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칠보사 조실 석주 스님
“자비로 집을 삼고 인욕으로 옷을 삼고
항상 참회 발원하면 세상에 장애가 없습니다.”
글·사기순
서울 삼청동 하면 칠보사 조실 석주 큰스님(법납 77세, 세수 91세)의 환한 미소가 먼저 떠오른다. 이 나라 불교발전을 위해 앞장서 오시면서도 한결같이 당신 스스로를 낮추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아가시는 스님의 모습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꽃보라 휘날리는 봄날 석주 큰스님을 뵙기 위해 삼청동 칠보사를 찾았다. 경내의 우람한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먼저 반긴다. 그 드넓은 자락이 마치 석주 큰스님 같고, ‘큰법당’이라는 한글현판과 한글주련에서도 큰스님의 향기와 그 생애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법당에 참배하고 큰스님 처소에 드니 스님께서는 신문을 보고 계셨다. ‘91세에 돋보기도 쓰지 않고 신문을 보시다니…’ 기자는 세속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스님, 그 연세에 잘디 잔 신문 활자까지 보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눈은 좀 좋은 편이지요.” 지난번 범어사에서 뵈었을 때도 놀라웠는데, 특별한 건강의 비결이 있으실 듯합니다. “내가 본래 약골이에요. 늘 몸이 약해 ‘내가 환갑 넘기기 전에 죽지’ 싶어서 좋은 책은 사보지도 않았어요. 구십이 넘어 이날까지 사는 것을 보면 다 부처님 덕이지요. 부처님 시봉하면서 딴마음 안 먹고 늘 생활을 일정하게 하고 마음 편히 사는 게 비결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억지로 얘기를 하자면, 내가 ‘이 일 저 일 합네’ 하면서부터는 선방에서 정진도 제대로 못했어요. 그래 안타까운 마음에 한 삼십여 년 동안 늘 새벽예불 후에는 관음예참을 하면서 절을 하지요. 우리 스님네 생활이라는 게 담담해요. 항상 절하면서 참회하고, 염불하고, 마음속으로 화두도 챙기고, 먹는 것도 일정하게 소식(小食)을 하고…. 그래서 부처님 덕이라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더니 내가 타고난 명보다 훨씬 오래 살고 있지요.” 관음예참을 수십년 동안 해오셨는데 어떻게 하는지요? “관음예참은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참회공양하는 법을 말하는데 금강경과 함께 우리 주위에서 가장 많이 수행되고 있는 참문의 하나입니다. 세세생생 알게 모르게 지은 악업들을 조석으로 되새기며 소멸시키는 것이야말로 수행일과의 첫손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를 하면 내 업장만 녹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의 업장을 녹여 줍니다. 참회야말로 만인을 편안케 해주고 수행을 완성케 하는 지름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승본생심지관경에서 ‘참회는 번뇌의 땔감을 태우고, 천상에 태어나게 하며, 사선(四禪)의 낙을 얻고, 수명을 금강같이 늘이고, 삼계의 감옥을 벗어나게 하고, 가장 좋은 보소(寶所)에 이르게 한다’는 등의 참회의 열 가지 공덕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죄의 뿌리가 본래 없다는 언구에 홀려 참회를 소홀히 해왔는데 부끄럽습니다. “언제나 참회하고 발원하는 마음으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많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인과(因果)는 엄정합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다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여실히 보고 모든 일에 처해서 ‘내 잘못입니다.’ 진심으로 참회하고 부처님 말씀대로 살 것을 서원하면 모든 일이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스님네들도 모든 수행에 참회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스님,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동진출가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출가 인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은사이신 남전 스님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서당을 졸업하고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서울에 왔지요. 필방을 하는 친척 아저씨의 심부름으로 선학원에 자주 다니면서 남전 스님을 뵙게 되었는데, 은사스님께서는 매우 엄하면서도 다정다감한 분이셨습니다. 6년 동안 선학원에서 행자생활을 할 때 맵다 맵다 해도 그렇게 매운 시집살이가 없었을 겁니다. 새벽예불하고 공양 짓고 불 때고 손님 접대하고 온갖 일을 혼자 다했지요.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스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고 딴 궁리를 하지 않은 걸 보면 참 요령 없는 사람이에요. 평생을 그렇게 요령 없이 살았어요. 6년 행자생활 마치고 범어사로 공부하러 갔는데 강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승적이 필요하다 해서 은사스님께 편지를 올리자, ‘죄 지을 생각이 없으면 승적(僧籍)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지금 종교를 한다는 이들이 모두 형식에 그치고 있으니 심히 한탄스럽기만 하다…’라는 답장이 왔습니다. 평생 은사스님의 이 말씀을 거울삼아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형식에 그치는 중노릇은 아닌지 살피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스님께선 한암 스님, 석두 스님, 만공 스님 등 당대 빼어난 선지식들의 회상에서 수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 선방에서 수행하시면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신지요? “덕숭산 정혜사 만공 스님 회상에서 한 철 날 때, 효봉 스님이 입승을 보았는데 아주 엄하셔서 대중 모두 어렵게 수행했지요. 효봉 스님께서는 후배스님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무섭게 수행하셨어요. 칼을 턱 밑에 대고 용맹정진을 하셨는데 그 서늘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20년대 초에 출가하시어 긴 세월 동안 실로 우리 근현대 불교사의 수많은 사건들의 한복판에 서계시면서 많은 일을 해오셨는데, 특히 불교정화운동에 직접 참여하셨으니 기억이 생생하실 듯합니다. 요즘 들어 불교정화운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없지 않은데 스님께선 어떻게 보십니까? “그래도 그때 그나마 바로잡아 놓았으니 이 정도라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대처승들이 모든 실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정화가 성공하리라는 것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는데,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모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지요. 비구승들이 마음놓고 수행할 수 있는 본사급 사찰 대여섯 곳을 양도하라고 했는데 대처승들이 완강하게 거부해서 일이 크게 벌어진 것이지요. 또 온건파에서는 대처승을 포용하자고 했는데 강경파에서 받아주질 않았지요. 온건파의 의견대로 했으면 우리 불교가 더 발전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시절인연의 소치입니다.” 스님께선 척박한 풍토 속에서도 일찍이 법보원(法寶院)이라는 경전간행회를 만들어 많은 경전을 펴내시기도 했고, 동국역경원의 실질적인 경영을 맡아 한문 경전의 한글화 작업에 정성을 쏟으시어 운허 스님과 더불어 이 나라 역경사업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계신데, 역경사업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을 듯합니다. “강원에서 경전공부를 하면서 세상에 둘도 없는 부처님 말씀을 좀더 쉽게 대중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해오면서, 우리 말로 된 경전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겼지요. 또한 그 당시에 한글학회에서 활동하는 분들은 다 애국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분들이 여는 세미나에 자주 참여했고, 민족주의자들이 한글로 펴낸 동광이라는 잡지의 애독자였어요. 하지만 역경하면 운허 스님이십니다. 운허 스님께서는 몸을 바꿔 다시 태어나서도 역경을 하시겠다는 원력을 세우신 분입니다. 나는 운허 스님이 하시는 일을 옆에서 도와 열반경, 법화경, 육조단경, 선가귀감, 부모은중경, 목련경, 유마경, 승만경, 불교성전 등을 펴내서 보급하는 데 힘을 보탰을 뿐입니다. 어쨌든 많은 이들에게 쉬운 우리말로 번역된 경전을 나누어줄 때의 그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뿌듯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모두가 부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어서 실천하기를 기원하고 있지요.” 스님께서 헌신적으로 일하지 않았다면 역경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스님께서는 청소년교화연합회 초대총재도 역임하시는 등 평소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수십년을 한결같이 포교해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잘못 알고 있는 얘기라, 어린이포교는 정운문 스님이 선각자고 대중교화는 광덕 스님이 선구적으로 했습니다. 나는 선학원에서 만해 스님 시봉도 하고, 이 일 저 일 관심을 갖다 보니 포교를 꼭 해야 한다는 신조는 있었지요. 그래 운문 스님이 고마워서 나름대로 협조를 했습니다. 청소년교화연합회만 해도 운문 스님, 안병호 씨, 황해진 씨 등이 대단히 열성적으로 일했지요. 그분들이 다 불보살의 화현입니다. 안병호 씨 같은 경우 농장 팔고 이것저것 팔아서 그 당시에 3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내놓았습니다. 보통 신심 보통 원력 가지고는 어림없는 일이지요.” 스님께서는 모든 공을 다른 분들에게 다 돌리시지만 그렇듯 훌륭한 분들이 항상 스님을 모신 것만 보아도 스님의 포교열정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82년도에 불교아동문학상을 제정하시어 많은 분들에게 시상해주시는 것에서도 스님의 원력을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어린이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기 위해서는 쉽고 재미있게 읽힐 수 있는 불교동화가 많이 있어야 합니다. 어릴 때 받은 감명이 평생을 좌우하지 않습니까? 어린이포교든 청소년포교든 먼저 지도자 양성에 힘써야 합니다. 특히 교사들, 작가들에게 불심을 심어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계발해서 열심히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후학들에게 당부할 말씀은 없으신지요? “중노릇 잘하는 게 최고지요. 보통인연으로 출가하는 게 아닙니다. 삭발입산할 때의 그 초발심으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참회하고 발원하며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 잘 하라,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살아가라는 말밖에는 달리 할 얘기가 없어요.” 스님께선 20세기 초에 탄생하시어 근 한 세기 동안 정말 뜻깊은 생을 살아오셨는데, 이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부처님 말씀대로만 살면 됩니다. 불교가 다른 게 아닙니다. 일곱 부처님의 한결같은 게송처럼 ‘모든 나쁜 행을 짓지 않고 모든 좋은 행을 힘써 행하고 스스로 그 마음을 맑히면 그것이 불교’라는 그 말씀만 의지하고 살면 세세생생 걱정할 것도 없고 늘 여여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길이 부처님 말씀 속에 있기 때문에 전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내가 편안하고 세상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진리이므로 불자들은 모두 전법이라는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내가 ‘자실인의(慈室忍衣), 자안애어(慈顔愛語),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는 글귀를 즐겨 써주고 있는데 자비롭게 인욕하고 살면 세상에 장애가 없습니다. 모쪼록 부처님께 예경하고 참회하고 발원하면서 자비와 인욕을 실천하면서 살기를 기원합니다. 수행이 따로 있고 포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불자들이 그렇게 부처님 말씀 대로 살면 그대로 수행이 되고 포교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