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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경제운동을 위한 메모 -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 사례를 중심으로 -
조세훈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 사무국장)
0. 사회적경제‘운동’에 대한 접근
‘사회적경제’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은 낯선 용어입니다. 일부에서는 ‘사회적’이라는 표현에서 특정 색깔의 징후를 발견하곤 손사래를 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색깔로 세상을 바라보기 전에 현실을 먼저 직시할 수 있다면 ‘사회적’의 의미를 수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회적경제’를 주목하는 것은 경제가 탈사회화된 처참한 시장독재의 결과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다름아닌 무한경쟁,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정글자본주의’입니다. 이대로라면 앞선 일부의 우려와는 정반대로 시장독재 경제질서의 종착점이 어두운 핏빛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각 나라마다 사회적경제를 둘러싼 역사와 전통은 제각각 다릅니다. 프랑스를 위시한 서유럽의 ‘사회적’경제 전통과 영미식의 사회적‘경제’의 맥락은 강조점의 차이를 넘어 철학적 기반의 상이함을 보여줍니다. 이 경향은 ‘사회적기업’에 대한 접근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어떤 이들은 사회복지적 시각에서 접근하고, 또 어떤 이들은 기업의사회적공헌(CSR)에 초점을 맞춥니다. 또는 NPO/NGO의 사업부문으로 접근하기도 합니다. 보다 엄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저는 일단 사회적경제운동의 목표를 사회적관계망의 복원, 사회적자본과 사회적소유를 통한 경제의 재사회화 정도로 정리하고 논의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1. 한국에서의 사회적경제운동
한국에서의 사회적경제운동은 자활운동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활운동은 IMF위기를 겪으며 단기대책으로 시도되었던 공공근로를 보완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는 노동자협동조합운동의 아이디어도 결합된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이 시기의 움직임은 일정한 흐름과 방향을 형성했다기보다는 대체로 위기상황에서의 임시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련의 시도들이 ‘사회적경제운동’이라는 흐름으로 모아지는 계기는 아마도 ‘사회적서비스’, ‘사회적일자리’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부터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통상 ‘사회적일자리’는 ‘사회적으로 유용하나(필요하나) 시장으로부터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고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자리로 민간(비영리기구)에서 공급하거나, 정부 등의 예산지원으로 수행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복지국가의 축소와 공공부문의 시장화라는 신자유주의적 변화와 함께 등장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사회적일자리사업이 신자유주의의 하위파트너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려는 이해할만 하지만 사회적경제운동에 대한 ‘책임있는 비판’으로서의 의미를 갖기는 어렵습니다. 최근에는 ‘사회적기업’이 사회적경제운동의 구체적인 형식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사회적일자리(또는 자활공동체) 역시 임시적인 것으로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외적으로는 노동부를 위시한 정부정책(‘사회적기업육성법’ 등) 역시 사회적일자리의 사회적기업화에 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사회적기업육성법은 민간의 논의과정을 수렴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정부주도로 추진되었다는 게 중론입니다. 세간에서는 사회적기업육성이 현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을 의외로 평가하기도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사회적기업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폭넓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우려할만한 점은 정부의 접근이 사회적경제의 맥락에서 시작되었다기 보다는 위기상황에 대한 임시대책의 성격이 짙다는 점입니다. 사회적기업육성법은 사회적기업의 유형을 크게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일자리제공형과 취약계층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제공형으로 구분하고 있어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한 사회복지적 접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 역시 필요한 일이지만 사회적기업의 입지를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측면이 큽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사회적기업에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는 접근도 있습니다. 최근 ‘가치’소비로 일컬어지는 공정무역, 윤리적소비 등의 흐름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접근은 순환의 고리를 상실한 소비행위에 ‘가치’를 매개로 순환의 가능성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실제로는 ‘좋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버는 기업’이라는 식의 도덕적 문제로 협소하게 접근되고 있습니다. 또한 ‘가치소비행위’가 집합적 방식이 아닌 개인적 결단 또는 기부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점 역시 아쉬운 점입니다. 사회적경제운동으로서의 사회적기업의 적극적인 의미는 우선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민주적 의사결정구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민주적 의사결정구조’가 자본의 지배가 아닌 사람의 지배를 의미한다면, 그에 적합한 조직형식은 (협동)조합을 유력하게 검토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경제사업을 수행하는 조직이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과 등치되곤 하지만, 실상은 다른 형태의 경제조직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협동조합이 그 한 형태입니다. 또 다른 측면은 ‘사회적목적 실현’입니다. 대부분의 사회적기업이 지역에 기반한다고 보면, 지역사회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일반기업이 점차 국경을 넘어 허공으로 향한다는 점과 비교해보면, 사회적기업은 토착기업이며, 지역경제를 견인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원주에서의 사회적경제운동
1)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
다른 지역과 유사하게 원주에서도 자활운동이 있고, 최근에는 비영리민간단체들의 사회적일자리사업 참여가 활발합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과의 차별점을 부각시키자면 ‘협동조합운동(또는 생명평화운동)’에 기반한 모색이 두드러진다는 점입니다. 원주지역은 천주교의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영향아래 1960년대부터 다양한 형식의 협동, 자립운동이 시도되어 왔습니다. 1970년대 남한강대홍수에 따른 재해복구과정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과 마을구판장형태의 소비조합운동이 농촌과 탄광지역을 중심으로 한 영서남부지역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1980년대에는 도시와 농촌의 상생이라는 주제로 한살림과 생활협동조합운동으로 진화됩니다. 1990년대에는 이러한 운동을 이끌던 ‘원주캠프’가 해산되면서 약간의 정체기를 겪기도 했으나 2000년 들어서 먹을거리의 안전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되면서 한 살림과 생협운동이 성장하고, 협동조합간의 협동을 통해 원주의료생협이 창립되면서 새로운 도약기를 맞게 됩니다. 의료생협은 유기농산물 등 안전한 먹을거리 중심의 구매생협에서 보건의료서비스라는 사회적서비스 영역으로 협동조합운동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원주지역 협동조합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친환경농업기반이 튼튼하다는 점입니다. 천주교의 원주카톨릭농민회는 80년대말 재야운동 방식에서 생명농업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다른 농민운동세력 역시 유기농업에 주력해 현재 원주생협의 전신인 호저생협을 창립하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은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의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는 ‘협동조합간 협동’과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이라는 원칙을 기치로 2003년 창립하여 협동조합운동방식의 사회적경제 블록을 활성화하기 위한 활동에 집중하고 있고, 현재 총 13개 협동(조합)운동단체, 2만여명의 조합원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의 회원단체들은 자체적으로 다양한 경제사업을 벌여왔고, 최근에는 사회적일자리사업을 활용해 사회적기업을 창립하는 등 그 영역을 점차 넓혀가고 있습니다. 사회서비스분야 협동조합인 원주의료생협이 2007년 강원도 최초로 사회적기업인증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성공회원주나눔의집은 친환경농업기반과 생협유통망을 활용해 무농약쌀과자를 생산하는 (합)햇살나눔을 창립해 2008년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고, 노인일자리창출을 주사업으로 하는 원주노인생협도 2008년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습니다. 이외에도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친환경급식지원센터가 기업연계형 사회적일자리사업단으로 2008년부터 사업을 시작해 현재는 농촌지역의 어린이집과 초,중학교, 상지대학교 구내식당 급식 등에 원주지역산 무농약쌀을 공급하는 등 로컬푸드운동을 모색하고 있고, 원주한살림생협은 자체가공사업부문을 분리해 지역사회협동기업형태(살림농산)로 운영중입니다.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는 친환경농업(소비), 보건의료서비스, 보육 및 교육, 복지 등 생활의 전부문을 아우르며 각 부문별로도 종횡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고, 2008년엔 안정적인 교육,연구사업을 지원할 협동사회경제연구원을 상지대학교와 함께 설립했습니다. 또한 정부지원과 별도로 자체적인 지원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협동기금 설치를 논의중이고, 마을만들기 차원의 협동의집/협동의거리 조성사업도 검토중입니다. <표1>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 회원단체 및 관련조직
2) 사회적협동조합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서유럽의 사회적경제운동은 협동조합의 전통이 상당히 강합니다. 이는 협동조합운동이 그 자체로 사회적경제운동의 한 형태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근대협동조합운동의 효시로 불리는 ‘롯치데일공정개척자조합’은 자본주의 초기에 열악한 조건에 있던 노동자들이 양질의 식료품을 조달하기 위해 자구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협동조합운동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 있으면서도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본주의 바깥으로 나아가려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협동조합과 유사한 조직형태는 대단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만 보더라도 두레, 품앗이, 계 등의 전통적인 협동조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구유럽 역시 ‘공상적 사회주의’로 불리는 오웬,생시몽,푸리에 등의 시도가 있었고,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협동조합의 흔적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협동조합은 그 가능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져 왔습니다. 그것은 우선 농협을 비롯한 관제화된 협동조합의 경험 탓이 큰데 많은 사람들에게 농협은 협동조합이 아니라 가장 많은 영업점을 가진 은행으로 인식되고 있고, 조합원인 농민들은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속류화된 맑스주의에 기대어 협동조합운동을 ‘공상적 사회주의’로 치부했던 바도 큽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본질적으로 협동(연대)의 방식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협동조합운동은 인류의 오랜 실천과 지혜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한국적 상황은 협동조합운동의 성취를 제대로 평가하고 있지 못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협동조합운동은 그 자체로 사회적경제운동의 중요한 성과이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민간조직으로 평가받는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은 1995년 맨체스터 대회를 통해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를 포함한 7대 원칙을 재정립하고, 레이드로우 박사는 ‘서기 2000년의 협동조합’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협동조합운동의 새로운 임무를 ‘세계적 기아의 극복, 인간적이고 생산적인 일자리 마련, 상업적 성공에 머물지 않는 사회보전자로서의 역할, 협동조합지역사회의 건설’로 정리합니다. 이러한 협동조합운동의 변화는 ‘사회적협동조합’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1992년 ICA 도쿄대회에서는 새로운 협동조합의 유형을 아래와 같이 유형화합니다. ① 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영국 등에서 경우에 따라 지방정부의 협력을 얻어 고용과 보다 좋은 노동조건을 창출하기 위해 설립된 협동조합 ② 여성․청년․신체장애자들을 위한 혹은 그들에 의해 설립된 다양한 협동조합 ③ 건강식품․자원절약식품․무농약제품․지역의 자립 등과 같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 설립된 협동조합 ④ 설계사․정보기술자․경영분석가 등과 같은 높은 교육수준을 지닌 사람들에 의한 새로운 서비스 분야에서의 다양한 협동조합 ⑤ 탁아소․노약자보호․예방적의료․알콜중독자와 마약중독자의 치료 등과 같은 사회복지분야에서의 협동조합 ⑥ 영화제작자․연극인․오케스트라를 위한 협동조합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문화협동조합
3. 사회적경제운동 활성화를 위한 과제
사회적경제운동이 정부지원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ICA는 1995년 협동조합의 7대 원칙을 재정립하며 ‘자율과 독립’이라는 원칙을 신설합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에 의해 관리되는 자율적이고 자조적인 조직이다. 협동조합이 정부 등 다른 조직과 약정을 맺거나 외부로부터 자본을 조달하고자 할 때에는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인 관리가 보장되고 협동조합의 자율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협동조합운동 진영은 이를 일러 ‘국가 지원은 죽음에 이르는 키스’라고 표현합니다. 당장은 달콤하지만 자율성이 훼손되고 결국 협동조합의 정체성이 잃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당장은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하더라도 - 가능하면 지원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 수년 내에 자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정부가 사회적경제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설 필요도 있습니다. 최근 정부는 돌봄 서비스와 같은 사회서비스 분야는 수익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해 지속적인 지원을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서비스 분야 자체가 ‘사회적으로 필요하나 (수익성 때문에) 시장에서 충분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간병과 같은 돌봄 서비스가 시장에 내맡겨진다면, 양극화는 극단화되고 사회통합을 저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장기요양보험이 시행된 후 민간요양기관이 난립하면서 부도덕한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경제운동이 사회서비스 분야로 국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일자리창출대책으로만 접근하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사회복지 사각지대 해소나 일자리창출은 정부의 단기적인 정책목표일 수 있고, 사회적경제운동의 결과로 그러한 성과를 거둘 수는 있겠지만 그 자체가 사회적경제운동의 목표는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나,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일견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국가기구화된 소비에트 협동조합이나 준공사화되어 자율성이 의심받는 한국농협의 사례는 좌우를 막론하고 정부가 협동조합을 장악하고 싶어한다는 속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의 공공적인 역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부가 직접 수행하는 부문은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정부는 필드 플레이어가 아니라 심판과 후원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회서비스나 공공분야는 이윤을 추구하는 시장에 맡겨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영리민간영역을 통해 사회통합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경제는 ‘시장의 실패’와 ‘정부(국가)의 실패’ 사이를 극단으로 오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기의 폐해는 비인간적인 노동착취를 거쳐 세계전쟁과 경제공황으로 폭발했습니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케인즈와 복지국가 모델입니다. 그러나 복지국가식의 접근에는 시민사회부문의 활력이 잠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뒤를 이은 극단화된 시장주의인 신자유주의는 이미 실패로 검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법은 시장과 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시장과 정부만이 정답이 아닙니다. 시장과 정부로 극단화되지 않는 사회영역을 모색하는 방향에서 사회적경제운동을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시민사회가 매우 취약합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야 ‘시민사회’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나 ‘정치사회’에 포섭되며 갈지자의 행보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생활사회’, ‘지역사회’에 뿌리를 두지 못한 탓입니다. 따라서 사회적경제운동의 방향은 지역사회로 향해져야 할 것입니다. 근거리에서 대면적인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지역사회가 바로 사회적경제운동의 근거지입니다. 사회적경제운동의 영역 역시 지역사회에서 길어져야 합니다. 우리 주변 이웃들을 돌보기 위한 돌봄 서비스,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한 보육, 교육, 보건, 의료 서비스, 주민들에게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농업과 식품산업, 주거와 복지, 문화 등이 바로 사회적경제운동의 주된 영역입니다. 한살림과 생협이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시장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제공하지 못하는(또는 하지 않는) 영역에서 이웃들의 필요를 조직했기 때문입니다. 근래에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해서도 대기업들이 진입하고 있습니다. 막대한 자본력과 유통망을 무기로 (형식적인) 직거래 방식을 도입하며 로하스(LOHAS)시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대형마트를 통해 빨아들인 부는 지역 바깥으로 유출되고 지역경제는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원주에서는 로컬푸드 등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협동조합이라는 측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생산된 먹을거리가 대면적 관계에 기초해 지역내에서 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부가 다시 지역에서 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는 한 두개의 사회적기업, 협동조합으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생활을 전방위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경제블록’을 구축해야 가능할 일일 겁니다. 협동조합의 적정한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도 지역을 중심으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이 규모가 커지면 관료화되기 쉽상입니다. 주인의 역할을 사라지고, 대리인(전문경영인 등)이 역할이 커집니다. 의사결정과정에서 조합원의 목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민주적인 통제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사업상의 상업적 성과가 중시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 놓이게 되면 이미 협동조합이라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따라서 협동조합의 적정한 규모는 공간적으로는 동일생활권 정도가 기준으로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한 규모가 아닐까 싶습니다. ‘규모의 경제’ 효과는 이런 작은 규모의 조직들이 민주적으로 연합하는 과정을 통해서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협동조합방식의 사회적기업, 사회적경제운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통합협동조합법 제정과 같은 법제도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현행 법체계는 농협법, 신협법, 생협법 등과 같이 개별법주의를 택하고 있어 다양한 협동조합의 발전을 규제하고 있습니다. 법에 규정되지 않은 협동조합은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생협 사업을 조합원만 이용하도록 막고 있어 지역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결국 생협과 같은 협동조합을 조합원만을 위한 폐쇄적인 조직으로 고립시키는 셈입니다. 협동조합을 사회적경제 조직으로 수용하는 적극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유의할 점은 협동조합은 ‘실제적인 필요’를 조직해야지, ‘허상인 욕망’에 기대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2000년을 전후로 식품안전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잘먹고 잘살자’는 웰빙바람이 불면서 한살림과 생협에도 욕망에 기초한 소비가 늘어난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식회사와 같은 영리기업은 주주의 이윤극대화를 위해서 움직이지만,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필요충족을 목표로 합니다. 자가발전하는 욕망은 자본주의 구조와 조응하며 사회적순환관계를 파괴합니다. 이럴 경우 협동조합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영리기업의 길을 걷게 될 수 있습니다. <끝>
[출처] 사회적경제운동을 위한 메모|작성자 괭이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