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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대화방 스크랩 삼국지 인물평
강창보 추천 0 조회 20 09.11.15 19: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三國志인물학

|관우, 적토마로 날으다

Guan Yu

관우 關羽 운장 雲長

j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관운장, 관우는 누구인가?

 

 

관우(關羽, ?년 ~ 219년)는 중국 삼국시대의 촉한의 무장이다. 수장 또는 장생이라는 자를 썼으나 나중에 운장(雲長)으로 바꿨다. 유비를 오랫동안 섬기며 촉한 건국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관우의 충성심과 의리, 당당한 성품으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장수로 손꼽힌다. 의리의 화신으로 민담이나 전승에서 널리 이야기되었고, 나중에는 신격화되어 관제묘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관우는 중국인들이 숭배하는 대상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나라에도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238-1의 대한민국의 보물 제142호인 동묘(東廟)는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묘로서 원래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라 하며 선조 34년인 1601년에 건립돼 1963년 보물로 지정됐다.동관왕묘(東關王廟)는 3세기의 중국 명장인 관우를 모시는 곳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에 일본군에 의해서 파괴된 것을, 명나라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여 재건하였다. 1599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601년에 완공하였다. 1601년에는 동묘, 서묘, 북묘가 건축되었으나 현재는 동묘만 건재해 있다. 벽은 돌과 진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9,315m²로 되어 있다. 인근에 수도권 전철 1호선·6호선 동묘앞역이 있다.

 


별명 미염공
태어난 곳 하동군 해현
죽은 곳 맥성
최종 계급 5호장군 전장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 박망파 전투
적벽 대전
기타 이력 관성제군

 

 

 

 

Guan Yu

관우 關羽 운장 雲長

 

 

생애

관우는 도성 냑양의 서쪽에 위치한 하동(河東)군 해(解)현 출신으로,관우의 원래의 성은 고씨였으므로, 후한관우의 약혼녀 '이령'낭자라는 자를 끌고가서 주책스러운 짓을 하려다 말 고을의 악덕 지주를 살해하게 돤다, 그 관우의 약혼녀 '이령'낭자는 자결을 하게 되고, 그 죄로 고향에서 추방되었고, 관우는 지명수배자가 되어 산속에서 지내다가 몇 년 뒤 산에서 내려와 '유곡관'(관문이름)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유곡관의 문지기가 수배자를 찾고 있었다,관우는 유곡관의 끝자를 따서 성을 '관'씨를 바꾸고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그후로 부턴 관우는 성이 '관' 이름은 '우'로 바뀌게 된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탁군으로 이주하고 있을 때 유비가 도당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장비와 함께 나아가 그의 호위를 맡았다. 유비는 언제나 관우와 장비와 함께 한 방에서 같이 지냈으며 그 정이 형제와도 같았다. 그러나 공적인 장소에서 하루 종일 관우는 유비 곁에서 호위를 맡고 유비를 따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관장 3인이 도원결의로서 의형제를 맺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키가 9척(약207센티미터), 수염 길이가 2자(=2척, 약60센티미터)이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고, 기름을 바른 듯한 입술, 붉은 봉황의 눈, 누에가 누운 듯한 눈썹 등의 풍모로 묘사된다. 여기에 대장간에서 특수 제작한 무게 82근이 나가는 청룡언월도가 추가되어 오늘날의 관우상이 완성된다. 다만 청룡언월도는 한나라 때의 무기는 아니고(한나라 때에는 언월도가 아예 없었으며, 또한 (언)월도는 북방 민족의 무기이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이 관우의 무기로서 꾸미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실제로 관우 자전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간결하다. 유비가 공손찬 밑에서 평원상이 되었을 때, 장비와 함께 별부사마로 임명되어 부대를 지휘하도록 했다는 기록뿐, 그 후 이야기는 200년까지 건너뛰고 만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는 공손찬 휘하의 병졸로 참전해 조조의 허락을 받아 화웅을 죽였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고 실제로 화웅은 전력을 추스리고 양인으로 출진한 손견에게 일기토를 걸어 몇합 못견디고 죽임을 당했다.

 

유비가 서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하비 태수의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어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자 관우는 하비성을 수비한다. 그러나 유비는 조조에게 패해 하북의 원소 밑으로 도주하고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후하게 대접하고 편장군에 임명하지만, 관우는 조조 밑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조조가 장료(張遼)를 파견해 그의 의중을 떠보았을 때도 관우는 “조조의 뜻은 알겠지만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무르지 않을 터이지만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에게 은혜를 갚고 나서 떠날 생각이다”라고 대답한다.

 

원소는 “안량(顔良)은 편협해서 폭넓은 지휘권·재량권을 줘서는 안된다.”라는 저수(沮授)의 만류를 무시하고 안량에게 곽도(郭圖)와 순우경(淳于瓊)를 딸려 조조 휘하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이 지키는 백마진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순유(荀攸)의 헌책에 따라 원소군의 배후를 찌르는 움직을 보여 안량을 고립시키고자 했다. 다른 원소군이 이에 반응하여 퇴각하는 와중에도 안량은 적은 병력으로 백마진에 남았고 이를 본 조조는 장료와 당시 객장이던 관우에게 즉시 공격을 명했다. 이때 원소는 이미 유비의 "관우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얘기를 하면 우리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 말에 설득당해 안량에게 관우를 보면 공격하지 말고 영접하라고 명한다. 때문에 안량은 관우를 보자 저항하지 않고 인사를 했는데 관우는 무방비상태의 안량을 기습하여 안량의 목을 가지고 왔다.

삼국지연의는 관우가 안량과 함께 원소군의 맹장으로 유명한 문추(文醜)도 죽였다고 하나 삼국지에는 치중대를 미끼로 한 순유의 책략에 빠진 문추를 서황(徐晃) 등이 습격하여 없앤 것으로 나와있다.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는 천자의 이름으로 관우에게 편장군이라는 관직을 내렸고, 이는 관우가 천자(황제)에서 받은 첫 관직이었다. 그러나 관우의 마음에는 언제나 유비가 있었다. 원소가 진군하여 양무(陽武)를 지키자 관우는 원소군에 있는 유비를 찾아 떠났다(삼국지 위서 무제기). 떠날 때 하사품에 봉인을 하고 편지를 보내 이별을 고한 다음 조조의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향했고, 조조의 측근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조조는 “사람에게는 각기 주인이 있으니 쫓지 말라”라고 하며 조용히 보내준다(삼국지 촉서 관우전).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는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결국 관우는 유비에게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조조 공께서 저를 후하게 대해 주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유비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받았기에 그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삼국지 촉서 관우전).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에게 항복할 때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 황실의 천자에게 항복한다’, ‘유비의 부인 등을 보호한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아는 대로 다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이 항복을 권유하는 사람으로 나선 자가 장료인데, 여포를 처형할 때 그 부하였던 그를 구해준 것도 관우였다. 그는 삼국지에서도 관우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대 관계에 있으면서도 깊은 유대가 있는 듯이 묘사되고 있다. 이때 관우는 여포가 소지하고 있던 적토마를 조조에게서 물려받았다. 하지만 말(馬)의 평균수명을 감안한다면 이것 역시 허구이다. 왜냐하면 이당시의 적토마의 연령은 20살을 넘어서 인간의 나이로 따진다면 120살을 웃돌기 때문이다.

 

원소와의 전투에서는 안량과 문추를 토벌하고 유비의 편지를 받자 조조 밑을 떠나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도중에 5개의 관문을 돌파하고 6명의 장수를 참살한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설화가 전해진다. 이것은 나중에 적벽에서 패주한 조조를 놔주는 이유가 된다. 물론 이 둘은 사실이 아니고 삼국지연의의 저자가 꾸며낸 이야기이다.

 

관우는 유비와 다시 만나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지한다.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 평정에 착수하자 관우는 수백 척의 군선을 모아 하구로 향해 오나라의 손권과 연합해 조조의 대군을 격파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적벽 대전에서 대승한 후 화용도로 도망가는 조조를 정에 얽매여 그냥 놓아주고 만다. 제갈량은 이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지만 “조조의 운명이 아직 다하지 않으므로 관우에게 의리를 갚게 해도 좋다”라고 말하여 관우를 출진하도록 한다. 그리고 관우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귀환하자 규율상 제갈량은 “서약에 따라 목을 쳐라”라고 명령하는데, 유비가 이를 가로막았다. 이후 자존심이 센 관우는 제갈량에게 머리를 들지 못하게 된다.

 

적벽 대전에서의 승리 후 유비가 강남의 여러 군을 지배하자 관우는 양양태수 탕구장군에 임명되어 양자강 북쪽에 주둔, 마침내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러 나서자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의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도중에 유비의 군사 방통이 전사하고, 익주에서 유비가 궁지에 빠지자 제갈량도 익주로 구원하러 나가 관우 혼자 형주에 남게 된다. 익주 평정 후 관우는 형주 군사총독에 임명되고 3만의 군사로만 형주를 지키겟다 하였다.

 

215년 손권은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것을 이유로 형주 반환을 요구하며 남쪽 3개 군(장사, 영릉, 계양)에 관리를 파견하는데, 관우가 이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손권은 여몽에게 명령해 3군을 공략하고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한다. 관우와 노숙에 의한 담판이 이루어지고 결국 유비는 조조의 공격에 대비해 3군을 반환했다.

 

서량의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하였을 때는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마초의 재능을 물어보았다. 제갈량은 관우의 성품을 잘 알고 답신하길 “마초는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걸물이나 미염공(美髥公)인 당신께는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이 편지를 받고 기뻐하며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

 

 

 

또 관우의 초인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일화가 삼국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관우는 왼쪽 팔꿈치에 화살을 맞은 적이 있어 상처가 치료된 후에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욱식욱신 뼈가 쑤셨다.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화살촉에 묻어 있던 독이 스며들고 있으므로 뼈를 깎아 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명되어 절개 수술을 행한다. 관우는 수술 중에도 연회를 즐기고 피가 가득 쏟아져 나와도 태연하게 담소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방덕과의 싸움에서 이 상처를 입었는데, 명의 화타가 그의 상처를 살핀다. 그리고 수술 중에는 마량과 바둑을 계속 두면서 먹고 마셔 화타를 감탄하게 만든다.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올랐을 때 관우는 전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여 우금을 생포하고 방덕을 참수했다. 조조는 관우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허도를 떠나는 것을 고려하기도 하였지만 사마의와 장제 등이 손권의 군사를 이용하자는 건의를 듣고 실행하지 않았다. 한편 손권은 아들을 관우의 딸과 혼인시키려 해서 사신으로 제갈량의 친형인 제갈근을 관우에게 보냈지만 관우는 허락하지 않았고 사신으로 온 제갈근에게 욕설과 협박을 하는 등의 무례함을 범하였다. 관우의 번성 포위 작전 때 손권의 지원군의 도착이 늦자 손권을 오소리에 비유하며 모욕하였기에 손권은 관우를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다. 관우의 무례함이 극에 달하는 행동으로 인해 분개하던 손권은 조조와의 요청을 수락하고 관우에게 기습을 감행하여 강릉을 점령하였다. 손권은 관우를 공격하였고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생포하였다. 손권은 그래도 손상향이 유비에게 시집간 것도 있고 해서 관우에게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셈치고 관우를 살려두어 유비로 하여금 조조에게 대적하게 하려 했지만 관우는 손권에게 독설을 퍼붓는 등의 무례를 범하며 이를 거절했다. 손권은 어쩔 수 없이 관우를 참수하였다. 관우의 목은 조조에게 보내졌으나 조조는 관우의 몸과 목을 맞춰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게 아뢰어 형주의 왕으로 표하게 했다.

 

유비는 관우를 장무후(張繆候)로 봉하고, 그 아들인 관흥이 관우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후 촉한의 황제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하자마자 관우의 후손들은 이 때 방덕의 아들로서 종회의 부장으로 참전한 방회에게 전원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멸문되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후손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을 찾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Guan Yu

관우 關羽 운장 雲長

 


인물 평가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관우를 평하길, “관우는 만 명을 대적할 만한 용맹한 장수이며 조조에게 보답을 하는 등 국사(國士)의 풍격이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관우는 냉정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으로 결국에는 실패하였다”라고 했다. 또 삼국지연의의 저자들은 관우는 거만하여서 유비가 오호대장군의 으뜸으로 세울 때 황충을 "황충같이 늙어빠진 장수가 어찌 저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비난하였는데, 육손은 이 점을 이용하여 관우를 벨 수 있었다.


 

 

숭배의 대상이 된 관우
공자의 묘를 문묘(文墓)라고 하듯이, 관우의 묘를 무묘(武墓)라고도 하여 무의 화신으로 추앙받으며 관제묘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인 1594년 무신(武神)으로 받들어지고,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 출정때 이긴것을 관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 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나 혹은 관제묘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몇몇 있다. 이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과 같은 여(呂)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없이 죽는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관우와 적토마
적토마가 관우와 일생을 함께하였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관우가 적토마를 물려받았을 때에는 이미 십여 세에 이르른 적토마는 "늙은 말"이었고, 관우가 죽을 때에는 삼십 세가 넘는, 인간으로 치면 180세가 넘는 말이기에 살아 있기는 힘들다.

이것은 관우를 치료한 화타 이야기 만큼이나 유명하지만, 관우를 치료한 의원이 화타가 아니듯이, 관우와 일생을 함께한 말이 적토마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관우가 생포당했을 때 적토마는 붙잡혀있다가 슬피 울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三國志인물학|장비, 장팔사모의 맹장

Zhang Fei

장비 張飛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三國志인물학|장비, 장팔사모의 맹장

 
 

촉한 건국공신, 장비는 누구인가?

 

 


장비(張飛, 167년 ~ 221년)는 중국 삼국시대의 맹장으로 촉한의 건국 공신이다. 자는 익덕(益德)이다.

유비, 관우와 함께 황건적 토벌에 나서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장판교에서 조조의 대군을 막았으며, 서촉 정벌시, 엄안을 회유하여 파촉 정벌의 큰 공로를 세웠다. 이후 파서 태수 자리에 올랐고 한중 정벌에서 위나라의 장합과 맞서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관우의 복수를 위해 출정하는 도중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되었다.

장남 장포는 요절했고, 차남 장소가 가계를 이었다. 장비의 장녀와 차녀는 모두 유선의 황후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장포가 촉한을 위해 활약하고, 전쟁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다.

 

 

 

 

Zhang Fei

장비 張飛

 

 

생애


삼국지 연의를 보면 장비 익덕은 본래 술과 고기를 파는 상인이었는데, 황건적의 난때 장각은 청주,유주,서주,이주,양주,연주,여주,형주등 중국영토를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관우를 만나서 형제 처럼 지내다가 몇년뒤 유비를 만나게 된다. 유비는 탁현 마을이라는 곳에 물건을 팔려고 장비와 함께 배를 타고 나서는 순간 마을이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 유비,관우,장비가 처음 만나게 되었다. 장비는 무기로 장팔사모(丈八蛇矛, 팔 척짜리(18자)사모)를 썼다고 하는데, 창두가 뱀처럼 구불구불했고 길이가 1장 8척(3m 60cm)이었다 한다. 사모(蛇矛)가 처음 등장한 때가 동진(東晉) 이후이므로 장팔사모 역시 실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또한 터무니 없는 길이를 볼 때 당시 사람들의 과장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장비는 일부 책에서 성주가 준 자신의 동생 인육을 먹고 죄책감에 휩싸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결의형제를 맺어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비는 용맹하고 과격한 성격이고, 술을 좋아하고, 싸움을 즐긴다. 후에 황건적 토벌에서 부장 등무를 토벌하는데, 유비의 스승 노식이 환관의 참언으로 죄를 뒤집어쓰고 호송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호송병을 죽이고 노식을 구하려고 했지만 유비에게 제지당한다. 또한 황건적의 수령 장각에게 패한 동탁을 구해주지만 유비를 경멸하자 장비는 이에 분노해 동탁을 살해하려고 했다. 이때도 유비가 그를 제지했다. 마침내 황건적 토벌의 공로로 유비는 안희현의 현위에 임명된다.

 

 

술취한 장비 케릭터를 희화화하여 그린 일본의 목판화

 

 

《삼국지연의》에서는, 순시하러 온 독우가 뇌물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자 장비가 분노하여 독우를 기둥에 묶고 매질을 하였다. 유비는 장비를 제지하고 현위를 사직하고 도망가게 된다. 그러나 《삼국지》에서는 오히려 유비가 독우를 매질했다고 되어 있다. 그 후 동탁과의 싸움에서 장비는 여포에게 도전했다가 패한 공손찬을 돕고, 여포와 단기필마로 싸운다. 관우와 유비까지 가세하자 여포는 패주한다. 그 후에는 유비와 함께 공손찬, 공융, 도겸 밑을 떠돌면서 그들을 군사 면에서 돕는다. 정사에서는 공손찬이 동탁과의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그 객장이었던 유비와 관우, 장비도 동탁과의 싸움에는 나서지 않았다. 여포와의 대결은 관우와 장비의 무용을 보여주기 위한 허구이다.

 

이윽고 도겸이 죽자 유비가 잠시 서주를 맡게 되고, 조조에게 패한 여포가 유비를 찾아와 의지하려 들었다. 장비는 여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에게 결투를 신정했지만 유비가 이를 말리고 관우가 장비를 데리고 나갔다. 또한 조조의 군사 순욱이 내건 ‘두 호랑이가 서로 먹이를 다투게 하는 계략’으로 황제로부터 여포 토벌의 밀칙을 받자 유비는 이 계략을 간파하고 장비를 제지했다.

 

이번에는 순욱에게 ‘호랑이를 몰아내고 이리를 잡는 계략’에 걸려 유비는 원술 토벌의 조칙을 받는다. 유비가 출정하고, 장비는 금주 서약을 하고 서주를 지키는데, 그래도 술을 끊을 수 없어 조표에게 술을 강요하며 매질했기 때문에 조표의 원한을 산다. 이에 조표는 밤중에 여포를 불러들였다. 장비는 조표를 죽이지만 유비의 처자를 구하지 못한 채 혼자 달아났다. 장비는 책임을 지고 자살하려고 했지만 유비가 제지하자 흐느끼면서 포기한다. 그 후 유비와 여포는 화해하지만 장비가 산적으로 변장해 여포의 군마를 탈취하자 분노한 여포에게 공격당한다. 유비 일행은 조조에게 몸을 의지하고 조조와 공동으로 여포를 격퇴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원술을 토벌할 때 관우가 단기필마로 싸워 애먹었던 기령을 토벌한다. 그 후 유비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조조가 파견한 유대와 왕충과 대치한다. 장비는 일부러 술에 취해 한 병사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그 병사를 유대에게 투항하게 만들어 장비가 야습한다는 사실을 밀고시킨다. 유대는 진지를 비우고 복병을 준비하지만 장비가 의표를 찔러 바깥쪽에서 공격, 유대를 생포했다.

 

그러나 조조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유비는 패배하여 관우, 장비와 생이별을 하게 된다. 장비는 망탕산에서 무사히 탈출해 고성현령을 쫓아내고 그 곳에 독자 세력을 구축해 눌러앉았다. 이 무렵 장비는 나무를 하러 간 어떤 아낙 한 명을 강제로 납치하여 아내로 삼았는데 이 여자가 하후패의 여동생인 하후씨(夏候氏).  이윽고 조조 밑을 떠난 관우가 만나러오자 장비는 배신자라고 말하며 관우에게 덤벼들었다. 관우는 자기를 추격해온 채양을 토벌한 것으로, 겨우 장비를 납득시켰다. 그후 형주의 유표 밑에서 몸을 의지할 때 유비가 삼고초려로 제갈량을 만나게 되는데, 동행한 장비는 제갈량이 낮잠을 자고 있는 것에 화가 나 집에 불을 지르려고까지 했다.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를 침공해오자 유비는 강남으로 도망쳤는데, 조조는 이를 추격해 당양의 장판에서 따라잡았다. 유비는 장비에게 20기병을 지휘해 배후를 막아내도록 했다. 장비는 강을 앞에 두고 다리를 끊고,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장팔사모를 치켜들며 “내가 바로 장비이다! 덤벼라! 목숨이 아깝거든 물러나라!” 하고 호령했다. 감히 누구도 접근하지 못해 유비는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다. 이는 경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판교의 금강역사’라는 유명한 장면인데, 《삼국지연의》에서는 다리 위에서 장비가 말 위에 홀로 우뚝 버티고 서서 조조군을 퇴각시킨다.

 

그 후 적벽 전투의 승리를 거쳐 유비가 강남을 평정하자, 장비는 의도태수(宜都太守)·정로장군(征虜將軍)에 임명되고 이후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전임되었다. 유비가 장로 토벌을 위해 익주로 들어갔을 때 손권의 여동생 손부인이 유선을 데리고 오나라로 돌아가려 했는데, 이때 장비가 조운과 함께 유선을 다시 데려왔다. 곧이어 유비가 유장과의 사이가 벌어지고, 방통이 전사하는 등 궁지에 빠지자, 장비는 제갈량과 함께 구원에 나서서 서로 분담하여 군현을 평정했다.

 

그는 강주에 도착해 유장의 부하였던 파서태수 엄안을 격파하려고 욕을 퍼부었으나 엄안이 그에 대한 반응이 없자 장비는 샛길을 만들아 파서를 냅두고 돌아가려고 하는 줄 안 엄안은 성밖으로 나오나 장비는 그 뒤에 매복해있어서 엄안을 생포한다.장비는 엄안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자 이에 감탄하고 그를 용서해 후하게 대접한다. 이리하여 통과하는 곳마다 모두 승리를 거두어 성도에서 유비와 합류, 익주가 평정되자 보상금을 하사받고 파서태수(巴西太守)로 승진한다.

 

다른 유장의 부하들이 전부 항복하는 가운데 유독 장임만은 항복을 완강히 거부하여 장비는 장임을 토벌하기 위해 장임의 군대와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장비는 장임과 아주 격렬한 일기토를 한참동안이나 벌였으나 결국 장임을 힘으로 굴복시키지 못하고 만다.

 

적벽 전투에서 익주 평정에 걸쳐 방통이 뇌양현령에 임명되고 매일 술에 취해 있는 것을 장비가 순시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방통의 재능을 알아보고 감복한다든지, 유장을 구원하러 장로가 파견한 마초와 단기필마로 싸우는데 밤이 되도록 화톳불을 켜놓고 싸우지만 끝내 승부가 나지 않았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자 하후연과 장합을 한중에 주둔시켜 종종 파(巴)의 경계선을 침공했다. 장비는 유비의 명을 받아 탕거로 진군, 위나라의 장합과 50일이 넘도록 서로 대치했다. 장비는 정예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에게 공격을 감행해 와구에서 격파하고, 장합은 겨우 부하 10여 명 남짓 데리고 사잇길을 따라 달아났다. 219년(건안 24년) 유비가 한중을 평정하고 한중왕에 책봉되자 장비는 우장군 가절에 임명되었다.

나아가 221년(장무 원년)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장비는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승진하고 사례교위(司隷校尉)를 겸임해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진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파서에서 장합과 대치했을 때, 장비가 또다시 술에 빠지게 되자 유비가 이를 걱정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것을 책략으로 간파하고 진중 위문품으로 맛 좋은 술을 보냈다. 장비는 변함없이 술을 마시고, 기다리다 지쳐 오금이 저린 장합이 야습을 감행하게 된다. 그러나 본진은 이미 모든 병사가 빠져나가 아무도 없었으며, 이 틈에 장비는 장합의 세 성채를 탈취해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관우가 죽은 뒤에는 매일 큰소리로 울고, 기분을 달래려고 술을 마시고서는 취해 난폭해지는데, 부하들을 학대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비는 이를 염려하여 언제나 장비를 훈계하였다.

 

유비가 오나라 토벌에 나서자 장비는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강주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출진에 앞서 부하 장달과 범강에게 “3일 이내에 전군의 전투 준비물을 갖추라” 는 무리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두 사람이 좀더 시간을 달라고 말했는데, 장비는 벌컥 화를 내며 50대씩 곤장을 치며 기한에 못 맞추면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범강과 장달은 장비에게 앙심을 품고 장비가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틈에 살해하고, 그 목을 오나라에 가져다 바쳤다. 향년 55살이었다. 유비는 장비의 부관으로부터 서찰이 도달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 장비가 죽었구나!” 하고 한탄하였는데 유비의 예측대로 되었기 때문이다. 환후(桓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비를 아이콘으로 한 게임 케릭터


 

 

일화
관우가 고기들은 항아리의 뚜껑을 들어올리고 그 속에 들은 고기를 나누어 주었는데,그 일로 관우와 싸웠다가 유비의 중재로 도원결의를 맺었는데, 이는 장비가 다른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면 샘을 내는 못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三國志인물학

|동탁, 포악무도한 폭정자

Dong Zhuo

동탁 董卓

 

 

 

 
 

삼국지三國志

San guo zhi

 

 

 

 
 

三國志인물학

|동탁, 포악무도한 폭정자

 

 

포악한 폭정자, 동탁은 누구인가?

 


동탁(董卓, 139년 ~ 192년 5월 22일)은 후한 말의 정치가이다. 자는 중영(仲穎)이다. 후한 황실을 배경으로 삼아 폭정을 휘두르다가 여포(呂布)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동탁은 완력이 뛰어나 두 개의 궁대(弓袋)를 몸에 차고 말을 몰면서 어느 손으로도 활을 맘대로 쏠 수가 있었다고 한다.

 

 

 

三國志인물학|동탁, 포악무도한 폭정자

Dong Zhuo

동탁 董卓

 

 

 

 

생애

 

농서군 임조현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의협적인 무리와 함께 강족 지역을 방랑하여 유력자와 친분을 맺었다. 그후 향리에 돌아와 농사에 전념하였는데,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밭갈이 소를 잡아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강족은 그 의기에 감격하였다. 또한 병주 정벌에서 전공을 세우자 포상금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인심 장악에 뛰어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동탁은 북방 이민족 토벌에 수많은 전과를 올려 승진을 거듭하여 중랑장이 된다. 그후 황건적 토벌에서 패배하여 면직되지만 한수 등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복직되어 진압을 맡았다. 이 전투에서 수만 명의 강족에게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지지만 동탁은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빠져나가고, 도중에 하천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통과시키고 나서 제방을 무너뜨렸다. 이에 강족은 물이 깊어 추격하지 못해 동탁은 상처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소환하여 소부로 삼고 군대를 좌장군 황보숭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동탁은 계속 칙명을 거역했다. 이때문에 일찌기 손견(孫堅)은 군율을 무시하는 동탁을 살려두면 절대 안된다고 장온에게 진언했지만, 장온은 강족과 동탁의 관계를 들어 이를 무시하였고, 훗날 동탁은 자객을 보내어 장온을 죽였다. 연의에서는 동탁이 베푸는 연회 중에 여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장온을 밖으로 끌고가서 죽여버린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 무렵 하진(何進)이 환관 제거를 모의하기 위해 전국의 제후들을 소집하였는데, 동탁도 이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러나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하진이 주살되고, 환관들에게 연행된 소제(少帝)와 진류왕(陳留王 : 헌제)의 신변을 보호하면서 낙양으로 들어왔다. 이때 동탁의 병사는 3천여 명밖에 없었으나, 4~5일 간격으로 밤에 네 성문에서 밖으로 군사를 보내 다음날 아침 군기와 북을 가지고 입성시켜 대군처럼 보이게 했다. 이것으로 하진·하묘(何苗) 형제의 군사를 병합하는 데에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포를 부추겨 집금오 정원(丁原)을 제거하도록 하고 그 군대를 흡수했다. 그리고 가뭄을 이유로 사공 유홍을 면직시키고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자마자 태위로 승진한다. 소제를 폐위하여 홍농왕으로 강등시킨 뒤, 모후인 하태후와 함께 시해하고 진류왕을 옹립시켰다.

 

동탁의 포악함이 극심해진 것은 이때부터다. 군대를 이끌고 순찰중에 주민들이 춘절을 즐기는 것을 보자, 거기에 있던 남자들은 목을 베고, 여자는 탈취하여 병사들에게 첩으로 주고,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심지어 궁녀나 공주에게까지 함부로 폭행을 가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만행을 참을 수 없어 오부가 동탁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지만 실패하여 살해되고 만다. 조조(曹操)도 칠보도(七寶刀)를 빌려 동탁 암살을 모의하지만 실패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190년 각지의 제후가 원소(袁紹)를 맹주로 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동탁은 장안(長安) 천도를 강행해 능묘를 파서 보물을 도굴하고, 자신이 사는 곳에 성을 쌓아 30년 분의 식량을 비축했다. 주연회를 열 때마다 죄인을 끌고와 혀와 팔다리를 자르거나 눈을 도려내기도 하고, 큰 솥에 삶기도 했다. 게다가 자기 마음대로 형벌을 남용하고 사람들이 서로 무고하였기에 억울하게 죽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또한 오수전을 녹여 조그만 동전으로 주조하지만, 그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고 모양도 형편없었다고 한다.

반동탁 연합군의 선봉장은 다름 아닌 예전에 장온에게 동탁을 죽여야만 한다고 진언했던 그 손견이였다. 이에 동탁은 여포가 나서려 했지만 동탁의 부하로서 도위의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 화웅(華雄)이 '닭 잡는 데 소잡는 칼을 쓰는 게 아니다'라면서 나서게 된다. 처음에는 원술이 병량을 보내주지 않아 화웅이 우세했지만 원술이 병량을 제대로 조달하기 시작하자 손견은 승승장구하고, 결국 양인이라는 곳에서 손견은 일기토로 화웅을 척살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견이 아니라 당시 마궁수였던 관우가 조조에게 허락을 받고 필마단기로 나가서 화웅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여포가 직접 나섰지만 손견의 활약으로 별 소득이 없었다. 결국 동탁은 이유(李儒)의 조언에 따라 낙양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장안으로 도망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낙양에 불을 지르는데 이때 이유는 홀로 남아있다가 궁녀 한 명을 살해하고 그 궁녀의 시체의 목에 옥새를 매달아서 우물에 던져버린다. 반동탁연합군에 속한 제후들이 옥새를 놓고 서로 싸우게 만들려는 이유의 계략이였던 것이다. 이 계획이 적중되어 낙양의 화재를 진압하던 손견에 의해 옥새가 발견되고, 옥새를 요구하는 원소와 거절하는 손견의 불화로 인해 반동탁 연합군은 해체되었다. 이 사건에 원소는 유표(劉表)를 개입시켜, 결국 손견을 죽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삼국지 중국제 연속극 장면

 

 

반동탁 연합군은 오래가지 못하고 자연스레 해체되었지만 동탁의 전횡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192년 4월 왕윤(王允)은 동탁의 심복 여포를 꾀어내어 동탁 살해를 모의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이 양녀 초선(貂蟬)을 이용하여 ‘연환지계(連環之計)’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쓰여있다. 이리하여 동탁은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다. 그 때 호위병에게 제지당하고, 조칙을 받은 여포에게 살해당한다. 동탁의 머리와 사체는 저잣거리에 내걸렸는데, 뚱뚱한 몸의 배꼽에 불을 놓자 며칠씩이나 계속 탔다고 한다.

 

 

 

인물평


젊어서부터 배포도 크고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도 있어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는 동탁은 하진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입성하는 과정에서도 적은 군사를 대군처럼 보이게 하는 재주를 부릴 줄 알았고, 낙양에 들어와서는 소제를 보호하는 행운까지 얻었다. 장수 여포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단기간에 승승장구했다.

 

사람의 능력 또는 그릇의 크고 작음은 그 지위가 높고 귀해질 때 가장 잘 드러나는지, 그는 정상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이제까지 쌓아올린 것들을 와르르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는 결코 큰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 권력을 손에 쥐자 곧바로 이를 사물화했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행동했다. 미인계에도 쉽게 걸려들 만큼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지 못하는 무능도 드러냈다. 그런 그에게 온전한 참모 또한 있을 리 없었으니 제동장치 없는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독재와 사치, 향락의 길로 마구 치달았다. 전투력이랄 것도 갖추지 못했다. 결국 왕윤의 연환계에 걸려들어 여포가 풀어놓은 자객에게 비명횡사, 독재자의 말로를 몸소 보여줬을 뿐이다. 그는 삼국지 제일의 악역으로 평가받는다.

 

출중한 무술로 산천초목까지 떨게 했던 여포. 용맹성이란 점에서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지만 그에게는 ‘머리’가 없었다. 판단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동탁과는 배짱이 맞아 그의 양아들이 됐고 지근 거리에서 그를 지키는 경호실장 노릇을 했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해타산으로 맺어진 것이었다. 의(義)로써 형제를 맺은 유비·관우·장비와는 달리 그 이해구조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와해될 수 있었다. 더욱이 그런 문제가 터졌을 때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머리도 없었기에 한번 불이 붙으면 그것으로 끝장이 날 수도 있었다.

  

 

 


 동탁과 여포 사이에 초선이라는 미인이 끼어들자 두 사람은 자석의 마이너스극이 마이너스극을 만난 것처럼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결국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인간관계가 무엇에 바탕을 둬야 하는지, 인간이 왜 사리분별력을 갖춰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반면교사 노릇만큼은 톡톡히 해냈다.

여포는 독재자 동탁을 주살했다는 이유로 한때 영웅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탁의 잔당에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의탁할 곳을 찾아 헤매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했다. 그 시절 유비 또한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환영받았고 심지어는 빈말일지라도 “나 대신 이 땅을 다스려 달라”는 부탁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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