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통해 부를 축적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페인 왕들이 16세기 유럽의 미술품들을 사들이면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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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라는 뜻은 초원을 뜻하는 말로서 프라도 데 예로나모 공원에서부터 유래한 프라도 미술관은 왕족이나 귀족들에게만 공개가 되었다가 1819년 페르디난도 7세가 프라도 미술관 전시실 2개를 대중에게 공개하면서 일반인들도 왕실의 예술품을 관람할 수 있었다.
1868년 국유화되면서 국립미술관으로 개관한 프라도 미술관에서 스페인 바로크 예술의 거장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역사화, 종교화, 초상화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다.
▶ http://museoprado.mcu.es |
프라도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 중에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궁중의 일상을 완벽하게 재현해 해석이 명확할 것 같지만 작품속의 거울 장면 때문에 미술사에서 지금까지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화면 왼쪽 팔레트와 붓을 들고 서 있는 벨라스케스는 작업실로 꾸민 알카사르 궁전의 한 방안에서 대형 캔버스 앞에 서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가 화면 전면에 자신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궁정화가로서 자신의 활동과 화가로서 독자적인 창조자로서 자신을 찬미하기 위해서다.
화면 중앙에는 왕위 계승자인 마르가리타 공주가 드레스를 입고 벨라스케스를 외면한 채 서 있다. 왕비의 시녀 도나 마리아 서르미엔토가 무릎을 꿇고 붉은 도자기 잔인 부카로에 담긴 물을 공주에게 건네고 있고 시녀 도나 이사벨 데 벨라스코는 공주의 뒤에 서 있다. 그녀 뒤로 희미하게 서 있는 사제와 수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화면 오른쪽 검은 색 드레스를 입고 일그러진 표정의 여자 난쟁이 마리 비르볼라가 있다. 여자 난쟁이의 뚱뚱한 몸과 어린 마르가르타의 공주의 몸과 비교되고 있다. 그녀 옆에는 남자 난쟁이 니콜라시코 페르투사가 졸고 있는 개의 등에 발을 얹어 놓고 있다.
당시 펠리페 4세는 난쟁이, 어릿광대를 무척 좋아해 곁에 두었다. 국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난쟁이는 왕실의 유흥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민심을 국왕에게 전달하는 일도 했었다. 이 작품에서 두 난쟁이의 화려한 옷차림은 비천한 신분이지만 왕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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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녀들>, 1656년, 캔버스에 유채, 318*276 |
작업실 뒤편에는 대형 그림이 두개가 걸려 있는데 벨라스케스의 사위 마소가 루벤스의 작품을 모방한 그림이다. 그림 아래 검은 색 프레임으로 된 거울에는 펠리페 4세 내외의 모습이 보인다. 거울 오른쪽 출입구 옆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에는 왕비의 시종 호세 니에토가 서 있다.
미술사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장면은 거울 속의 국왕 내외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실제로 펠리페 4세가 국왕 내외가 그림의 모델을 서고 있는 마르가르타 공주를 위로하기 위해 작업실을 찾았던 일상을 그린 것이지만 화면 속에서는 국왕 내외는 거울 속에만 있다.
벨라스케스는 국왕 내외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거울 속의 국왕 내외를 빛으로 둘러싸인 모습으로 표현했다. 빛은 군주의 존엄성을 나타내고 거울은 지혜를 상징하는 도구다.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는 이 작품에서 그의 가슴에 그려진 붉은색 십자가는 성 야고보 기사단의 문장이다. 하지만 실제로 벨라스케스는 이 작품을 제작하고 2년 후에 펠리페 4세에게 기사단의 문장을 받았다. 기사단 문장을 받고나서 훈장을 덧칠했다.
17세기부터 이 작품에 매료되어 나름대로 재해석해 고야, 드가, 마네, 달리, 피카소 등 근, 현대의 수많은 화가들이 작품을 내놓았다. 특히 파블로 피카소는 58점의 연작을 통해 이 작품을 재해석 했다.
벨라스케스에 이어 스페인 예술을 대표하는 화가가 고야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고야의 유일한 누드화인 <옷을 벗은 마하>와 쌍을 이루고 있는 <옷을 입은 마하>도 눈길을 끌고 있지만 스페인 독립 전쟁을 다룬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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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8년 5월 2일 프랑스 점령에 마드리드 시민들은 거대한 봉기를 일으키고 다음날 반란을 진압한 프랑스 군대는 봉기에 가담한 마드리드 시민 가담자들을 처형했다. 이 사건이 발생 한 6년 후, 전쟁이 끝나 갈 무렵 고야는 처참했던 그날을 두 개의 그림으로 남겼다.
이 작품은 두 번째 작품으로서 구성은 미구엘 감보리노가 1813년에 제작한 판화를 토대로 삼았다.
바닥에 흥건하게 피가 고여 있는 땅 위로 처형된 세 구의 시체가 서로 겹쳐져 있고 그 뒤로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양팔을 벌린 채 프랑스 군대 총구 앞에 서 있고 프랑스 군대의 총구 모두 그를 향해 있다.
이 작품의 중심은 흰 셔츠를 입은 남자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남자의 자세는 인류의 죄를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연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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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8년 5월 3일>, 1814년, 캔버스에 유채, 266*3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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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셔츠의 남자 옆으로 몇몇의 시민들은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 프랑스 군인들은 공포에 떨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과 달리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똑같은 자세로 서 있다. 고야는 군인의 모습을 통해 무고함과 잔인함을 표현했다.
배경의 3/1을 차지하고 있는 검은색 하늘과 불빛 하나 없는 도시 풍경은 참혹한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는 전쟁의 영웅보다는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들을 더 강조하기 위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실제의 사건은 낮에 일어났지만 고야는 배경을 밤으로 택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미술품에 관심이 많았던 스페인 왕가의 계승자들은 열정적으로 유럽의 거장들의 미술품을 구입하거나 예술가들에게 의뢰하고 주문하면서 소장품을 늘려나갔다. 여러 나라에서 사들인 예술품 가운데 플랑드르 회화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는 작품이 브뤼겔의 <죽음의 승리>다.
화면 왼쪽 해골이 끌고 있는 손수레에는 해골이 가득 쌓여있으며 거대한 해골들은 말을 타고 낫을 들어 인간을 공격하고 있으며 관을 방패삼아 전진하고 있다. 해골은 젊은이 노인, 왕과 추기경, 광대와 하녀 등 모든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 해골들을 피해 도망을 하고 어릿광대는 탁자 아래로 몸을 피하고 있으며 붉은색의 갑옷을 입은 용감한 기사는 칼을 들고 해골들을 공격하고 있다. 오른쪽 끝에 연인들은 뒤에 해골들이 공격하는 것을 모르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이 작품에서 해골과 큰 낫은 죽음을 상징하고 있으며 칼을 빼어들고 있거나 탁자 밑으로 숨거나 하는 행동은 죽음 앞에서는 무의미한 행동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연인이나 탁자 위의 재물, 카드게임은 헛된 삶을 상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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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승리>-1562년경, 패널에 유채, 117*162 |
화면 왼쪽 왕관을 쓰고 있는 왕조차 해골들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골들의 공격을 받아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들 쪽으로 밀려들고 그들을 피해 사람들은 입구에 십자가가 그려진 상자 속으로 도망을 치고 있다. 도망가지 못하고 못한 사람들은 상자 앞에서 쓰러져 있다. 상자의 문이 위로 열린 것으로 보아 이들은 함정 속으로 빠져 든 것이다.
타오르는 십자가에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도 해골들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불에 타 연기가 피어오르는 황폐한 언덕에 나무와 풀은 말라비틀어져 있다.
피터 브뤼겔(1525/30~1569)의 이 작품은 요한계시록과 전도서에 근거한 것이지만 종교적 목적으로 가진 교회용 그림을 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 구원을 약속한 신은 표현하지 않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죽음을 폭력적이고 냉혹하게 표현했다.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펠리페 4세는 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열성적으로 구입했는데 그가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 루벤스의 <사랑의 정원>이다.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로 외교관으로 활동을 하던 루벤스는 50대에 첫 번째 아내가 죽어 실의에 빠졌지만 16살의 어린 헬레나 푸르망을 만나 결혼함으로서 사랑의 열정에 휩싸이기 된다. 루벤스는 새로 얻은 행복을 <사랑의 정원> 화폭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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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화면 왼쪽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가 루벤스다. 그는 아내 헬레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춤을 추고 있다. 큐피드가 그녀의 뒤에 서 있다. 화면 중앙에는 아름다운 귀부인들과 신사들이 이야기를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늘에는 천사들이 꽃을 들고 날아다니고 있다. 화면 왼쪽 상단에 돌고래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의 조각상에서는 물이 뿜어져 나온다. 이 조각상은 다산과 사랑을 여신을 상징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의 이 작품은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그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아름답게 조화시켰다.
◀ <사랑의 정원>, 1632~33년경, 캔버스에 유채, 198*28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