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방학시즌마다 학생・청소년들을 초대하는 인권캠프가 있는 편이었지만, 이번 인권캠프는 조금 남달랐다. 세 지역이 같이 뭉쳐 준비한다는 점이 그랬고, 기존 청소년인권캠프는 다른 단체들, 비청소년활동가들과 함께 준비했는데 이번 캠프는 기획 단계부터 오롯이 청소년활동가들(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캠프 준비를 도맡았다는 점이 그랬다. 여전히 돈도 없고, 사람도 부족하지만, 많은 우리들이 그랬듯 많은 학생들이 인권을 만나길 바랐다. 이 학교와 이 세상이 인권의 소리로 조금 더 시끌시끌해지길 바라며, 이번 여름 내내 우리들은 서툴지만 또 한 번의 경험을 나눴다.
씨씨씨를 뿌리고, 꼭꼭 물을 주었죠
생각보다 참가신청이 적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반 정도가 줄었던 것 같다. 캠프를 하루 앞둔 날까지도 마음이 바빴다. 예정대로라면 대부분 프로그램을 경기/서울/인천 지역별로 나누어서 진행했겠지만 결국 몇몇 프로그램은 다 같이 한 공간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드디어 캠프 당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참가자분들을 향한 막연한 기대감을 안고 인권캠프 장소인 강원도 상지대학교에 도착했다.
[사진: 우리들의 캠프에 대한 기대 씨앗들]
2박 3일 동안 만날 사람들이 누구일까, 어떤 기대를 갖고 참가하게 되었을까. 서로를 조금씩 알아보기 위해 참가자들이 모두 모여 자기소개를 진행했다. 더불어 이번 캠프에서 무엇을 심고 싶은지,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들어볼 수 있게 “기대 씨앗”을 나누었다. “인권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왔다”, “차별적 시선 지우기”, “친구들 만나기” 등의 씨앗부터 “올 여름방학 첫 외출!”이라는 깨알 같은 의미를 담은 씨앗까지. 서로의 기대 씨앗들을 나누고 미리 만들어둔 흙판에 함께 심었다.
바로 이어진 첫 번째 프로그램에서는 ‘인권’을 처음 맛보는 시간을 가졌다. 인권, 인권, 인권... 학생인권도 꽤나 익숙한 주제이고, 인권이란 말은 이제 어디서든 많이 들어본 말이라고는 하지만, 이 ‘인권’을 제대로 맛본 적은 없다는 데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인권이 뭘까? 평소 쉽게 만날 수 없는 질문에 정해진 것 같은 답을 그대로 내놓기보다는 좀 더 다양한 생각을 늘어놓을 수 있도록 <인권 마인드맵>을 해보기로 했다. 모둠별로 커다란 전지를 나누어준다. 이때 전지에는 “인권[인:꿘]” 이라는 종이가 미리 인쇄되어 붙어있다. 모둠별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권 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쭉쭉 가지를 뻗어나간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어찌 되었든 처음부터 개념을 정리하려 하기보다 떠오르는 생각을 낙서하듯 자유롭게 적으면서 전지를 가득 채워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들어봄직한 인권을 ‘정의’하는 문장들이 나온다.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는 존엄한 인간의 권리”, 평등, 자유, 평화 같은 인권과 친한 단어들도 나온다. 그러다 좀 더 가지를 뻗어나갔더니 어떤 모둠에서는 “학생인권-두발자유-학교-시험-성적표-엄마-두려움”이라는 충분히 개인적이지만 또한 사회적인 문제를 명확히 짚어내는가 하면, 어떤 모둠에서는 “용산참사-쌍차-소수자-민주주의”로 연결되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다.
이어서 진행한 <권리 카드 상상하기>는 몸을 움직이는 시간으로 준비했다. “어떤 권리”를 표현한 그림카드를 받은 참가자들은 먼저 이 그림이 무슨 권리를 표현한 것일지를 빠르게 논의한다. 정답은 없으니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권리인지에 대해 합의가 되었다면, 그 권리가 “우리와 같은 청소년에게 필요한 순간/상황은 언제일까?” 그 상황을 멈춤 장면으로 표현해보게 한다. 처음 이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기획팀에서는 의견이 많았다. 짧은 시간 안에 몸으로 장면을 표현하는 활동이 적절할까 등의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청소년들은 엄청난 친화력과 적응력을 보여주셨고, 그때만큼은 서로의 호흡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구성원도 다양해서 멈춤 장면도 들쭉날쭉 다양했지만, 그 정돈되지 않음이 오히려 어떠한 틀에 가둬질 수 없다는 점에서 인권의 한 성격을 보다 잘 알게 해주었다. 자칫 하면 억지로 끼워 맞춘 듯 재미없을 수 있지만,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로 “가장 재미있었다”는 평가를 들은 시간이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 양보할 수 없는 것,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지금 우리에겐 아직 없는 것, 쟁취해야 할 것... <인권이 뭔가요? 먹는 건가요?> 시간, 무려 세 시간 넘게 이어지고, 그 시간 동안 이 자리의 모두가 글과 몸을 통해 표현한 것들을 같이 엮어보면서 마무리했다. 구구절절 말로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갔던 것처럼, 첫째 날이 인권으로 든든하게 채워졌다.
학생인권, 맛보고, 곱씹고
인권에 대해 맛도 보고, 재미도 느꼈으니, 이젠 본격적인 학생인권에 입문할 차례! 이튿날 <<학생인권 마시쩡ㅋ>>은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알아보는 O.X퀴즈, 학교 안 지뢰 찾기(인권침해 찾기)라는 모둠별 프로그램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학생인권 곱씹어먹기>라는 이름으로 여러 이야기 손님들이 “교권-학생인권”, “미성숙”, “반차별과 소수성”, “인권일반” 등의 주제로 함께 했다.
<학교 안 지뢰 찾기>는 <인권 지도 그리기>라고 부르는 모둠 활동과 유사하다. 학생・청소년들과 인권교육을 할 때, 많은 인권교육이 그렇듯 ‘인권’을 정말 우리의 문제로 인식했는지, ‘당연하게 여겼던 여러 상황들이 과연 진짜로 당연한 것이었나?’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인권침해 사례, 그것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지를 아는 것, 그리고 그동안 터놓지 못했던 불만을 쏟아내는 시간으로서 의미를 두고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자 했다.
우선 학생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인 ‘학교’를 전지에 한바탕 그려넣는다. 이 ‘학교’는 구성원의 상황에 따라 ‘거리’, ‘가정’, ‘시설’ 등으로 바꿀 수도 있다. 각 공간에서 벌어지는 문제 상황, 아주 일상적인 것부터 커다란 이야기까지 모둠별로 포스트잇에 그 상황들을 그림 또는 글로 표현한다. 보통 <인권지도 그리기>는 이렇게 진행한 뒤 진행자의 역량과 남은 시간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리하며 마무리하는 편이지만, <지뢰찾기>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지뢰 발견→지뢰 분류→지뢰 제거’까지 이루어져야 완벽한 <지뢰찾기>라 할 수 있겠다. ‘지뢰찾기’는 문제 상황 찾기이고, ‘지뢰 분류’는 문제 상황들을 유형별로 묶어내는 작업이다. 마지막 단계인 ‘지뢰 제거’가 중요한데, 이 지뢰를 바로 없앨 수 있는지, 아니면 시간이 더 필요한지, 이 지뢰들이 어디서 어떻게 발생된 건지, 못된 개인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인지 아닌지,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나가면 좋을지 그 과정에서 벌어질 여러 관계의 문제, 사회의 문제 등등을 보다 깊게 머리를 맞대고 쑥덕댈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뢰찾기> 활동을 진행하면서 ‘제거’ 단계까지 온전하게 가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번 캠프 때도 모둠별로 찾은 지뢰들이 빼곡히 적힌 전지를 서로 돌려보면서 다른 모둠이 찾은 지뢰에 대해 어떻게 제거하면 좋을지, 어떻게 없애거나 바꿀 수 있을지 이야기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방식의 문제도 있다고 느낀다. 지뢰 발견, 분류, 제거까지 모두 다 무언가를 쓰고, 붙이고, 적어내고... 활동 자체가 집중력을 요구하기도 하고, 여러 단계를 거쳐 차근차근 쌓아가야 할 이야기를 한꺼번에 풀어놓아야 하는 방식의 한계 또한 존재한다.
[사진: 학교 안 곳곳이 지뢰로 가득~ 어떻게 이 지뢰를 제거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당장 제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지뢰를 찾는 일 자체가 주는 ‘들뜸’이 있는 듯하다. 한 번도 제대로 토해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 그 이야기들이 그저 수많은 고달픔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에서 오는 갈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권교육은 그 갈증과 불만, 갈등, 외로움 같은 것들을 인권의 언어로 엮어내면서 다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이번 시간을 거치며,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모둠 활동 방식, 방법, 프로그램 등에 대해 보다 자세한 그림을 그려나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숨 가쁘게, 급하게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골라가며, 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참여자들과의 마주침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다른 청소년활동가들도 비슷한 것들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열매 맺고, 열매가 다시 씨앗으로
“선생님, 이건 억압이에요!” 당돌한 말에 어느 지역아동센터의 교사는 당황하고 말았다. 인권캠프에 다녀온 한 청소년이 휴대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내뱉은 반응이었다. 웃음이 나오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이야기되었지만, 이런 것들이 하나의 ‘열매’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건 억압이에요!”라고 외친 이 학생은 싫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그냥 던진 말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외침’ 자체가 소중한 열매라는 것이다. 첫날 심은 씨앗이 2박 3일이 지나고 맺은 열매인 것이다. “이렇게 자유로운 캠프는 처음이었다. 기뻤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며 좋은 이야기를 들어서 행복했다.”는 학생부터 “늘 안주해오고 침묵해오던 내가 부끄럽고 이제 나의 권리를 이야기할 용기가 생긴다.”고 말한 학생까지 아주 근사한 소감들이 서로에게 다시 씨앗이 되었다. 이 씨앗의 싹을 다시 어떻게 틔울 지, 어떻게 맛있는 인권을 만들어낼지, 다시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손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