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와 극기가 낳은 명장 김유신(金庾信)
김수로왕의 12대손인 김유신(金庾信)은 595년 진평왕 17년 충북 진천에서 서현(舒玄)장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엄격하게 혈통을 따지는 신라 귀족사회에서 위험과 고난을 자진하여 도맡은 헌신적이고 비장한 자세로 모진 고난과 풍상 속에 삼국 통일의 원훈이 된 공은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그를 따르는 낭도를 용화향도라 한다.
17세 때 고구려, 백제의 잦은 침략을 보고서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진천군 이월면에 있는 속칭 장수굴이라 불리우는 중악산 석굴에 들어가 목욕재계하고 경건하게 비법 체득을 하늘에 빌었다. 4일 만에 드디어 한 노인이 나타나 "여기는 독충과 맹수가 많은 곳인데 귀한 소년이 어찌 홀로 왔느냐" 라고하자 김유신은 "저는 신라 사람인데 나라의 원수를 보고 마음이 아파 여기와서 신(神)의 도움을 얻고자 이렇게 빌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 노인은 김유신의 인내와 정성을 칭찬하며 방술의 비결이 담긴 책과 청룡검을 주었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이 보검에 영기가 서렸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이 보검으로 바위를 갈랐다고 한다. 단석산(斷石山)이란 바로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월성군 서면 금척리 남산에 있으며, 당시 용화향도들이 화랑정신으로 심신을 수련하던 영험한 지역이라 한다. 이와 같이 비상한 수련과 고초를 딛고 우뚝 선 김유신에게는 여러 가지 일화가 많다.
어느 날 백석이란 고구려 자객이 김유신을 죽이고자 화랑의 무리 속에 끼어들어 젊은 김유신을 유인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음모를 알아차린 김유신이 기지를 발휘하여 백석을 사로잡았다. 김유신이 백석을 문초하니 백석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고구려)의 군신이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우리나라의 도사 추남(秋南)의 화신이다. 국경에 물이 거꾸로 흐르므로 왕이 그를 불러 점을 치게 하였다. 추남이 말하되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하므로 그 표정이 이와 같다 하매 대왕이 놀라 괴이히 여기고 왕비는 크게 분노하여 다시 다른 일로 시험하여 그 말이 맞지 않으면 중형에 처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왕이 왕비의 제안을 받아들여 쥐 한 마리를 함속에 감추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으니 '그것은 쥐인데 그 수가 8마리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 말이 틀린다 하여 죽이려 하니 추남이 맹세해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 대장이 되여 고구려를 멸하겠다.'고 했다. 곧 그의 목을 베고 함을 열어 쥐의 배를 가르니 새끼가 일곱 마리 있었다. 그제야 추남 말이 옳은 것을 알았다.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에서는 백석을 보내 김유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유신은 이미 화랑으로 있던 때에도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에서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나라 고종이 백제 고구려를 멸한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신라를 합병하지 못한 것을 크게 꾸짖으니 소정방이 말하기를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오나 그 왕은 영명하고 김유신 같은 충용한 장군이 있어 온 국민이 굳게 단결하여 가벼이 도모하기 어려웠습니다.' 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삼국사기」에도 전해오고 있다.
김유신은 효용이 절륜한 무인이기도 하지만 국가관과 민족관이 뚜렷하여 당나라의 영토적 집착을 단호히 물리치고 감언이설을 일축했다. 김유신은 일찍이 가풍을 형성하고 그 가훈을 엄하게 지켰으며 이를 신라 국민정신과 화랑정신으로 승화시킨 일세의 경륜가였다. 가훈을 어긴 아들 원술을 끝내 용서치 않고 부자의 연을 끊어버리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자신과 가정에 대해 엄격한 그의 성품이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됐다.
김유신은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차례로 멸하여 삼국을 통일한 후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직위를 받고 673년 78세를 일기로 타계 하였다. 김유신이 서거한 후 162년 만인 42대 흥덕왕 10년(853년)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 하였으니, 인신으로서 대왕에까지 오른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원전 : 1995년 김시우저 가락국 천오백년 잠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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