고수 같습니다.”
“그러게요. 아마 그가 상대를 불러 대결을 벌인 것은, 행사 주최 측에서 미리 정해 놓은 순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김이한이라는 청년도 사전에 지명된 사람이고요.”
매아리와 에머럴드 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에머럴드가 바라보니, 두 사람의 실력은 막상막하 백중지간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우열을 가리기가 몹시 어려운 것 같아요.”
“겉보기엔 그렇지만, 실은 김이한이 상당히 양보하고 있을 겁니다.”
가까운 전광판을 주시하며 두 사람의 초식과 검법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던 김일한의 대답이다.
“공자님의 시각이 옳을 거예요. 그러나 저 환기찬이라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적어도 이십년 가까이 검술을 연마한 고수임에 틀림없어요.”
“저도 동의합니다.”
녹음이 우거진 강변의 연무장에서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쟁쟁하게 울리고 기합 소리가 드높으며, 때로는 관중의 박수소리도 장내를 진동했다.
오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무도 다치거나 낭패를 보지 않은 가운데, 두 사람의 쟁투는 청중에게 큰 재미를 선사했다.
두 사람의 인사가 채 끝나지도 않았을 때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초대 가수가 나와 공손히 인사했다. 그녀의 얼굴이 가히 천하절색이라, 뭇 남성들의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 요란하다.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자 검술시연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청중들은 이제 허리띠를 편히 풀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즐거워한다.
“아니, 저분은 루비 운 아가씨가 아닌가요?”
일한의 곁에 에머럴드 리에게 물었다. 그녀가 웃으며 대꾸한다.
“맞아요. 루비 운의 노래솜씨는 따를 사람이 드물어요.”
가수는 복장이나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막춤을 추며 뽕짝을 부르는데, 그 동작이 또한 청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노래 한곡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앙코르를 부르고 난리다.
“고맙습니다. 저의 신곡을 선보이겠습니다.”
그녀의 고운 음성에 이어 이번에는 색다른 전주곡이 나오고 있었다. 가곡 풍이었다. 그 음악은 비장감을 자아낼 정도로 장중하고 웅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의 노래가 시작되면서, 노래에 어우러진 기악성과, 배경을 이루는 합창은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수의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 같고, 백두산이 폭발할 듯, 조천지朝天池가 밤중에 웅웅거리며 우는 것과 흡사하기도 하다.
수억의 군중이 제창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천군만마가 내달리며 땅을 진동하는 듯 가슴을 마구 울리는가 하면, 종결 부분에서는 고요히 잦아들며, 마치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불다가 돌연 하늘이 환하고 맑게 개며 환꽃이 백의민족 삼만리三萬里 강산 온 누리에 만발한 모양의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루비 운이 긴 가곡을 부르는 동안 가사가 전광판에 투영되었는데, 상호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가사의 비애감과 음악의 장중함은 오히려 기이하고 신비한 배합을 이루어, 청자들의 뇌리와 가슴을 그립고도 황홀하고도 아득한 묘경으로 치닫게 한다.
♬
아리하 푸른 물은 저리도 서러워서
천만년 쉬임 없이 울어 울어 흐르나
백의민족 가슴마다 고인 눈물이
못 견뎌 터져 나와 강수江水가 되었네
백악산 하늘 백성 아득 깊은 울음은
솔꽃 강 만 리에 굽이굽이 휘돌고녀
꽃 얼굴 강바람에 황홀하게 취할 제
이 얼에도 환꽃이 완연하게 핀다네
“공자님, 혹시 이 노래 작사자가 누구인지 아세요?”
에머럴드 리가 김일한에게 물었다. 전광판을 들여다보고 있던 김일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1절은 알겠는데, 2절은 잘 모르겠습니다.”
“네 1절은 다물임금의 아내 되었던 완산일매 매아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죠?”
그녀가 매아리 운운하자 곁에 있던 백의녀 매아리가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다.
“2절은, 우리 황홀공주마마께서 1절과 연결해서 지은 거예요.”
“오, 그래요? 그 분은 글을 짓는 재주가 매우 뛰어난 것 같습니다.”
환꽃은 무궁화 꽃의 옛 이름이다. 일한은 그 시문의 의미에 대해 에머럴드 리와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김일한은 속으로 그 노래 가사 2절을 곰곰이 묵상해보았다.
‘이 얼에도 환꽃이 완연하게 핀다네. 환꽃이 구세주의 꽃이라면 그럼 내 가슴에도 구세주의 아름다움이 완연하게 핀다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또 다른 가수가 나와서 노래 한곡을 불렀는데, 이번에는 전통의 육자배기였다.
그 때 에머럴드 리가 김일한에게 속삭인다.
“공자님, 준비하세요.”
뜬금없는 말에 김일한은 답시를 준비하라는 말인가 의심하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뭘 준비해요?”
“다음 순서가 기마술 연출인데, 기수騎手는 공자님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아니, 뭐라고요?!”
그가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옆 사람들이 그를 돌아본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즉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오늘 이른 아침에 기수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대요. 행사 진행 측에서 저희들에게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우리 황궁의 시위대侍衛隊 장병들은 모두 무예가 뛰어나거든요. 근데, 시위대장이 시위대 안에는 기마술 묘기를 보여줄 사람이 마땅히 없다면서, 저더러 이번 부마간택대회 후보자가 된 김일한 공자님의 의사를 타진해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김일한은 백악산아사달 시의 무예계에서 기마술, 사격술, 검술 등이 탁월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제야 내막을 알게 된 김일한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럼 이른 아침에라도 제게 알려주셨더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보시다시피 복장도, 아무런 준비 없이 이렇게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왔습니다.”
“미리 연락드렸더라면 공자님이 제 요청에 응하셨을까요?”
에머럴드가 웃으며 물은 후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한다.
“노래가 거의 다 끝났어요. 그냥 그 옷차림으로 내려가세요. 말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김일한은 어쩔 수 없이,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한이 청중석으로부터 광장 한 가운데로 들어서서 인사했다. 웬 청바지 차림의 젊은이가 나서서 인사하자, 대부분 박수를 쳤지만 일부 사람들은 좀 뜨악한 표정이다.
그가 인사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준마 한 필을 끌고 일한 앞으로 다가왔다. 일한은 말고삐를 넘겨잡고 먼저 말과 눈인사를 한 후, 깊은 애정을 담고 말의 목과 머리, 몸을 쓰다듬었다. 말은 조용히 서 있었다.
일한은 손바닥으로 말 등을 가볍게 한 차례 두드린 후, 말 위로 뛰어 올랐다. 말은 여전히 조용히 서 있다. 일한은 말을 이끌고 장내를 한 바퀴 돌며 다시 인사했다. 청중의 박수소리가 요란하다.
말은 청중들의 박수소리에 고무된 듯, 일한의 요구를 잘 따랐다. 일한은 말에 박차를 가해 드넓은 연무장을 질풍처럼 달린다. 그러자 곧장 말에서 일어나 말 등에 두 발을 딛고 꼿꼿이 섰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올려 청중을 향해 휘젓는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묘기다. 청중의 박수소리와 환호성은 전보다 가일층 높아졌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그는 자리에 앉으며 안장을 붙잡고 말의 배 아래로 내려갔다. 배 아래에 몸을 찰싹 붙인 게 마치 매미가 고목나무에 붙어있는 것 같다. 말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계속해서 질풍처럼 달린다.
말이 장내를 한 바퀴 돌 무렵 일한은 다시 말 등으로 몸을 올린 후 등 위에서 그대로 물구나무를 섰다. 말의 속도는 줄지 않는다. 청중은 그 순간 박수도 잊은 듯 조용해진다.
한동안 물구나무 자세를 취하고 있던 일한이 말 등에 내려앉았다. 그는 말 등이 마치 안방이라도 되는 듯 그 위에서 자유자재로 놀았다. 기계체조 선수가 기계 위에서 노는 것 같고, 벌이 꽃 위에서 노는 것 같다.
말의 속도가 점차 줄어든다. 그 때다. 그는 말이 달리는 방향을 보고 갑자기 양 발과 손으로 말 등을 박차며 공중으로 신형을 날렸다. 관중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일한은 공중에서 두 바퀴 공중재비를 돈 후 가볍게 착지했다.
그러나 질주의 관성으로 인해 그의 발은 착지와 동시 지상에서 앞으로 수 미터나 달리고 나서야 멈춰 섰다.
그가 묘기를 끝내고 인사하자 여기저기서 거듭 카메라가 터지고 야단법석이다. 김일한이 말을 넘겨주고 들어가려 할 때, 행사진행 요원 한 사람이 나와서 활과 전통에 든 화살 세 대를 건네준다. 아마도 기마사궁 시범을 보이라는 뜻인 것 같았다.
관중들이 자리잡지 않은 남쪽 강변에 표적이 서 있었다. 김일한은 전통을 허리에 차고, 다시 말을 잡아 탄 다음 속도를 내었다. 처음 한 발은 말이 강 반대편에서 서로부터 동으로 달릴 때 날리고, 두 번째 화살은 거꾸로 동편에서 서편으로 달릴 때 날렸다.
화살 두 대가 과녁에 꽂히는 소리가 특수 음향장치로 요란하게 울린다.
그리고 마지막 한 대는 말을 달려 과녁 가까이 갔다가 다시 말머리를 돌려 과녁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면서 뒤를 돌아보고 날렸다. 세 번째도 역시 과녁에 꽂힌다.
명중 여부를 알려주는 고전꾼은 세 개의 화살이 모두 과녁의 정중앙에 명중했음을 큰 소리로 외쳤다. 일한은 말에서 내려 인사한 후 청중이 박수로 화답하는 동안 자리로 들어왔다.
그가 연무장 밖으로 나오자 진행요원이 들어와 무예 시범이 끝났음을 알린다. 김일한이 일행에게 돌아오자, 서울아줌마들은 난리가 아니다.
“아이고야, 총각이 그런 놀라운 묘기를 가진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런 재주를 썩히고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나 한다니, 총각 제정신이야?”
“제가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대타로 나섰지만, 이런 일에 전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원래 자신이 뼈를 깎는 고통 가운데서 연마한 기술이나 학문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법이야. 하지만 어쩌겠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전공을 살려야지.”
“제 전공은 좀 다른 거죠.”
“뭔데?”
“좀 학문적인 겁니다. 별 거 아녜요.”
그가 말하기를 꺼려한다. 에머럴드 리가 일한과 헤어지면서 은근한 눈길을 보낸다. 백의녀 매아리는 그녀의 뒤를 잠깐 노려보다가 일한 곁으로 다가왔다.
일행은 다시 나룻배로 속말수를 건너고 마차를 이용해 황홀객잔으로 이동했다. 웃고 떠들며 점심식사를 맛있게 마친 후 느긋한 담소를 나누다가 시간에 맞추어 대조영의 천문대첩 실전이 시연된다는 아사달벌로 향했다.
천문대첩은 원래 천문령이라는 산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관광의 편의상 시연은 평지에서 펼쳐진다.
아사달벌은 동남쪽 성문 안에 대략 삼십여 만평의 숲과 들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대주택 마을도 그 안에 조성되어 고전영화 촬영 장소로도 빈번히 이용된다. 그곳에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대의 전투 드라마가 자주 공연되는데, 관중들은 이십여 미터 높이의 동쪽 성벽 위와 수십 미터 높이로 축조된 서쪽의 계단식 관람석에서 그 장면을 구경한다.
동시에 십여만 명 이상이 관람할 수 있다.
들판이 넓어 관중이 전투장면을 자세히 보기 어렵기 때문에, 관중석에는 또한 전광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관객은 이것을 통해 배우들의 세세한 대사와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
일한의 무리 가운데는 여전히 매아리 자매 두 사람이 따라붙었다. 녹의여경 매아리는 일행의 맨 뒤에서 걸어가다가 어딘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 그녀의 발걸음이 멀찍이 뒤쳐진다.
“여보세요?”
“저 환기찬입니다.”
“아, 공자님, 안녕하세요?”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네, 물론입니다.”
“오늘 오전 저의 검술 시범을 혹시 보셨나요?”
“그럼요.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아, 보셨군요. 뭐 그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환기찬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묻는다.
“오전 무예 시범 때 혹시 관중석에 에머럴드 리라는 황홀공주의 시녀가 김일한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까?”
“네, 그래요. 아셨군요.”
“누군가에게 들었습니다. 혹시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아시나요?”
“황홀공주가 시녀를 통해 어젯밤 무언가를 김일한씨에게 전해주었는데, 공자님은 그걸 아세요?”
여경 매아리가 반문한다.
“아뇨. 전혀 모릅니다.”
환기찬이 진짜로 몰랐을까? 여경 매아리는 그렇게 의심하며 대답했다.
“오늘 오전에 김일한과 에머럴드 리가 나눈 대화는 아마도 그것과 관련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래요? 지금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여기 아사달벌입니다. 오후 공연 질서유지 요원으로 나왔습니다.”
“거기 혹시 김일한씨도 같이 있나요?”
“네, 그래요. 서울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 구경나왔나 봐요.”
“저 좀 바꿔주시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전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라는 게 바로 드러나잖아요? 어젯밤에는 초면인 척했는데.”
“괜찮습니다. 어제 어차피 통성명하고 전화번호를 나누었으니까요.”
“직접 그에게 전화를 거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전화기가 꺼져있네요.”
여경 매아리가 김일한에게 뛰어가 말없이 전화기를 건네준다. 김일한이 의아한 얼굴로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환기찬입니다.”
“아이고, 환형이시군요. 오늘 오전 공연 자리에서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일행 때문에 만나 뵙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 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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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6. 9. 3. 초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