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둘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이번 답사는 장마철을 감안하여 양택답사로 진행합니다. 답사지를 준비하면서 '고성군'에 대한 자료가 있어 옮겨왔습니다.
고성이 정전협정과 DMZ 탄생 60주년을 맞아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면서 안보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고성은 지난 1953년 7월 27일 유엔군총사령관과 북한 인민군사령관, 중국 인민지원군사령관이 휴전을 위한 전투 배치선에 합의하면서 이뤄진 휴전선을 머리에 이고 있다. 중략 <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
고성군의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게 한 중심에 선 두 인물의 별장을 간다하니 마음속이 복잡해집니다. 풍수를 공부하면서 얻는 역사의식은 덤이라 표현하기엔 제 인생에 있어 엄청난 선물입니다. 어찌 풍수공부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원한 바다가 펼쳐지는 동해안을 배경으로 과거속의 인물과 조우하는 색다른 시간을 만들어 보시자구요. 고맙습니다.
1. 일시 : 2013년 7월 14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출발
3. 답사지
1) 어명기 가옥 (강원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551)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삼포리 어씨(魚氏) 집성촌에 있는 한옥식 전통가옥으로 1500년 경에 건립되었고, 1750년 경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53년 재건하였다. 어명기의 증조부 어용수(魚用珠)가 1860년 경에 구입하여 대대로 전해왔으며 2000년 현재 후손 어용선이 소유, 관리한다.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장대석의 바른 층 쌓기 높은 기단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ㅁ자집 형태의 민도리집이다. 본채 외에 디딜방앗간, 행랑채, 헛간, 화장실이 있으며, 디딜방아의 마모 정도로 보아 약 250년 이상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영북지방 고유의 옛 부유층 가옥 구조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 때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6·25전쟁 때는 한국군 제1군단 사령부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1996년 4월 23일 산불로 디딜방앗간과 화장실이 소실되었다가 복원되고, 1997년 별채를 해체, 복원하였다.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두산백과]
2) 고성 왕곡마을 (강원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 500)
마을은 동쪽의 골무산, 남쪽의 호근산과 제공산, 서쪽의 진방산, 북쪽의 오음산 등5개의 산봉우리와 송지호(松池湖)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와 차단된 골짜기 형태의 분지를 이룬다. 다섯 개의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여 오봉(五奉)으로 이름 붙여졌다. 이러한 지형 덕분에 한국전쟁 당시 마을에서 불과 40km 떨어진 지역에서 격전이 지속되었으나 대부분의 집이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따르면 이곳은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는 풍수의 의미에 충실한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의 역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4세기 말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의 최측근이었던 함부열(咸傅說)이 이성계의 조선왕조 건국에 반대하여 마을 근처에서 은거하였고, 그의 차남이 이곳으로 옮겨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약 600년 동안 그의 후손인 양근 함씨(강릉 함씨라고도 함)와 강릉 최씨가 주를 이루어 거주하고 있다.
19세기 말 인구가 증가하면서 마을은 금성(錦城), 왕곡(旺谷), 적동(笛洞)의 세 마을로 분리되었다가 일제 강점기 때 다시 합쳐서 오봉(五奉)이라 불렸다. 이곳은 19세기 말 동학(東學)의 활동과 관련이 깊다.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崔時亨)이 1889년 이곳에 머물며 포교활동을 하였고, 1894년 동학혁명 당시에는 관군을 피해 함일순가옥에서 지내며 전력을 재정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는 ‘동학의 빛 왕곡마을’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 내 대부분의 가옥은 관북지방에서 볼 수 있는 북방식 전통한옥이다. 안방과 사랑방, 마루, 부엌을 한 건물 안에 배치하고 부엌에 마구간을 연결한 ‘ㄱ’자 형의 겹집구조를 보인다. 가옥에는 대문과 담이 없어 앞마당이 개방적인데 이는 햇볕을 충분히 받고 폭설로 인한 고립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반면에 뒷마당은 비교적 높은 담장으로 되어 있어 폐쇄적인 구조를 띄는데 이는 뒤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을 막기 위한 용도이다. 또,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 특성상 지붕에 쌓이는 눈의 무게를 지탱하고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지붕 뒤쪽(북쪽)에 두꺼운 나무를 자재로 사용하였다. 또한 외양간 지붕으로 마을 내 집들을 구분할 만큼 외양간 지붕이 가옥마다 달리 되어있는 점이 특징이다. ‘ㅅ’자 모양의 맞배지붕과 지붕이 한쪽으로만 경사져 있는 가적지붕 등 이곳의 외양간 지붕은 한옥의 다양한 지붕 형식을 가지고 있다.
마을에서는 어머니의 제사를 반드시 차남이 모시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고려 말 함부열의 차남이었던 함치원(致遠)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음력 1월 14일에는 오곡밥 아홉 그릇을 먹고 나무 아홉 짐을 하는 풍습이 전해진다. 19세기 전후에 건립된 북방식 전통한옥과 초가집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밀집·보존되어 있어 1988년 전국 최초로 전통건조물 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2000년에는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두산백과]
3) 건봉사 (강원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6·25전쟁 전까지는 31본산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520년(법흥왕 7) 아도(阿道)가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533년(법흥왕 20) 부속암자인 보림암(普琳庵)과 반야암(般若庵)을 창건하였다. 758년(경덕왕 17)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정신(貞信)·양순(良順)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10,000일 동안 염불을 계속하는 모임)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만일회의 효시이다. 여기에 신도 1,820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 120명은 의복을, 1,700명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다. 782년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명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한다.
810년(헌덕왕 2) 승전(勝詮)이 당나라 현수(賢首)에게서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화엄경≫을 강설하였고, 845년(문성왕 7) 백화암(白華庵)을 창건하였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형(鳳形)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1358년(공민왕 7) 나옹(懶翁)이 중건하고 건봉사라 하였다. 1464년(세조 10)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願堂:소원을 빌기 위한 지정 사찰)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다. 이 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孝寧大君)·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조흥수(趙興洙) 등을 파견하여 노비와 소금을 하사하고 사방 10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다.
6·25전쟁 때 이 절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당시까지 현존하였던 당우로는 대웅전·관음전·사성전·명부전·독성각·산신각·단하각·진영각·범종각·봉청루·보제루·대지전·동지전·서지전·어실각·어향각·동고·낙서암·극락전·만일원·보안원·선원·원적암·사무소·불이문·여관·장의고·성황당·수침실(水砧室) 등 총 642칸에 이르렀다. 중요 문화재로는 도금원불(鍍金願佛)·오동향로·철장(鐵杖)·대종·절감도·차거다반(硨磲茶盤) 등과 불사리탑 등 탑 8기, 부도 48기, 비 31기, 고승 영정 44점 등이 있었다. 또 부속 암자로는 보림암·백화암·봉암암·극락암·백련암·반야암·청련암·대성암·적명암·보리암·보문암·대원암·일출암·안양암·동대암·망해암 등이 있었다.
현재 고성 건봉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고, 6·25전쟁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불이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능파교와 십바라밀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진 두 개의 돌기둥,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새겨진 돌기둥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 김일성 별장(고성군 거진읍 화포리 596)
**이승만 별장
1954년 건립되었다. 1961년부터 방치되던 것을 1997년 7월 육군이 재건축하여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단층 석조 건물로 면적은 89.25㎡이다. 집무실·침실·거실을 재현하였으며, 이승만 부부가 사용한 침대·낚시 도구·의복·안경·장갑·여권·편지 등 유가족이 기증한 유품 53점을 전시하고 있다. 별장 뒤에는 친필 휘호·의복·소품·도서 등을 전시해 놓은 이승만대통령화진포기념관이 있다. 1km 남짓한 거리에 있는 화진포의 성(김일성 별장)·이기붕 별장과 함께 역사 안보 전시관을 이루고 있다.
**이기붕 별장
화진포해수욕장 옆에 있는 이기붕 별장은 1920년대 건축된 것으로, 외국인 선교사의 주거공간, 북한군 간부 휴양소 등으로 사용되다 육군사령부의 휴양소로도 이용되었으며 1999년에 전시관으로 바뀌었다.
**김일성 별장
1938년 독일인 H. 베버가 지었고,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김일성이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와 함께 여름 휴양지로 사용했으며, 공산당 간부들도 이용하여 일명 김일성 별장으로 불린다. 1948년 당시 6살이던 김정일이 이곳의 입구에서 찍은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지하 1층·지상 2층의 석조 건물로 1964년 육군에서 건물을 철거하여 재건축하였고, 1995년 개·보수하여 장병들의 휴양 시설로 사용하였다. 현재 내부에 한국전쟁과 북한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약 1km 거리에 있는 이승만 별장·이기붕 별장과 함께 역사 안보 전시관을 이루고 있다. [네이버지식백과]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총무 김 은 희 (010 - 3228 - 6489) 회장 김 종 대 (010 - 4234 - 7074)
|
첫댓글 많은 참석 바랍니다.
성원에 힘입어 이미 만석입니다. 답사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