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25-5번지, 명성황후의 생가지 우측 쪽문을 나와 300m 쯤 되는 곳,
야트막한 산기슭에 임사홍과 그의 부인인 정경부인(효령대군의 손녀) 전주이씨의 합장묘가 있다.
임사홍(任士洪,1445~1506)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인이자 외척, 사상가, 성리학자이다.
음서로 출사한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1465년(세조11) 알성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요직에 발탁되었다.
글씨도 자타가 인정하는 당대 최고였던 그는 월산대군신도비"를 비롯해 서거정의 묘비명, 박중선의 묘비문,
노사신의 신도비명, 한확의 묘비명, 등을 썼다.
그 뿐만이 아니고 한학과 중국어에 능통 했으며 일본어, 여진어 등도 구사 했다.
이렇듯 좋은 머리로 예문관부제학, 승정원 우승지,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부와 권세를 누렸던 그를,
왜 역사는 조선의 3대 간신 중의 한사람이라고 했을까?
임사홍의 묘이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황폐하다. <모든 사진들은 크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500여 년간 묘비도 없이 방치되다시피 했던 임사홍의 묘는 그나마 1997년 후손들이 묘비를 세워 이 정도다.
비에는
"정헌대부 이조판서 풍천임공 휘 사홍, 정경부인 효령대군 손녀 전주이씨, 지묘". 이렇게 새겨 있다.
임사홍의 무덤 앞에 옛 석물은 문인석 한 쌍이 있을 뿐이다
임사홍이 간신으로 치부되게 된것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사건을 발설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잔인한
갑자사화(1504,연산10)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인데 본인에게는 좀 억울한 면도 있다.
어쨌거나 바로 잡기에는 세월이 너무 흘렀다.
임사홍은 요즘 말로 하자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 났다.
명문가 출신으로 용모도 준수하고 똑똑해서 과거도 급제 한데다, 외국어도 잘하고 글씨까지 잘 쓰는데
마누라까지 왕족으로 얻어 임금의 총애까지 받고 있었으니 임사홍은 당연히 주위의 부러움과 함께 시샘도
받았을 것이다.
성종의 총애로 탄탄대로를 걷던 반듯한 임사홍을 주위에선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정승이라도 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왕비 윤씨를 폐하려 할때도 적극 반대하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사건이 일어 났으니, "1478년(성종9) 4월 초에 발생한 흙비"사건이다.
흙비"란 지금의 황사비를 말하는데
황사비가 내리자 삼사 관리들은 흙비가 내리는 것은 하늘의 경고이니 근신하며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할 때
임사홍은 흙비는 자연 재해일 뿐이니 자연 소멸될 것이고
금주령을 내린다해도 고관대작들은 지키지 않을 것이고 백성들만 피해를 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해 임사홍은 대간들의 집중 공격을 받아 무려 12년 간이나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큰 잘못없이 긴세월 귀양살이를 하던 임사홍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귀양지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절치부심하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연산군의 등장으로 정계로 돌아온 그는. 갑자사화를 통해 정적들을 철저하게 응징했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 중종반정으로 생을 마감한 그는 자신이 했던 것처럼 부관참시까지 당했고,
간신이란 오명을 썼다.
임사홍의 묘 옆에 있는 임사홍 부모의 묘역, 위의 봉분이 임사홍 모의 묘이고 아래 봉분이 임사홍 부의 묘.
임사홍의 부, 임원준의 묘이다.
임원준의 묘 앞 상석(높이 31cm, 가로 184cm, 세로 111cm)에는 운문이 새겨 있다.
임원준의 묘 앞 좌우에는 무인석이 있는데 그 중 우측의 무인석이다.
무인석은 높이가 263cm, 폭이 107cm, 두께가 85cm나 되는 육중한 몸집의 무인석으로 양손을 갑옷의 소매
속에 넣고 있다. 투구를 쓰고 있는 무인석의 얼굴의 윤곽선이뚜렸하고 카이젤 수염을 기르고 있어
호인(胡人)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임사홍의 묘 인근에 있는 그의 아들 임숭재와 며느리인 성종의 딸 휘숙옹주의 합장묘.
이 무덤도 임원준의 묘처럼 5각의 호석을 둘렀다.
임숭재,
처용무를 잘 춰 연산군을 기쁘게 했고, 아버지인 임사홍과 함께 채홍사가 되어 조선 팔도에서 미인을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일을 했던 그는, 부인과 이복 누이까지 연산군에게 바쳤다고 했다.
1505년 그가 죽을때" 연산군에게 한 말은,
여한은 없으나 오직 전하께 미인을 더 이상 바치지 못하게 된 것이 한이라고 했다던가"
임숭재가 죽은 후 연산군은 그의 입에 쇠구슬을 넣으라고 했다고....헐,
그 입 영원히 다물라.
휘숙옹주지묘, 숭덕대부풍원위임공지묘"라고 새겨져 있는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