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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쓰는인생(44) 다윗이 남겨둔 사람들(2) 삼하 15:30-32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다윗답지 않은 퇴각을 명령합니다.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백전노장 다윗이 이리도 서둘러 성을 버리는 퇴각을 명령한 까닭은 피아식별의 어려움, 예루살렘을 전쟁터로 만들기 싫었던 것도 있지만, 결국, 아들과의 싸움이기에, 질 수밖에 없고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을 확인합니다. 다윗은 자기를 반역한 아들이요, 자기 첫째 아들을 살해한 압살롬임에도 압살롬을 누구보다 사랑한 까닭이지요? 나중에 압살롬이 죽었을 때, 요압이 이런 말을 합니다.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삼하19:5-6)
가족이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아들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바꾸어도 좋았던 것이었음을 아니 ‘나를 포함한 온 백성이 다 죽어도 압살롬이 살 수 있으면’ 하는 마음이 오늘 다윗의 아비된 자로서의 마음이었던 것을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족됨, 하일교회의 권속됨이 이렇게 지독한 사랑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내 가족 살리기 위해 저들을 다 죽이는 사랑이 아니라, 저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죽는, 압살롬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다윗의 사랑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한 중요한 퇴각의 순간에 모든 신하들이 함께 하는 자리에 왠일인지 다윗이 사람들을 남겨둡니다. 끝까지 결사항쟁의 의무를 맡겼는지 모르겠지만, 그 역시 자신은 퇴각하면서 남겨두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우리나라도 어떤 대통령이 625때 자기도 서울에 있다고 북한군에게 서울을 내주지 않는다고 요동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안심하라 해놓고 한강다리를 끊고 서울 1호 피난민이 되신 일이 있습니다. 설마 다윗이 그렇게 하진 않았겠지 마음을 쓸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후궁 열 명을 남겨두는 다윗을 통해서는 어떤 말씀을 드렸지요? 가족이 어렵고 힘든 순간이라고 해서, 짐스럽고 탐탁치 않아 거추장스럽고 불편해서 떼어놓는 것은 아니될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조심스럽습니다. 막상 상황이 닥치면, 제자들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제자들도 십자가 밑을 떠났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저도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변할지 어떻게 타협하고 합리화할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것이지요? 어떤 상황에서든 믿음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양들을 지키는 목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 지금 말씀을 전하는 자로 품은 마음 가짐이 그 때도 변함 없기를 간구할 뿐입니다. 그런 상황이 닥치지 않도록 늘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더라도 어느 순간 이러한 경우가 생기면, 여러분, 분명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늘 기억하며 끝까지 지킬 수 있는 복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또하나의 가족은, 벧메르학을 넘어서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을 넘어서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할만큼 최선을 다했다고 하며 돌아서는 이들이 아니라, 끝까지 영광의 자리에도 고통의 자리에도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족인 것이지요? 다윗과 산전수전을 함께 했던 신하들은 벧메르학을 넘습니다. 이미 그들의 생명은 오래전부터 하나님과 다윗의 손에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기뻐하고 영접했으나, 그들의 동행은 벧메르학까지 였던 것이지요? 그 길을 블레셋 출신의 이방사람들이 넘습니다. 한번 국경을 넘었던 사람이었던 까닭일까요? 다윗과 함께 벧메르학을 넘는 일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함께 사선을 넘어본 사람들, 그래서 전우애가 뜨거운 것이고, 여러분, 이게 가족, 진짜 가족입니다. 어떤 곳이든 함께 가지 못할 곳이 없는 사람들, 내 생명을 내 운명을 이미 저 사람과 함께 한 사람들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가족입니다.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가기로 한 사람들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걸음에 하나님께서 더욱 복을 주시고 은혜 베푸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의 띠로 더욱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며 함께 걷는 복된 우리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제 두 번째로 다윗이 남겨두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제사장들은 다윗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고 다윗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독을 비롯한 제사장들은 당연히 언약궤를 메고 다윗을 따르려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오늘 제사장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을 명합니다.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삼하15:24-25)
사독과 제사장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오직 다윗만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면서 다윗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조언할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내가 가는 길에 하나님을 모시고 가는 것은 정 반대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가시는 길에 다윗이 따라가야지, 다윗의 피난 길을 위해 하나님을 모시고 가며, 하나님을 이용해 나의 편의와 안전을 챙기는 일은 다윗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번 피난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징계는 반드시 끝이 있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징계가 끝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시는 긍휼을 허락해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유격이라든지 공수훈련을 받을 때 장교들도 부사관들도 전부 다 계급장을 떼고 번호만 받고 훈련을 받습니다. 왜요? 계급장이 붙어있으면 아무래도 다른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의 지시와 명령이 달갑게 느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급장을 떼고 사병들과 똑같이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이번 피난길에 오늘 다윗이 보여주는 모습이 이것입니다. 왕의 자격으로 피난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일개 죄인으로 피난을 가는 것입니다. 이번일로 누가 어떤 비난과 욕을 하더라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달게 받음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되찾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떠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왕노릇을 하려고 했던 사울과 달리, 오늘 다윗은 철저한 죄인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다윗은 회복을 소원하는 동시에 이렇게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삼하15:26)
다윗은 피난을 가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떠납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금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법궤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시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끝끝내 나를 다시금 돌아오게 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보인 “그리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다윗은 다시 왕이 되지 못하고 이대로 그의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해도 하나님의 손에 맡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지키시고 돌보시며 함께 하신 그 생애는 오직 감사할 뿐이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 고백이 우리에게 있으십니까? 하나님께 맡기고 난 모든 일의 결과를, 그것이 무엇이든 감사함으로 받는 믿음 말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풀무불 앞에선 세 친구의 고백을 이 시간 함께 한번 더 읽어보시겠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
이제 마지막으로 다윗이 남겨두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다윗의 친구”라고 성경이 소개하는 아렉사람 후새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삼하15:32)
이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던 때 였습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했습니까? 31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15:31)
다윗이 죄인이 되어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는 길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붙었다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일전에 살펴보신 것과 같이 어마어마한 전략가였던 것이지요? 오늘 압살롬에게 아히도벨이 참모가 되면, 법궤도 되돌려보낸 마당에 오늘 다윗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악한 계획, 악한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길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시험을 당했을 때, 아니, 시험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늘 항상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라고 기도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우리를 해하려고 하는 악한 자의 계획을 틀어버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 자기들끼리 다툰다든지, 다른 대적들이 쳐들어온다든지, 갑자기 질병이나 재해로 그 일을 진행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기도에는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기도의 응답이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기도할 때, 혹은 기도하는 전후로 내게 보내주시는 사람들을 더욱 잘 대해주시길 바랍니다. 꼭 그럴 때 전화하거나 찾아오는 사람들,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를 통해 하나님이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기도하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르렀을즈음 아렉사람 후새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히 응답하시는 것은 그만큼 다윗을 사랑하신다는 뜻이요, 또한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후새를 보내주심과 동시에 지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그러나 네가 만일 성읍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전에는 내가 왕의 아버지의 종이었더니 이제는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삼하15:33-34)
압살롬의 반란의 허점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압살롬 역시 피아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확실한 자기의 사람만을 가지고 일을 해야하는데, 오늘 압살롬도 손쉽게 예루살렘을 차지한 반역의 성공, 아버지에 대한 승리의 기쁨이 너무 컸던 나머지, 오늘 후새를 향한 의심을 거두고 자기 사람으로 세웠던 것이지요? 아버지의 사람, 아히도벨을 넘어 후새까지 내 사람으로 만들면 백성들이 더욱 나를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죽을 수밖에 없는 아히도벨의 모략에서 그를 살린 것은 오늘 후새의 지혜였습니다. 오늘 후새가 없었더라면 다윗은 그 밤, 그 나루터를 넘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일이 얼마나 긴박하게 진행이 되는지요? 본문 마지막절을 한번 보십시오. 후새와 압살롬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간발의 차로 후새가 먼저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고 기록하는 것이지요?
“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읍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삼하15:37)
헤브론에서 올라올라면 한참 걸리겠지 하면서 천천히 성으로 돌아갔더라면, 압살롬보다 한발자국이라도 늦었다면, 압살롬은 어디서 오는지 모를 후새를 받아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먼저 성안에 들어갔기에, 오늘 압살롬은 다윗이 떠날 때 따라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던 것으로 압살롬이 오해할 수 있었던 것이고, 오늘 후새의 말을 의심은 했겠으나 결국 믿고 받아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시길 원합니다. 우리의 결단과 순종에 있어서 일분 일초가 중요합니다. 악한 세력들과의 싸움은 이렇게 간발의 차로 희비가 엇갈리게 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딱 여기에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게을러서, 우리가 시간을 끌어서, 우리가 주신 명령과 말씀에 늦게 순종해서 일을 그르쳐온 것은 아닐까요? 바윗돌이나 모래알이 가라앉기가 매한가지이듯, 한시간을 늦든 1초를 늦든 늦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그렇다고 IBM, 나는 바윗돌 같은 죄를 짓고 죽겠다거나, 아예 한시간씩 늦겠다고 맘 먹으시면 안됩니다. 그 이야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아예, 죄를 짓지말고, 아예, 늦질말자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말씀 앞에, 오늘 내 생명보다 사명이 더욱 중요함을 기억하는 종이 되어서, 모든 말씀 즉각 순종하는 종이 되어서, 오늘 악한 세력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로, 일꾼으로 쓰임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내가 서있는 위치보다는 내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다윗을 따라가는 사람들과 다윗이 남겨두는 사람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그 자리에서의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따라가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남아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서있는 위치보다는 내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다음 수요일에 다시 살펴보시겠지만, 따라가면서도 시바처럼 악한 마음을 품을 수 있고, 남아서도 시므이처럼 욕을 하며 저주하는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전에 사명자의 시선과 태도를 베드로를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머물게 하신 자리, 당신을 따르게 하신 걸음, 오늘 각자 위치에 서서, 다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지 두리번 거리며 비교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절대적인 하나님의 명령에만 집중하시는 것입니다. 물 컵의 물을 쏟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서 걸었던, 그렇게 한 바퀴 돌아오는 동안, 주변에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는 한 신하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오늘도 하나님께서 옷입혀주시고 세워주신, 하나님 파송하시고 정해주시는 위치에 감사로 자리하시고, 우리의 사명, 그곳이 어디이든, 하나님의 뜻을 물어 그 뜻을 정확하게 이루어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용사, 하나님의 일꾼들이 다들 되실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가는 길에 하나님을 따라오시도록 만드는, 내 길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계신 곳에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하는 중에 보내시는 응답 중, 사람을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의 순종은 즉각적인 것, 민첩하고 주밀한 것이 되게 하여 주사,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게으름으로 우리의 미적거림으로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더욱 사명으로 세워 주옵소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각각의 자리에서 생명보다 사명을 위해 사는, 우리의 생명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참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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