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1432030310
사마, 과거, 과목
세종 14년(1432) 3월 3일 임술, 실행한 사람의 자손의 과거응시 금지에 대한 장아·권칠림 등의 상소
예문 봉교(藝文奉敎) 장아(張莪)·성균 박사(成均博士) 권칠림(權七臨)·교서랑(校書郞) 이종의(李從義) 등이 상서(上書)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길에 인재(人材)를 얻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고, 인재를 얻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우선 선거(選擧)에 있는 것입니다. 삼대 이전에는 여사(閭師) ·족사(族師)가 그 사람의 현능(賢能)한 것을 논평하여서 조정에 뽑아 올리면, 사도(司徒) ·사마(司馬)는 그 사람의 덕행을 고사하여 관에 벼슬을 시켰으므로, 인재가 여기에서 배출되어 흥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려와 후세에 이르러서는 향거(鄕擧)의 제도는 드디어 폐지되고 과거의 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인재의 흥성함이 비록 삼대에는 따라가지 못하나, 영웅 호걸의 선비가 그 가운데에서 많이 나온 것은 대체로 그 선택을 소중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삼대의 빈흥(賓興)의 도를 조술(祖述)하고, 한나라와 당나라의 과거 제도를 참작하여 과목(科目)을 설정(設定)해서 그 재예(才藝)를 시험하고, 삼관을 설립해서 그들의 마음과 행동과 가문(家門)의 계통을 조사하는 것은 한 시대의 과거를 새롭게 하고 한 세대의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흥해 사람 손책(孫策)은, 그의 어머니가 처음에는 사천인 이신(李莘)의 아들 이봉길(李逢吉)에게 시집갔다가 두 번째로 양인(良人)인 손흥발에게 시집가서 책을 낳았습니다. 책이 비록 봉길의 아들은 아니나, 한 여자로서 양인과 천민에게 겸해 시집갔으니, 그의 자식이 〈나라에서〉 뽑아올리는 사람으로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정유년에 성균 정록(成均正錄)이 손책을 내쫓아서 선거(選擧)를 깨끗한 것으로 하려 하였더니, 손책이 자기의 세계가 더러운 것을 돌아보지 않고 신문고(申聞鼓)를 두드려서 탄원(歎願)하였습니다. 태종께서 하늘과 땅 같은 넓으신 도량으로 응시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대체로 그것은 한때의 하교일 뿐, 만세(萬世)의 고정(固定)한 법은 아닌 것입니다. 책이 지금 또 같은 생각으로 와서 국시(國試)에 응시(應試)하고자 합니다. 신 등은 한때의 하교로 훌륭한 시대의 사림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별시위 조유지(趙由智)는 추잡하고 더러운 행동이 이미 드러난 김씨의 손자입니다. 김씨의 일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 등은 함께 의논하고 그의 이름을 녹명하지 아니하여, 그 더러운 풍속을 제거하고 삼강(三綱)을 바로잡고자 하였더니, 유지가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형제가 등과(登科)하였다는 것을 구실(口實)로 삼아 탄원서(歎願書)를 올려서 전하의 더러운 것도 포용(包容)하시는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신 등은 엎드려 하교하심을 받자와 망령되게 그의 형제가 등과하였다고 일컬은 것은 대체로 한때의 집사자의 실수일 뿐이며 또한 만세의 정법은 아닌 것입니다. 적어도 이 사람을 제거하지 않으면 부녀(婦女)의 도리(道理)를 어디에서 바로잡을 데가 없고, 부도(婦道)가 바르지 않으면 백성의 풍속과 선비의 풍습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선량(善良)하여지겠습니다. 국가에서 이 사람을 버리는 것은 구우일모(九牛一毛)를 버리는 것과 같은 작은 일일 뿐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한 사람을 상 주어서 천만 사람을 권장(勸奬)하고, 한 사람을 벌(罰)주어서 천만 사람을 징계한다. ’고 하였습니다.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함이 이 일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밝은 비침을 드리우시고 건도(乾道)와 같은 강직한 결단을 내리시어, 이 두 사람을 제거하여 인재를 뽑아 올리는 과거 제도를 맑게 하소서.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몸가짐을 잘못한 자의 자손은 조정에 벼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면,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스스로 경계함으로써 그 행실을 고치게 될 것이니, 선비의 풍습은 바로잡지 않아도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며, 과거는 새롭기를 꾀하지 않아도 저절로 새롭게 될 것입니다." 하니, 지신사 안숭선에게 명하여 정부(政府)와 의논하게 하였다. 황희·맹사성·권진·허조 등이 아뢰기를, "이제 삼관(三館)의 상서(上書)를 읽어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옴추리게 합니다. 윤허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55권)
○壬戌/藝文奉敎張莪、成均博士權七臨、校書郞李從義等上書曰:
爲治之道, 莫大於得人, 得人之術, 尤在於選擧。 三代而上, 閭師族師論其賢能, 而升之於朝, 司徒司馬考其德行, 而爵之於官, 人材之出, 於斯爲盛。 降及後世, 鄕擧之制遂廢, 而科擧之法乃行, 人材之盛, 雖不及於三(伐) , 而英雄豪傑之士, 多出於其中者, 蓋重其選也。 我國家祖述三代賓興之道, 斟酌漢、唐科擧之法, 設科目, 以試其才藝, 立三館, 以考其心行世系者, 所以新一代之科目, 正一代之士習也。 今興海人孫策之母, 初嫁私賤李莘之子逢吉, 再嫁良人孫興發, 乃生策。 策雖非逢吉之子, 以一婦而兼嫁良賤, 其子之不合於選擧審矣。 歲在丁酉, 成均正錄黜孫策, 以淸選擧, 策不顧世累, 撾鼓申呈, 太宗殿下, 以乾坤之量, 許令赴試, 蓋亦一時之敎, 非萬世之定法也。 策今又偕計而來, 欲赴國試, 臣等竊恐不可以一時之敎, 忝盛朝之士林也。 別侍衛趙由智, 醜穢已著金氏之孫也。 金氏之事, 人皆知之, 故臣等共議, 不錄其名, 欲其去汚俗, 而正三綱也。 由智不自忖度, 以兄弟登科, 藉口申呈, 得蒙殿下納汚之恩。 臣等伏承敎下, 妄謂其兄弟之登科, 蓋一時執事之所失, 亦非萬世之定法也。 苟不去斯人, 則婦道無自而正, 婦道不正, 則民風士習, 何由而善乎? 國家之棄此人, 正猶九牛之去一毛耳。 古人有言曰: "賞一人而千萬人勸, 罰一人而千萬人懲。" 勸善懲惡, 莫過於斯, 伏望殿下, 垂離明之照, 振乾剛之斷, 去此二人, 以淸選擧, 使人人知失身者之子孫, 不立於朝, 則人皆惕然自警, 以改其行, 士習不期正而自正, 科目不期新而自新矣。命知申事安崇善, 議于政府。 黃喜、孟思誠、權軫、許稠等以爲: "今讀三館上書, 令人竦然, 不可不允。" 從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