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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평전
자크 랑 지음
실천문학사 / 2007년 10월 / 414쪽 / 15,000원
▣ 저자 자크 랑
총 12년에 걸쳐 문화부와 교육부 장관을 역임해 프랑스 제5공화국에서 최장수 임기를 기록했으며, 2007년 프랑스 대선의 사회당 후보로 거론된 바 있는 유력한 정치인이다. 특히 미테랑 대통령의 산하에서 문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운용하여 ‘문화대통령’이라 불렸을 만큼 프랑스 문화의 제도적 안정을 이루는 데 공헌했다. 문화적 다원성을 중시한 그의 열린 철학은, 프랑스 현대문화에 독창성과 포용력을 동시에 부여했다. 문화와 문명의 보전을 정치적으로 실천해온 저자에게 있어, 넬슨 만델라가 보여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부단한 헌신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명제였을 것이다. 이에 예술가들을 모아 공연을 후원하는 등의 구명 운동에 이어, 고대극과 남아프리카 해방문학을 아우르는 지성과 감성으로 넬슨 만델라의 평전을 집필하기에 이른 것이다.
▣ 역자 윤은주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서울대와 국민대에 출강하고 있다.
▣ Short Summary
신화와 영웅이 사라진 오늘날, 혁명과 저항의 소용돌이에서 숱한 고난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이상과 현실이 일치된 삶을 구현해온 존경할 만한 정치인을 우리는 몇이나 가지고 있을까. 넬슨 만델라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강인한 투사로서, 전제정치에 당당히 맞선 현인으로, 그리고 미학에 조예가 깊은 교양인으로서, 이상과 행동이 일치된 실천적인 삶의 모범을 구현한 참다운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만델라에게 있어서 정치는 직업이 아니라 하나의 소명이었다. 그것은 운명적이고, 또한 공공선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에 의해 구현되었다. 하지만 만델라가 뿌리에서부터 민중의 투사였던 것은 아니다. 템부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궁정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대학교육까지 받으며 일반 아프리카 흑인들에 비해 엄청난 특혜를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적 배경과 부유한 삶을 버리고 저항운동에 몸을 던졌기에 그의 투쟁은 더욱 높이 평가된다.
대학에 다닐 때까지 검은 영국인이었던 넬슨 만델라는 인간의 존엄성이 비합리적으로 짓밟히는 과정을 체감하면서 이제까지 순응해온 제도에 대한 공손함을 벗어버리게 된다. 이때부터 질곡의 삶을 살아가게 된 그는 1940년 포트헤어 대학 2학년 때 퇴학을 당하고, 다시 법률 공부를 시작하면서 아프리카 국민회의라는 정치단체에 가입한다. 그리고 1952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흑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한다. 처음에 그는 비폭력운동을 전개했으나, 1960년 3월 샤프빌 학살 사건을 계기로 무장투쟁으로 선회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차례 체포되고, 1964년 6월에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백인 정부가 그를 석방할 때까지 27년간의 복역 기간을 거치는 중에 각종 인권상을 수상하면서 현대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로 전 세계인의 가슴속에 각인된다.
넬슨 만델라가 진정 위대한 까닭은, 용서와 관용이라는 미덕으로 남아프리카를 통일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겪으면서 ‘억압받는 자만이 아니라, 탄압하는 자들의 영혼도 파괴된다’는 진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긴 영어의 생활을 끝내고 자유를 만났을 때, 그는 힘에 의지하던 투사가 아닌, 모든 인간에게 내재한 선의지와 자비를 믿는 성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1991년 7월,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된 그는 백인정부와 협상을 벌여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인 데 클레르크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이듬해인 1994년 4월에는 남아프리카 최초로 흑인이 참여한 자유총선거를 통해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용서와 관용에 기반을 둔 과거 청산에 성공하여 전 세계에 평화와 상생(相生)의 메시지를 전파한다.
넬슨 만델라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실천적인 모범을 보여 왔다면, 이 책의 저자 자크 랑은 문화와 문명의 보존을 정치적으로 실천해 왔다는 점에서 만델라와 공통분모를 지닌다. 이 책은 그 공통분모를 통해 정치가가 바라보는 정치가에 대한 평가를 넘어 오늘날 정치가 지닌 의미로까지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킨다. 특히 정치에 대해 신뢰를 잃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정치 본연에 담긴 숭고한 의미, 즉 공공선에 대한 노력과 그에 대한 동지애를 숙고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참다운 정치가의 궤적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새해 들어 또 한 번의 참정권을 행사할 우리에게 매우 큰 책임감을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 차례
서문
들어가며
제1막 안티고네
제2막 스파르타쿠스
제3막 프로메테우스
제4막 프로스페로
제5막 넬슨 왕
부록
주(註)
연보
역자 후기
넬슨 만델라 평전
자크 랑 지음
실천문학사 / 2007년 10월 / 414쪽 /15,000원
제1막 안티고네
「넬슨 롤리흘라흘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책들이 출간되었고, 다양한 각도에서 그의 면모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하지만 이 책은 기존 저서들과는 달리, 세계라는 큰 무대 위에 선 존재감 있는 배우로서 만델라를 묘사하고자 한다. 넬슨 만델라가 ‘인간에 대한 억압’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극복하고 해결해야 했던 내적인 갈등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델라의 삶을 5막의 연극으로 풀어내고 있다. 먼저 1막에서 만델라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Antigone)』 역할로 등장한다. 안티고네가 국가와 개인의 양심 사이에서 갈등했듯이, 이상주의자이며 열정적인 젊은이였던 만델라는,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 주어진 숭고한 책무를 깨닫고 이제까지 복종해왔던 도시의 법을 위반해야 함을 깨닫는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트란스케이의 템부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렸을 적 이름은 ‘로하바’였으며, 부족 말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만델라는 왕자에 준하는 신분이었지만 한 사건을 계기로 운명이 뒤바뀌게 된다. 1920년대 남아프리카 체제하에서 모든 추장들은 구역 행정을 책임지는 백인 집정관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템부족의 한 부족민이 추장을 고소했다. 소 한 마리가 달아나는 것을 방조했다는 이유였다. 집정관이 곧 출두 명령을 내렸으나 추장은 명령을 거부했다. 그에게 이 사건은 원칙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촌락 내부의 문제에 관한 한 영국 왕의 법이 아닌 템부족의 관습에 따르고자 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만델라의 아버지는 한꺼번에 지위와 재산, 모두를 잃고 만다.
만델라는 물려받을 재산도 교육받을 기회도 상실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뻗친다. 템부족 섭정이 만델라를 궁전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만델라의 아버지가 자신을 섭정으로 추천해준 데 대한 보답의 뜻이었다. 만델라는 섭정의 배려에 의해 다시 귀족 신분으로 자라게 된다. 그는 명문학교인 클라크뷔리에서 중 ․ 고등학교를 마쳤으며, 이후 대학교 입학을 위한 준비학교라고 할 수 있는 포트헤어 대학에 입학해서 법률을 공부한다. 그는 일반 아프리카인들과는 다른 이러한 계급적 배경과 부유함 속에서 검은 영국인이 되어갔다.
만델라는 이때까지 백인들이 가하는 억압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차별정책)가 제도화된 형태로 출범하지 못했고, 따라서 카피르(Kaffir, 아프리카부족)들은 본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델라는 그저 나라를 위해 일하리라는 충성심으로 영어를 배우고 남아프리카 법제를 지배하고 있는 네덜란드 법을 공부했다. 그런데 포트 헤어 2학년 때, 만델라는 처음으로 카피르라는 자신의 조건을 인식하게 된다. 그해 겨울, 만델라는 친구 폴과 함께 트란스케이의 한 우체국에 들렀다. 그런데 60대의 한 백인이 폴에게 돈 몇 푼을 건네주며 우표를 사 오라고 했다. 당시 백인이 흑인에게 잡일을 시키는 것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이때 폴은 돈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그 백인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화를 내며 폴을 모욕했다. 이 우표 사건을 계기로 만델라는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것을 그대로 감수해서는 안 된다고 자각한다.
방학이 끝나고 포트 헤어로 돌아온 만델라는 제도에 대한 공손한 태도를 벗어버리게 된다. 학생대표위원회에 뽑힌 그는 학교 측에 학생들의 요구를 주장했다. 당시 존경을 받고 있던 교장 케어 박사는 이러한 불복종 표시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고, 방학 동안 다시 한 번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이를 거부하면 퇴학을 당할 상황이었다. 섭정의 집으로 돌아온 만델라는 고민에 휩싸였고, 섭정은 이 반항적인 젊은이를 안정시키기 위해 결혼을 서둘렀다. 부족의 관습을 어기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이 젊은 흑인 귀족에게 현실은 너무나 제한이 많았다. 만델라는 금광의 야간 순찰원으로 취직했지만 족장의 전통 관할구역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라는 것이 들통 나 쫓겨나고 말았다.
만델라는 법률가가 되고 싶었다. 그는 법을 모두에게 적용되는 지고한 것이라고 믿었고 이러한 공리에 의한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공부가 중단되고 지갑은 텅 비어 있는 상황에서 법률가의 꿈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척의 추천으로 부동산 소개소 문을 두드리게 된다. 그곳에서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인물로 평생 만델라의 스승이자 지도자가 된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를 만나게 된다. 만델라보다 몇 살 더 위였던 월터 시술루는 혼혈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백인 판사였으나 아내에게 두 명의 아들을 남긴 채 떠나버렸다. 그래서 16세 이후로는 학교를 떠나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부동산업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위엄이 있고 해박했다.
월터 시술루는 라자르 시델스키라는 변호사 친구에게 만델라를 소개시켜 주었다. 시델스키는 다른 두 명의 변호사와 함께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백인들보다 인종 문제에 있어서 개방적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편견의 희생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만델라는 심부름꾼이자, 흑인과 관련된 계약서를 작성하는 서기로 근무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촛불을 켜고 법학을 공부했다.
배움의 욕구로 가득 찬 이 하급 직원은 일상적인 굴욕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에는 백인들이 운영하는 사무소에서 일하는 원주민들은 점심을 화장실에서 먹어야 했다. 대학 도서관에서도 만델라는 백인 친구가 일어나 다른 곳에 앉지 않는 한 테이블을 차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흑인들의 복종 속에는 비밀스러운 반역이 감춰져 있었다. 1943년 만델라는 명문 비트바테르스란트 (the Witwatersrand) 대학교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6년 동안 법률을 공부하게 된다. 그 사이에 월터 시술루의 사촌 여동생 에블린 메이즈와 결혼을 했으며, 정치에도 입문한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반정부 세력으로 남아프리카 공산당(SACP)과 아프리카 국민회의(ANC)가 활동하고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산당은 중부 유럽에서 이민 온 유대인들과 영국인들이 창설한 조직으로, 1924년부터 흑인 대중을 조직하고 있었다. 한편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1909년부터 아프리카인들에 의해서만 활동해온 최초의 흑인 정당이었다. 만델라는 월터 시술루의 권유에 의해 ‘아프리카 국민회의’에 몸담게 된다.
1944년 만델라는 월터 시술루, 안톤 렘베데와 같은 젊은이들과 더불어 아프리카 국민회의 내부에 청년연맹을 창설한다. 이 급진파들은 청년연맹을 창설한 그날, ‘이백만의 백인들이 팔백만의 흑인들을 지배하면서 영토의 87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는 상황’을 비판했다. 그리고 ‘1인 1표’라는, 당장은 허황된 듯 보이지만 결국 우세해질 원칙을 명백하게 제기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힘을 행사할 수가 없었다. 1948년, 백인 정당들 간의 경쟁만 있을 뿐인 선거가 치러지고, 독일제국에 열렬히 찬동했던 다니엘 말란이 이끄는 국민당이 집권하게 된다. 말란은 처음으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단어를 국회에서 표명한 인물이다. 그와 국민당은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한 법과 규칙들을 만들어냈다. 흑인들을 통제하고 다스리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된 법규만 거의 1,200쪽에 이르렀다.
1952년 아파르트헤이트의 중요 장치들이 마련되는 가운데 넬슨 만델라는 올리버 탐보와 함께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차기 집권자들에 의해 더욱 계승 발전되어갔다. 1958년 총리에 당선된 헨드릭 페르부르트는 반투스탄(Bantustan)이라는 흑인 자치령을 선포하고, 외국의 시선을 고려해 흑인들의 강제 이주를 연방화로 위장했다. 그리고 각종 금지령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모든 회합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만델라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아들의 생일잔치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한 번에 한 사람 이상에게 말할 권리도 갖지 못했다고 한다.
1951년 12월,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드디어 시민 불복종 강령으로,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한다. 인도의 간디가 전개한 비폭력 운동을 본받아 대중운동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시민적 불복종 운동을 ‘항의의 형태가 아닌 범죄’로 규정했다. 그들은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수뇌부와 여러 인도인 지도자들을 ‘공산주의 금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재판이 열리자 흑인 시위자들과 백인 자유주의자들이 법정으로 몰려들었다. 판사는 피고인들에게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공산주의’가 아닌, ‘법이 규정한 공산주의’라는 죄목으로 2년간의 집행유예와 함께 9개월의 사회봉사를 선고했다. 공권력이 원했던 바와 비교하면 판결은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것이었다. 비교적 정직한 이 판사는 자신이 적용할 수밖에 없었던 법조문에 대해 조심스럽게 거리를 둔 것이었다.
제2막 스파르타쿠스
「불복종 캠페인은 실패했지만 그것은 거대한 성공으로 이어졌다.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당원이 십만 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이제 더는 겁에 질린 명사들의 클럽이 아니었다. 부족의 고관이자, 전직 교수였던 알베르트 루툴리 대장이 수장에 올랐고, 만델라는 ‘국민의 창’이라는 비밀전투조직의 조직과 운영을 맡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는 변호사로서의 일이 아닌 공공선에 대한 정열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공권력에 맞서는 저항세력의 우두머리로서 스파르타쿠스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 옛날 로마인들에 맞서 싸운 유명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처럼 말이다.」
넬슨 만델라에게 정치는 운명적인 것이 되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점점 그의 가정을 좀 먹어갔다. 아내 에블린은 늘 집에 없는 남편을 못 견뎌 했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딸마저 잃게 되자 ‘여호와의 증인’에 몸담았다. 상황이 이처럼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하게 된다. 1955년 6월 26일, 소웨토 부근의 한 운동장에서 저항세력들의 회합이 열리고 「자유헌장」이 선포되었다. 만델라는 금지처분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회합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이 선언문을 작성하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그는 “백인이건 흑인이건 남아프리카는 인민 모두의 것이며, 어떠한 정부건 인민의 의사에 반하면 그 권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매우 의미 깊은 문구를 실었다. 하지만 이 일로 144명의 주요 책임자들이 기소된다.
불의가 만연한 아파르트헤이트의 이 나라는 앵글로색슨적인 법 형식주의의 천국이기도 했다. 반역죄로 기소된 피고인들에 대한 재판은 1957년부터 1959년 중반까지 계속되었으며, 피고인들은 거의 매일같이 심리를 위해 출퇴근을 해야 했다. 이 시기에 만델라는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눈부시게 아름다우면서도 호전적인 그녀의 이름은 놈자모 위니프레드 마디키젤라였는데, 놈자모는 ‘싸우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름이란 그저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도록 강요한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과 ‘싸우는 여인’이 결혼하게 됨으로써 두 사람은 그 이름의 의미만큼 질곡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1961년 3월 29일, 우여곡절 끝에 재판이 종결되었다. 법정은 아프리카 국민회의가 ‘근본적으로 상이한 국가 형태를 세우고자 했다고 인정하면서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이 ‘올바르고 정의로운’ 판결문이 낭독되는 법정 밖에서 아프리카인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행정부의 독단에 의해 모든 피고인들은 감옥에 남았다. 또한 아프리카너들은 자신들의 구분하에 10개 종족으로 분리된 흑인들을 영토의 13퍼센트에 몰아넣는 반투스탄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농촌 지역이 들끓기 시작했고 성난 시위자들이 여당 당원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거친 반응을 보였으며 학대를 동반한 체포가 줄을 이었다. 이때 위니는 주저 없이 아프리카 국민회의에 가입했고 통행증에 대한 반대시위에 참여한 죄로 감옥과 인연을 맺는다.
행동의 통일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상황에서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분열되었다. 만델라가 분노한 것은 ‘백인이 아닌 인종주의’였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아프리카성(African personality)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당원들이 있었고, 그들은 ‘범아프리카 회의(PAC)’라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국민회의가 의결한 것보다 열흘 앞서 통행증 반납 캠페인을 벌인다. 처음에 시위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샤프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열린 집회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대규모 참사가 일어나게 된다. 집회에 고무된 일만 명의 시위자들이 경찰서로 몰려가자 공포를 느낀 경찰들이 총기를 난사한 것이다.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통행증을 대중 앞에서 불태웠고, 수십만의 아프리카인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을 따랐다. 곧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만델라와 동료들은 반역죄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프리토리아 감옥으로 끌려갔다.
하지만 법정은 다시 최소한의 양심을 보여주었다. 아프리카 국민회의가 공산주의 집단이며 폭력 사태를 도발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만델라는 다시 풀려났다. 하지만 이때부터 그는 지하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밤에만 활동을 하면서 ‘가택파업’을 계획했다.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출근을 거부하자는 것이었다. 정부의 강경 대처에 의해 파업은 이틀 만에 종결되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만델라는 무장 투쟁으로 선회한다.
만델라는 ‘국민의 창’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비밀 군대를 운영하면서 군사기지와 전화선 등 기간시설에 대한 선별적인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어느 날 루툴리 의장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서방에서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은 좋지 않은 때에 왔다. 정부 부처들이 자리한 곳에서 화기를 폭파하기로 예정한 날이 노벨상 수상자가 귀국한 다음날이었기 때문이다. 12월 16일, 수천 장의 전단지가 전국에 뿌려지고 원시적인 화기가 도처에서 터졌다. 폭탄 설치자 한 명이 사고로 죽은 것 외에 다른 인명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루툴리는 한 은신처에서 만델라를 만나 신랄하게 비난을 퍼부었다. 무장투쟁에 대해 전혀 의견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3막 프로메테우스
「1962년 2월, 만델라는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기 위해 아프리카 순회 여행을 시작한다. 이웃 국가의 수반들은 그에게 호의를 표시하며 기부금을 맡겨왔다. 만델라는 마지막으로 들른 에티오피아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그해 8월, 운전사로 가장해 요하네스버그로 출발했다. 하지만 만델라의 지하활동은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요하네스버그로 돌아오는 도중에 체포된 것이다. 이때부터 넬슨 만델라의 운명은 프로메테우스와 같아진다. 냉혹한 정권의 우두머리인 제우스에 대한 저항의 불꽃을 인간에게 가져다준 죄로, 인종주의라는 바위에 27년 동안이나 결박된 것이다. 하지만 만델라는 그 영원할 것만 같은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남아프리카를 구현하게 될 것이다.」
1962년 10월 15일, 법정은 코사 전통복인 카로스를 입고 법정에 나타난 이 반란의 지도자에게 노동자들의 파업조장과 거주지 명령을 위반한 죄에 대해서 물었다. 아직 만델라의 ‘군사적인’ 역할을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넬슨 만델라는 변론을 통해 현 상황의 근본적인 모순을 강조했다. “한 사람에게 있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권리가 거부되면, 법 밖에서 사는 존재가 되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부가 법의 이름으로 그를 법 밖에 두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지금 이러한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바로 내 경우이다.” 만델라의 의도는 이 재판이 개인적인 재판이 아니라 국가적인 재판임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어 자신이 총리에게 보냈던 편지를 언급했다. “피통치자는 통치자에게 발언할 권리를 가지며, 그 요구가 무엇이건 간에 그에 대한 답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총리에게 모든 남아프리카인의 국민공회를 요구했으며, 이를 거부할 경우 파업에 호소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총리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정통성 있는 정권이라면 누구나 결정 사항을 권리의 위임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민주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연설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보슈 검사는 만델라를 감옥에 보내라고 요구해야 하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역할을 변명했고, 판사는 “법정은 정치 논리보다는 질서의 유지를 더 중시한다.”는 말로 자신의 난감한 입장을 표현했다. 그러나 가장 강한 자가 내세운 대의가 늘 가장 옳은 법이다. 법무부 장관의 명령에 의해 만델라의 성명서는 언론에 실리지 못했다. 그리고 반란 선동과 거주 지역 이탈에 대한 죄목으로 5년의 형을 선고받는다. 형을 선고받은 만델라와 월터 시술루 등은 형무소가 있는 로벤 아일랜드로 이송되었다.
로벤 아일랜드에 온 지 수개월이 지났을 무렵, 만델라는 복도에서 ‘국민의 창’에서 활동하던 ‘하사관’과 마주쳤다. 그것은 비밀 군사조직의 활동이 경찰에 알려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만델라는 이때 선고받은 5년의 형량 중 9개월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5년형을 다 치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와 석방령 사이에 교수대가 서 있었던 것이다. 1963년 10월, 넬슨 만델라는 다시 프리토리아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석 달 동안 ‘리보니아 재판’으로 기억될 역사적인 재판이 열렸다. 재판 기간 동안 검찰은 174명의 증인을 세우고 수천 건의 문서를 제출했다. 만델라는 법률 지식과 평정심, 그리고 타고난 위엄으로 무장투쟁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음을 변론했다. 그리고 교수형에 처해질 경우에 대비해 밧줄 고리 매듭처럼 만든 종이에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이 나라의 수많은 애국자들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피를 흘렸다. 그것은 바로 문명의 기준에 따라 대우해 달라는 것이다.”
1964년 6월 11일, 만델라와 월터 시술루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다시 로벤 아일랜드로 이감된다. 이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노역은 흙으로 운하를 메우는 일이었다. 수감자들은 매일 아침 5시 30분에 기상하여 두 사람씩 수갑이 채워진 채 채석장으로 끌려갔다. 간수들은 일의 속도가 떨어지면 채찍을 휘둘렀다. “바로 여기가 너희들이 죽어나갈 곳이다. 핫! 핫!” 이 말은 아프리카너들이 가축을 몰 때 쓰는 말이다. 그들은 수감자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만델라는 방어체제를 가동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해도 굴종을 뜻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간수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들을 ‘주인님(bass)’이라고 부르면 절대로 안 된다고 지시를 내렸다. 감히 그 정도로까지 불손한 언행을 할 수 없었던 몇몇 수감자들은 비방의 표현인 ‘bastard(서자)’의 첫 번째 음절 ‘bas’만을 부르며 궁지에서 빠져나갔다. 힘겨움은 외부에서도 건너왔다. 1967년 루툴리 대장의 죽음이 알려졌고, ‘국민의 창’의 분견대들이 짐바브웨의 한 지역에서 괴멸 당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몇 주 후에는 더욱 참담한 소식을 듣게 된다. 만델라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장례식에 다녀오고 싶다는 그의 요청은 거부당했다. 1969년 5월에는 ‘싸우는 여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후의 일격이 가해진다. 장남인 템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내륙에서는 나날이 투쟁이 격렬해졌다. 점점 더 많은 ‘국민의 창’ 투사들이 체포되어 섬으로 보내졌다. 투쟁 상황이 그리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만델라는 올리버 탐보에게 편지를 써서 게릴라 부대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이 가슴만 뜨겁고 무지한 젊은 투사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월터 시술루는 그들에게 국민회의의 역사를 가르쳤고, 인도 회의의 지도자는 인도 공동체의 투쟁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만델라는 정치 ․ 경제 ․ 인문 교육을 맡았다. 그는 항소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법률 조언도 해주었다. 물론 과거 탐보 사무소에서라면 30분 이상 걸리지 않을 상담이 섬에서는 1년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할 수 있었다. 비록 몸은 갇혀 있었지만 그들은 끈끈한 형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온갖 잡다한 동맹체들이 함께 하다 보니 분쟁이 없을 수 없고, 이제 더 이상 할 얘기도 바닥난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똘똘 뭉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만델라가 있었다.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가운데 미래에 일어날 격동을 암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76년 6월, 소웨토 학생들의 유혈폭동이 발생한 것이다. 정부가 흑인 학교에서 아프리칸스 교육을 의무화하려고 하자,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몰려들면서 경찰의 발포에 의한 참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위니도 국내 안전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다. 그런데 소웨토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흑인의식운동의 창시자인 스티브 비코가 암살됨으로써 다시 한 번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다. 미국의 부통령 먼데일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해 경고했고, 유엔은 역사상 처음으로 무기 통상금지령을 내렸다. 이제 서방이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1979년 만델라가 네루 인권상을 수상하게 됨으로써 더욱 분명해진다.
제4막 프로스페로
「1980년 3월, 〈요하네스버그 선데이 포스트〉의 표제에 “만델라를 석방하시오!”라는 구호가 실리고 그 청원에 대한 대규모 공공 토론이 열렸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만델라에게 크라이스키 인권상이 수여되고, 1983년에는 유네스코 시몬 볼리바 국제상이 수여된다. 이렇게 넬슨 만델라가 현대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로 전 세계인의 가슴에 각인되기 시작하면서 그는 현재로 돌아와 지금의 나이를 먹는다. 1982년 3월 31일, 넬슨 만델라와 월터 시술루 등의 주요 지도자들은 프리토리아 감옥으로 이감 통보를 받는다. 로벤 아일랜드에 수감된 지 18년 만이었다. 하지만 조국은 혼란스럽고 내란이 벌어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제 만델라는 프로스페로(Prospero)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셰익스피어의 『태풍(Tempest)』에서 마법의 섬을 황폐화하려는 칼리반(Caliban)을 무찌른 마법의 왕자처럼, 만델라는 위대한 정치가로서의 타고난 자질과 마법을 사용하여 민족을 어둠으로부터 구해낸다.」
만델라의 인기가 올라가는 만큼 외국으로부터 점차 고립되어 가고 있는 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나라는 국민당의 피터르 빌렘 보타가 총리로 집권하면서 더욱 광폭한 탄압을 가하게 된다. 보타는 쾨베트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국가안전회의를 몸소 주재하여 탄압을 지휘했다. 또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집단적인 정신착란을 불러왔다. 마마셀라는 흑인 경찰관이 흑인 젊은이들을 꼬드겨 게릴라 훈련에 참가하게 만들었는데, 그들에게 죔나사를 풀면 바로 터지도록 특수 제조된 수류탄을 제공했다. 너무나 순진하게도 이 악당을 친구들에게 소개한 젊은 여성 투쟁가는 배신자로 의심받았고, 끔찍한 ‘목걸이’ 고문을 당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문제는 목에 끼운 타이어에 불을 붙이는 이 야만적인 고문이 흑인들 사이에서 상용화되었다는 점이다. 아프리카 국민회의도 82명의 요원들을 외국의 주둔지에서 약식으로 숙청했다. 그 결과 “탄압을 받는 사람들도 압제자들보다 나을 바가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경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총을 맞고 살해된 시신에 불을 붙여 놓고 그 옆에서 식사를 했다. 아직 타지 않은 살덩어리들을 여러 차례 뒤집어주면서 말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경찰국가로 변해 있었다. 수만 명이 체포되었고, 테러의 물결은 무시무시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내란이 확산되는 가운데 1984년 데스몬드 투투가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이제 보타로서는 입장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부 관료들이 두 차례에 걸쳐 은밀히 만델라를 방문했다. 만델라는 그들에게 정치적 답변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하여 1985년 2월 10일, 만델라의 답변이 소웨토 경기장을 가득 메운 인파 앞에서 딸 찐지에 의해 낭독되었다.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고아 취급을 받아 온 어린 소녀의 감동적인 목소리를 타고, 20여 년 동안 침묵해야 했던 만델라의 말이 흘러나왔다. 만델라는 체제의 저항가들이 무장투쟁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경위를 피력하고, 아파르트헤이트 해체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아프리카인들에게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인파가 모두 일어났고 아프리카 찬가 ‘Nkosi Sikekel’i Africa’가 울려 퍼졌다.
고집스러운 총리 피터르 빌렘 보타는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만델라가 평화협상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고 발표하고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정권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을 사살했다. 혼란이 계속되면서 사망자가 700명을 넘어섰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긴급사태가 선포되었다. 하지만 사업가들은 혼란을 좋아하지 않는다. 1985년 가을, 일련의 사업가들이 정부에 협상을 촉구하고, 수감 중인 올리버 탐보와 아프리카 국민회의 지도부를 방문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영연방 회원국들이 만델라에게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 예순여섯 살의 만델라는 전립선 수술을 받았다. 그가 수술을 받고 폴스모어 감옥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 대한 처우도 확연하게 달라졌다. 그들이 협상을 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만델라는 정부가 제공한 양복을 입고 사절단을 맞았다. 사절단은 양복이 잘 어울리는 이 멋진 죄수가 공산주의자인지 폭력주의자인지를 알고 싶어했다. 이 두 가지 여부가 마가렛 대처나 로널드 레이건이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제재 조치를 거부했던 이유였기 때문이다. 영연방의 사절단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성과를 냈지만, 넉 달 후, 남아프리카 군대는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후방 기지들에 일련의 급습을 시도한다. 보타는 쇄국을 바란 것일까? 아니면 극단주의자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던 것일까?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아프리카 국민회의 또한 강경하게 대항했다. 만델라는 고민에 빠졌지만 곧 비난의 위험을 감수하고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만델라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 시기가 그에게는 평생 가장 곤란했던 시기였다고 한다. 순진하게도 정권을 군사적으로 전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많은 사람들은 만델라가 협상을 진행하자 그를 배신자로 의심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보다 큰 통합을 위해 고립을 자처했고, 폭력의 포기에 대한 백인들의 선결 조건을 얻어냈다.
1988년 7월, 만델라의 70회 생일이 화젯거리가 되면서 기념 축전이 쇄도했다. 런던의 BBC는 평화협상을 이끈 만델라를 기리기 위해 대규모 록 콘서트를 조직해서 대처의 큰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온갖 명예를 얻은 만델라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위니가 ‘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서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녀가 후원하는 ‘만델라 축구 클럽’이라는 단체는 ‘배신자들’을 처형하는 불량청년들의 도당에 불과했다. 이 무렵 오랜 시간에 걸친 협상으로 과로한 만델라는 폐에 물이 차 응급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 돌아온 그에게 수감자 구역과는 꽤 떨어진 별장이 제공되었다. 위니는 만델라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 받았지만 그녀는 다른 죄수의 부인들이 이러한 특권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한 오래 머물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것이 정말 유일한 이유였을까?
1989년 7월 5일, 보타 대통령은 국민당 당수의 자리를 프레데릭 빌렘 데 클레르크에게 양위했다. 그는 변화를 필요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 경험주의자였다. 그는 벙커에서 자살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만델라는 그에게 접견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얼마 후 데 클레르크는 아프리카 국민회의 참모진을 한꺼번에 석방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얼마 후 가증스러운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면서, 해변가에서 극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공장소가 모든 인종에게 개방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1990년 2월 2일, 데 클레르크는 ‘건국의 아버지’들을 무덤 속에서 뒤척이게 할 만한 역사적인 담화문을 발표한다. 그는 아프리카 국민회의, 범아프리카회의, 공산당 등, 31개의 불법적인 조직들에 대해 내려진 금지령을 철회하고, 사상범의 석방을 선포했다.
1990년 2월 11일, 무려 27년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 있었던 영웅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 72세의 지도자가 군중의 한가운데 서서 오른 주먹을 번쩍 들어 올리자 함성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직 만델라-프로스페로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여러 집단으로 나뉜 아프리카 공동체는 각기 나름대로 복수를 꿈꾸고 있었고 분열되어 있었다. 줄루족은 부텔레지 족장과 함께 아프리카 국민회의로부터 먼발치에 떨어져 있었고, 경찰과 군대에 몸담은 흑인들도 수천 명에 이르렀다. 어떻게 하면 30년 전 알제리 독립을 훼손시킨 하르키 학살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만델라는 그가 「자유헌장」에서 그려낸 이상적인 조국의 이미지를 널리 구현해야 했다. 특히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행한 청년주의를 답습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만델라는 또 다른 인종주의가 탄생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석방 직후부터 6개월 동안 만델라는 대부분의 시간을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보냈다. 새로이 탄생한 남아프리카를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함이었다. 그에게서 젊은 날의 거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모든 이에게 미소 지었고, 천부적인 매력과 유머감각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했다. 어디를 가도 이 자유의 순례자는 숭배자들을 갖게 된 듯했고, 《타임》은 그를 무덤에서 빠져나온 영웅으로 그려냈다.
1991년 7월 2일, 만델라는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당수로 선출되면서 언제나 변함없이 가져왔던 목표를 수행하기로 다짐했다. 그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아파르트헤이트를 버리는 사람은 누구나 1인 1표의 원칙에 근거해서 민주남아프리카공화국 건설을 위한 투표를 행사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국민당이 ‘1인 1표’안에 거부했다. 국민당은 부족장들을 조종함으로써 여전히 권력의 끈을 붙잡고자 했다. 협상은 난관에 부딪혔고 만델라와 데 클레르크의 관계도 험악해졌다. 또 다시 분열이 초래되었고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수천 명의 사람이 사망했다. 해외에서는 최악의 사태를 예견했고, 런던에서는 35만 명에 이르는 영국인들을 대피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들이 점친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아프리카 총회가 소집된 것이다.
1993년 민주 남아프리카를 위한 공회(CEDESA)에 24개 조직의 대표들이 모였다. 하지만 여전히 군사적인 승리를 꿈꾸는 사람들은 만델라의 ‘온건함’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온건함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면 엄청난 단호함을 동반했다. 개혁은 멋진 일이지만 국가를 한꺼번에 바꾸는 것은 파국으로 치닫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것을 잘 알았던 만델라는 밀고 당기는 협상을 통해 아프리카너들로부터 무장해제를 약속 받았고, 줄루족에게는 그들의 정당(IDF)에서 대선 후보자를 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국민당과는 일정기간 동안 권력을 공유하기로 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의 공무원들은 그대로 자리를 유지하게 될 것이며, 군인과 경찰들에게는 사면령이 내려질 것이었다. 그리고 1993년, 넬슨 만델라는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와 함께 이러한 모든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제5막 넬슨 왕
1994년 4월 27일,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킨 민주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모든 인종의 남성과 여성이 참여하는 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 5월 10일, 전 세계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프리토리아의 거대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면서 예의 그 거부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백인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단 한 사람도 해고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과 가족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는 이 친절한 노신사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가 자신의 비망록에서도 언급했듯이, 만델라는 자신과 접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이 재능이 바로 카리스마라고 불리는 자질이다. 그는 특히 중대한 일에서 이 능력을 잘 발휘했다.
아부의 물결이 도처에서 밀려오는데도 만델라가 진정한 민주주의자로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영웅적인 면모이다. 우리는 수카르노부터 카스트로까지 위대한 혁명가들이 절대 권력의 달콤한 묘약을 마시는 것을 보아왔다. 하지만 만델라는 과거의 적수에 대해서도 선입견 없는 검토로 인사를 단행했다. 국민당과의 합의문에 따라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가 제2부통령이 되었고, 제1부통령은 아프리카 국민회의를 이끌었던 외교관이자 경제학자였던 나보 음베키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다인종국가 의회의 의장은 훌륭한 재능을 갖춘 여성 변호사인 프린 진왈라가 되었다. 의회는 사형 제도를 폐지했고,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이끌었던 아프리카너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보장도 승인했다. 또한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초기 결정 가운데 두 가지에 대해 불신임 결의를 할 정도로 아주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임 대통령은 아프리카인들의 화해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는 자신을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가둔 장본인인 옛 대통령 피터르 빌렘 보타를 방문하고, 자신을 교수형에 처하려 했던 검사 퍼시 유타를 식사에 초대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만델라의 정치적 전략이라고 평가하지만, 여하튼 만델라는 용서를 통해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모두에게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만델라의 관대함은 복수의 가장 미묘한 형태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노동력을 헐값으로 이용한 예전의 부유한 인종주의자들에게 점잖게 벌금을 물리는 데 각별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정한 화해는 한 개인의 선의에 의해서만 좌우될 수는 없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서 일어난 범죄는 너무나 많고 잔학해서 독일인들이 나치를 청산했듯 그 범죄를 정리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새롭게 탄생한 남아프리카는 용서와 관용에 기반을 둔 과거 청산으로 전 세계에 평화와 상생의 메시지를 전파하게 된다. 만델라는 법학 교수인 카데르 이스말의 제안을 받아들여, ‘국민 통합의 증진과 화해를 위한 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것은 인권의 유린이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사면을 요청할 수 있도록 규정하되, 단 철저히 고백한다는 조건이 따르는 것이었다. 투투 대주교는 일종의 청문회라고 할 수 있는 이 공적 고백을 성공시켜 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했다. 범죄의 행위자와 희생자들의 만남은, 범죄자들에게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자각하는 기회를 제공했고, 희생자들 특히 수많은 사형수들의 부모들에게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마침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78세 생일을 맞은 넬슨 만델라는 무대 위의 조연에 불과한 듯 행동했다. 그는 임기가 끝나가자 부통령인 음베키로 하여금 국무회의를 주재하게 하고 여러 당면문제들과 방문객들을 떠넘겼다.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넬슨 만델라가 감옥에서 꿈꾸었던 법치국가는 깊이 뿌리를 내려 이제 독재정치나 쿠데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제도는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언론은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모든 종교들은 조화를 이루며 공존했고 에이즈를 퇴치하기 위한 진지한 싸움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백인과 흑인 학생들에게 할애되는 공교육 자금도 10대 1에서 5대 1로 그 간극이 좁혀졌고, 문맹률도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사형제도는 폐지되었으며, 동성애의 권리가 인정되었다. 900만 명의 시민들이 식수를 공급받게 되었고, 3, 4백만에 이르는 흑인 증산층은 세계 경제에 이 나라가 편입되었음을 입증시켰다.
퇴임이 가까워오면서 만델라는 회고록 제2권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직무와 위신 때문에 침묵해야 했던 문제에 대해 드디어 자유롭게 말하는 기쁨을 얻은 듯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라크 문제에 대해 중재의 노력을 계속했다. 미국이 유엔을 경시하는 태도를 드러내 보이는 것에 충격을 받은 그는 조지 부시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며 비난했다. 또한 독재 지배하의 나이지리아를 비판했고, 민주주의를 향한 진전을 거부하고 있는 스와질란드와 잠비아에 대한 제재를 제안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백인에 대한 정책이 자신의 나라와는 정반대인 이웃 나라의 무가베 정권에 대해서는 어떠한 원조도 거부했다. 그리고 불행히도 실패했지만 콩고 강 하구에 내린 남아프리카 전함의 선상에서 모부투-카빌라 간의 회담을 주선해 자이레르의 파산을 최소화하려 하기도 했다.
1999년 대통령의 지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만델라는 에이즈, 아동 인권, 아프리카 기아 등 전 지구적인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만델라를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들은 일종의 수호신처럼 여긴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즉 냉장고에 부착하는 자석, 컵받침, 시계 등에 만델라의 초상을 새겨놓고 그를 기린다. 그의 85세 생일날, 대기업들은 남아프리카 대로를 따라 늘어선 그들의 광고 게시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사람들이 시내의 두 곳을 연결하는 ‘넬슨 만델라 다리’ 준공식을 거행했다. 신이 그에게 90세까지의 삶을 허락하신다면, 사람들은 그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또 무엇인가를 기획할 것이다. “내가 가야 할 머나먼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감히 꾸물거릴 틈이 없다.”라고 만델라 스스로 고백한 바와 같이 89세의 생일을 지낸 지금도 그는 계속해서 세상을 뛰어다니고 있다. 강제노역으로 햇빛에 손상된 눈과 절름거리는 다리의 병도 잊은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