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탄 쌀인도단의 선적은 23시간이 지난 25일 밤 8시에 남포항에 도착한다.
남포항에 들어가기위해서는 로무현 대통령이 방문한 서해갑문을 거쳐 서해에서 대동강으로 입항한다.
입항의 건물에는 큰 빨간 글씨로 "위대한 주체사상 만세", "위대한 김일성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고 했는데 글씨가 이렇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글 내용에서 부터 빨간 색갈이 주는 힘이어라.
나는 농수산물 유통공사에 근무하는 황윤근(44세)과 함께 한 방을 쓰기로 하고 짐을 정리하는데 전기가 나갔다.
마침 숙소에는 경공업원자재를 갖고 트레이드 포천호를 타고 온 우리 통일부 소속의 4명의 동지가 와 있었는데 선장이 필리핀이라 의사가 잘 안통해서 애를 많이 먹었다고 했다.
우리가 타고 온 배는 도착과 동시에 하적하지 못하고 시간을 늦추었다.
이유인즉은 화재사건의 쌀을 받는 문제가 토론되었다.
일차 검사원으로 올라온 김영일(28세)와 오칠번(47세)의 두사람은 우리의 핸드폰으로 사진을 함부로 찍어서는 안된다는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문제의 사진이 있을 때는 압수는 물론 조사를 받게 된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입장을 바꾸어서 북에서 온 친구들이 서울역앞의 노숙자를 사진찍기를 한다면 우리도 못찍게 할 것이 틀림이 없다면서 역지사지를 하자고 일러주었다.
아울러 쌀을 하적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이 문제는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새벽 6시에 잠을 설치고 일어나 북의 밖을 살피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주목, 회양목, 라일락, 리기다송,칸나,은행나무,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었다.
북이나 남이나 다 같은 나무임이 신통하면서도 반갑다.
나는 앞의 강변으로 나갔다.
그 유명한 대동강물에 세수를 하고 물맛을 봣다. 이곳에는 남포항의 주민들이 낙시를 즐기면서 한가롭게 대화를 하고 있다. 참말로 반갑다. 얼굴들이 우리가 잃어버린 50년대의 순수한 얼굴의 이들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이미 잃어버렸는데...
완연히 대동강물은 민물이다. 한강은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오지만 이곳 대동강은 한강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다.
물깊이가 다 들여댜 보인다.
하적장으로 나가서 우리 4명은 결국 폐기된 쌀로 간주하고 사료용으로 받는다는 조건으로 인수하고 정식의 쌀인도의 량에는 포함시키지 않기로 정리하는 나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 참 좋다.
더 많은 쌀이 다시 이북 주민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참 좋다. 북의 쌀 인도단의 설명이 인상적이다. "쌀은 숨을 쉽니다."고 김영일 젊은 이가 말한다. "화재시 뿌린 소화제 염기를 마셨고 또한 연기를 마셔서 이 쌀을 인민이 먹을 수 없다고 했으며 가축에게 먹이면 그 또한 먹이사슬로 인민이 피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는 논리적인 설명앞에서 나는 전적으로 공감하여 그대로 폐기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하적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선장은 북에서 안받겠다고 하면 큰일이라고 걱정을 했다. 왜냐면 그대로 내려가다가 화재가 안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다며 무조건 하적을 요구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불이 나면 자신의 가족을 잃게 된다는 말에 그저 우리는 그대로 폐기처리하는 조건의 하선이 이루어진 것임을 밝혀둔다.
농수산부 직원들은 앞칸의 쌀은 피해를 안입었으니 그것은 하적의 실적으로 요구했지만 북의 안내원들의 요구대로 전량을 폐기처리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아름다운 결론으로 드디어 하적이 실시되었다.
같이 온 농수산부 친구들은 쌀을 싣고 온 배안이 편하다면서 많은 시간을 배에서 시간을 소일하는데 비해 나는 남포항의 선원구락부와 배를 오가면서 하적을 지켜보는 일과가 진행되었다.
나는 신이 났다.
가장 먼저 <선물점>으로 갔다. 정남철(구락부 판매원, 40세) 선생에게 통일은 언제 될지요? 했더니 "통일은 서로 함께 노력해야 되지요. 말 두마리가 달리는데 어느 한 말은 앞으로 나가고 다른 한 말은 뒤로 처지면 안되지요"는 통일이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검사원으로 올라온 김영일 선생은 말했다.
"남조선에서 미선, 효순이가 미군탱크에 깔려죽었을 때 왜 남쪽에서는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나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적하는 시간에 우리는 구락부 여러곳을 돌아다녔는데 탁구를 하는 점수 과정이 나를 감격시켰다.
영어로 점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글로 즉 1;0이면 "일대영", 2:7이면 "이대칠"로 계산을 하는 것이 참으로 신선해보였다.
자동차의 백밀러를 이들은 "후사경"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자주성을 갖어야 한다는 공감으로 어색하지만 한글로 쓰다보니 오히려 이 말이 더욱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계봉일(청길무역회사 45세) 선생과 김동철(50세) 선생에게 외래어문제는 철저하게 한글로 써야 한다는 자주성의 주장을 펼쳤다.
이들은 북의 '남새'를 남에서는 '채소'라고하는데 이 채소는 일본어의 "소채"를 뒤집어서 사용한다면서 말이 안된다고 남쪽의 한글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어름보숭이'가 어때서 남쪽에서는 '아이스크림'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고도 말했다.
26일 저녁 하적 시작과 함께 나는 응접실에 있는 TV를 켰다. "조선의 별"이 웅장한 화면과 노래가 나오는데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어린이들이 펼치는 춤과 노래도 무척 간결하게 재미있게 빈틈없이 진행되는 것이었다. 이어서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의 사건이야기를 설명하면서 외세에 항전했던 조선민족을 이겨낼자 없다고 당당하게 자랑했다. 북TV는 저녁 5시부터 밤 11시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