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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째 날(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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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촌항의 돈 들이지 않고 이익이 되는 투자
예보대로 밤새 비가 내렸으며 아침의 빗줄기는 더욱 세지는 듯 했다.
듣고 싶고 알고 싶고 궁금한 점이 많은가.
간밤에도 많이 물어왔던 관리인 김민수의 만류는 애원에 가까웠다.
비용 걱정 말고 물 좋은 온천에서 휴식을 충분히 취한 후 떠나라는 것이 기본적인 권고
지만 비가 그칠 때 까지라도 기다리라는 것.
늙은이에 대한 연민인가 그의 천성적 인정인가.
끝내 막무가내로 나서려는 내 배낭 주머니에 달걀 몇개와 일용품을 넣어주는 그.
그의 전화번호를 받고 재회를 기약했다.
판초와 우산으로 무장하고 거리에 나왔을 때는 아침 7시 40분.
밤에는 몰랐는데 버스노선이 4번국도를 따라 어제 마감했던 전촌삼거리를 경유한다.
5분여 밖에 걸리지 않는 전촌삼거리에서 해안으로 진입한 시각은 아침 7시 55분.
비는 내려도 시야는 확 트여 오히려 기분이 상쾌한 아침.
그러나 지저분한 전촌해수욕장.
어촌 주민들이 잠시 시간을 내면 말끔히 청소해서 비철에 해변을 찾는 나그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련만.
전혀 돈 들이지 않고 밎지기 않고 이익이 많은 투자일 것인데.
지방어항 전촌항(典村)은 부유한 느낌을 주는 어항이다.
월성원자력본부 어느 팀과 자매결연 효과인가.
옹색하지 않은 너른 공간을 확보한 덕이리라.
넓은 땅 확보도 원전효과일 것이다.
솔밭공원과 야외공연장 까지 갖춘 넉넉한 어항인데 해수욕장만 잘 관리하면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어촌이겠다.
전촌항에서 감포해변으로 넘어가는 해안길은 없다.
가로막는 작은 산이 있는데다 그 산에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도를 따라 멀리 돌아야 하며, 그러면 감포항 초입이 된다.
낡은 경고판이 서있고 철조망이 막고 있으나 군인 냄새가 나지 않는 듯 했다.
산 넘기를 강행했다.
희미한 길을 따르기도 하고 철조망을 뚫기도 하며 넘어 내려선 해변은 감포해변이다.
군부대는 이미 철수했는데 왜 길을 터주지 않을까.
긴 해안을 돌아 국가어항 감포항(甘浦)으로 갔다.
감(甘)자 지형과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 해서 감은포라 불리다가 감포로 축약되었단다.
수년 간격으로, 팀을 바꿔, 교통수단도 각기 달리 해서 왔으며 한밤 투숙도 한 어항인데
올 때 마다 놀랍게 확장된 느낌이다.
확장의 끝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질까.
40여년에 걸친 내 단골집만 옛 대로 있을 뿐 주인까지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하는 듯.
가장 작은 집 중 하난데다 발전이 전혀 없는 집이지만 정직한 여주인이라는 신뢰감으로
인연이 되어선지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이번에는 인사만 남기고 떠났다.
오랜 단골이라 해도 아침 9시밖에 되지 않은 때에 1인 메뉴를 요구하기가 저어되어서.
눈치 빠르면 절간에서도 젖갈 얻어먹는다
노벰버 리조트를 왼쪽 멀찍이 따돌리고 항구의 북단 방파제에서 어민들의 통로인 듯한
철계단을 타고 넘어갔다.
"눈치가 빠르면 절간에서도 젖갈 얻어먹는다"잖은가.
어민들만의 길, 숨겨둔 길이 종종 있는데 그 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부산 오륙도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688km해안길을 그어 '해파랑길'이라 했단다.
몇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테마를 붙인 듯 한데 더러는 그 길과 겹치기도 하나 내가 걷는
길에는 그들이 내세운 거창한 뜻이 없다.
조금 전에 해병대가 주둔했던 산을 넘었듯이 오직 바다에 밀착하겠다는 것 뿐이니까.
기어코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해안 바위지대를 밟고 송대말등대(松臺末)로 갔다.
끝없이 펼쳐지는 망망대해, 동해를 지키는 등대란다.
송대말 등대란 나이 300∼400년쯤 되는 소나무 숲 끝자락의 등대라는 뜻이라나.
암초들이 길게 뻗어 있는 감포항 인근 해역에서 해난사고가 잦은 소형 선박들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암초들의 위치 표지를 세운 것이 송대말등대의 효시란다.
1933년 2월 감포어업협동조합에서 설치했는데 감포항 이용선박의 증가에 따라 1955년
이곳 송대말에 무인등대를 설치했다는 것.
"육지표시 기능의 필요성이 제기돼 1964년 12월20일 기존 등탑에 대형 등명기를 설치해
광력을 증강하고 유인등대로 전환"하였단다.
지금의 등탑은 통일신라를 이룬 문무대왕을 기리는 뜻으로 감은사지 3층 석탑을 형상화
했다는데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었다.(문무왕에 대해 호의적이 아니기 때문에)
해안길은 척사마을(尺紗/五柳2里) 한하고 척사길이다.
척사항(소규모어항)을 지난 후 풀이 죽어가는 듯 하던 비가 오류해수욕장 남쪽 입구에
당도했을 때 다시 기세를 올렸다.
오류해수욕장 북단에는 오류천이 동해로 흘러든다.
우회해 31번국도 오류교를 걸어야 하지만 비에 젖은 신발 물에 젖은 들 어떠하겠는가.
신발 신은채 개천을 건너 다시 철계단을 타고 넘어갔다.
'오류고아라해변 북문' 간판이 서있는 오류해수욕장 북단이다.
모래가 고와서 고아라해변으로 개명했다는데 콘테스트에 내놀 만한 예쁜 이름이다.
바위지대는 암벽을 타는 기분이 들어 오히려 재미를 느끼지만 영업용 집들이 점유하고
있는 해변에는 난감할 수 밖에 없다.
이 지역이 바로 그런 경우다.
고아라해변을 벗어나면 해안에 밀착한 31번국도를 따라 들락거려야 한다.
차량의 왕래가 많아 긴장을 풀지 못하고 걷기 때문인지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구간이다.
모곡항에 들렀다가 나오면 다시 도로를 따라 마냥 걷다가 모처럼 해안으로 들어선다.
경주시의 마지막 어항(소규모어항) 연동항이며 포항시와 경계다.
이런 희열을 위해 몇시간의 절망적인 드라마가 필요했던가
비가 그친 정오쯤에 포항시로 넘어섰다.
장기면 두원리(長鬐面 斗院里)다.
소규모어항 두원항을 지나면 해안은 또 31번국도를 따라야 한다.
조금 전에 맞은편에서 내 곁을 지나갔던 듯한 승용차가 뒤에서 다가와 내 옆에 섰다.
이 지역 해안 경비대에 근무해서 길을 잘 안다는 젊은이다.
"양포까지는 걸을 해안길이 없습니다. 위험한 길 걷지 마시고 타세요"
고마운 젊은이 덕에 1시간 이상 벌게 되었다.
실은, 내심 편승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서-남해안에서도 이같은 도로에서는 아쉽기는 해도 편승했으니까.
나는 철저하게 해안을 걸으려는 것일 뿐 길 답사를 하는 중이 아니다.
한데, 차안에서 잠깐 졸았던가 양포리(良浦里)를 지나 계속해서 달리는 젊은이.
하마터면 포항까지 갈 뻔 했다.
대화천 대진교 앞에서 허겁지겁 하차해 대진해변(大津)으로 갔다.
대진해수욕장을 거닐며 호흡을 가다듬고 걷기를 다시 시작했으나 미련을 떨쳐버릴 수
없어 양포까지 역코스 히치-하이킹을 했다.
양포교(수성천)에서 국가어항 양포항으로 갔으나 큰 사건이 발생했음을 비로소 알았다.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디카가 없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조금 전에 대진해변에서 사용했건만.
당장의 문제보다 8월 29일부터의 사진, 전남 순천 이후의 모든 기록이 사라져버렸으니
허탈을 넘어 패닉(panic)상태에 다름 아닌 지경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맥이 빠져 걷기도 힘겨웠고 보이는 것들이 조금도 감응되지 않았다.
특이하게 긴 방파제를 가진 다기능 양포항도 관심을 일으키지 못했다.
소규모어항 신창1, 2항을 지나 국도가 곧 해안길인 신창리(新倉里에서 또 편승했다.
의기가 소침해지니까 공차증이 더욱 부어오르는 것 같아서.
금곡교((琴谷/장기천)를 건너 하차. 영암(靈岩)해안을 따라 영암1,2,3항(모두 소규모어
항)을 지나서 대진항, 다시 대진해변을 거쳐 대화천의 대진교로 갔다.
동해로 뛰어드는 대화천 때문이다.
혹시나 하고 걸었던 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잃어버린 보물을 찾고 있는 늙은이로 보이도록(누군가 습득했다면 돌려줄 마음이 일도
록) 일대를 누비듯이 찾아보았다.
아마 바늘이었다 해도 찾았을 것이다.
조금 가다가 들어선 해안길은 지방어항 모포항(牟浦里)으로 이어지지만 또 끊긴다.
운 좋게도 구평항(邱坪)으로 간다는 고기 운송차를 만났다.
장기면은 모포항에서 끝나고 구평항은 구룡포읍(九龍浦邑) 땅이다.
내려준 구평포구를 둘러보고 갈길을 찾느라 서성거리다가 그 차 운전자를 다시 만났다.
해안로가 자꾸 끊기는데 하정으로 가려면 타란다.
지도에도 하정항 까지는 해안을 따라서 갈 수 없다.
고기운송차는 장길리항(長吉里)에 잠시 들렀다가 하정리(河亭里)로 갔다.
고마운 운전자 아니었으면 정말로 힘겨운 길이었을 것이다.
구룡포에 도착해서 우선 디카를 구입한 후 다음 일정을 정할 요량이지만 사라져버린 11
일간의 기록에 대해서는 애석한 마음 달랠 길 없는 길.
하정 이후의 해안길은 구룡포항까지 이어진단다.
그것 만도 다행으로 여기고 2곳 하정항을 거쳐 구룡포항을 향해 걷기는 하지만 중단을
고려하며 걷고 있었다.
한꺼번에 빠져버린 기력을 회복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전화가 왔지만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기적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오고 있음을 어찌 알겠는가.
거듭 걸려온 전화는 한 순간에 달아나버린 늙은나그네의 맥을 한 순간에 불러들이기에
충분했다.
내 디카를 가지고 있다는 이.
이 사람은 양포까지 태워준 승용차 운전자다.
양포에서 내릴 때 차 안에 놓고(빠뜨리고?) 내린 것이다.
경주에 갔다 귀로에 디카를 발견하고 내가 내릴 때 준 명함의 번호에 전화한다는 것.
바쁜 그의 시간을 뺏지 않는 방법으로 해양경찰서 구룡포파출소에 맡겨놓기로 했다.
이런 희열을 위해 몇시간의 절망적인 드라마가 필요했던가.
명함을 주지 않고 내렸다면 이 디카가 주인에게로 귀환할 수 있겠는가.
편승한 차의 운전자에게 종종 명함을 주었지만 이 사건 후로는 필수가 되었다.
이 사건의 해피엔딩이 없었다면 8월 29일 이후 오늘까지의 글은 쓰지 못했을 것이다.
연상력(聯想力)은 아직도 활발하나 기억력은 이미 퇴화해 디카에 의존하고 있으니까.
호미곶에 보내는 쓴 소리
날개를 단 듯 가벼워진 걸음은 단숨에 연안항 구룡포항의 해양결찰 파출소에 당도했고
디카를 받은 후 비로소 시장기가 와서 식사를 했다.
식사후, 예정에는 없으나 성공적으로 끝낸 드라마의 보너스로 호미곶 방문을 택했다.
호미곶을 코스에 넣지 않은 까닭은 갔다가 되돌아와야 하기 때문이었는데 어차피 걸어
가지 않을 길이라면 반복도 개의될 것 없으니까.
지체없이 구룡포 해변으로 갔다.
구룡포해수욕장에서 삼정리 해변(三政里), 삼정항까지 올라가 도로(일출로)로 나왔다.
여유롭게 호미곶을 살펴보려면 차량을 이용해야 할 시점인 듯 해서 걷기를 중단했는데
대중교통 노선과 시간을 몰라 허둥대다가 편승을 시도했다.
내 히치-하이킹을 받아준 석병리(石屛里) 해변 일출로하우스(민박집)의 손욱진은 손님
태워나르느라 바쁜 중에도 나를 위해 호미곶 까지 달렸다.
내가 과연 잠재적 고객일까.
그의 이미지로 보아서는 천성인 듯.
오늘 내게 헌신적인 사람이 왜 이리 많을까.
영일만의 끝, 한반도의 최동단, 호상(虎像)인 지형에서 범의 꼬리를 닮은 곶이라 해서
호미곶(虎尾串), 우리나라에서 뜨는 해를 가장 빨리 보는 곳, 대보면 대보리(大甫里)에
속해 있으나 관광지로 각광받으면서 일약 면 이름이 되다.
호미곶의 요약한 이력서다.
국내 최대규모의 등대, 국내 최초의 등대박물관, "세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피지
섬의 햇볕과 새천년 한반도의 첫 일출로 채화된 이 곳의 햇볕, 가는 천년 마지막 일몰인
변산반도에서 채화된 햇볕을 합화(合和)해 태어난'새천년 영원의 불'이 안치돼 있는 곳"
현재까지의 자부심이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뜨는 해를 볼 수 있는 위치의 지위는 이 길을 걸어오다가
거쳐온 간절곶(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에 1분 차이로 빼앗긴 듯.
해맞이의 성지(聖地)라 해서 관광지 덕목 중 중요한 부분인데.
대통령을 배출한 곳이라 그런가 국비를 많이 쓴 흔적이 역력하다.
시작은 이 지역 출신 대통령의 탄생 이전에 했지만.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인지 한바퀴 돌아본 소감은 이름들에 비해 부실하다는 것.
협의의 유물 박물관으로 만족한다면 할 말이 없으나 현대 박물관의 존재의의를 활성화
하려면 보다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사람은 항공 의존도가 절대적이지만 날로 늘어나는 화물은 여전히 항해가 절대적이다.
등대의 임무가 줄기는 커녕 더욱 첨단화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국내외 등대의 시대별, 기능별, 능력별, 업적별 비교 등 시청각적 자료는 물론
미래형 등대까지 제시하는 서버스를 해야 비로소 박물관의 존재의의가 사는 것이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칠암항 야구등대 관계자들의 견학이 필요한 이유도 된다)
새천년기념관 역시 묵은 두 천년을 통한 새천년의 비전이 없거나 약하다면 채화,합화의
불은 있으나마나 한 빈 집일 뿐이다.
'상생의 손'이라는 물위(바다)에 불쑥 나와 있는 손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상생의 의미를 느끼기는 커녕 소름이 끼치려 했다면 심미안이 없는 늙은이라 그랬을까.
과연 나만 그럴까.
우리나라 지자체들은 로마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로마가 길이 넓어서 관광객이 몰려드는가.
시내 진입을 금지해도 걸어서라도 가려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길을 넓히는 것보다 관광상품의 질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길 넓히는 비용을 상품의 질에 쏟아부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최악의 지자체는 단연 제주도지만 포항도 예외가 아니다.
승용차 위주로 하여 길만 확장했을 뿐 상품의 질은 형편 없다.
단 1곳의 관광지를 위해 20여km를 대로로 확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우매한 짓이다.
승용차 1대당 평균 3명이 승차한다면 10대가 가도 30명에 불과하다.
초입에 넓은 주차장을 만들고 셔틀버스를 운행하면 길 확징이 필요헚고 공해도 줄인다.
대중교통 이용자들도 당연히 증가하게 된다.
머리가 없으면 빌리기라도 하라.
뜸한 뻐스 기다리며 해본 생각이지만 그래야 한다.
우리나라는 불요 불급하거나 불합리한 길들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에 길 때문에 망할 것
이라는 말이 언젠가는 나오고야 말 것이다.
1시간여를 기다려 탄 시내버스가 포항시 온구석을 도는지 밤중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성의없는 버스기사 때문에 찜질방 찾느라 헤맸지만 그 덕에 정자를 발견했다.
찜질방을 버리고 정자에 집을 짓게 되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