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아직 미정서된 글이지만 라디오님이 속터져 하는 것 같아 읽어보시라고 올립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머리를 묶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추모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번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百濟者大神水之義也. 百濟俗重武而不修文且多忌諱. 故久無史至近肖古王時高興始作史曰書記.
백제란 大神水(신령스러운 큰물)의 뜻이다.
백제의 풍속은 武를 중요시 하고 이로써 학문을 닦지 않고 또한 기피하고 싫어했다.
옛날부터 오랫동안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근초고왕 때 고흥이 비로소 역사를 기록하였고 書記라고 부른다.
참고문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 기사
고기(古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백제는 나라를 창건한 이래 문자로 일[事]을 기록함이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
1. 優臺王(우대왕)
北夫餘解夫婁王之庶孫也. 解夫婁王以日神降靈之後布德北方天下泰平, 分遣王子于列國以監民疾苦
북부여 해부루왕의 서손이다, 해부루왕이 태양신이 강령한 후 덕을 베풀어 북방 천하가 태평하게 되었다. 왕자를 나누어 열국으로 보내어 백성들이 병들고 고통에 빠져있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 여기서 태양신은 해모수인지 고두막한인지 알 수 없으므로 태양신이라고 했다.
소서노도 태양의 자손으로 나오는 구절이 확인되므로 원문그대로 해석을 하자.
時卒本太守延陀勃有女曰召西奴甚美, 優台聞之請往卒本, 王以優台母徵不許, 優台乃私行至卒本與山西奴相通, 延陀勃以王不許欲禁之乃相逃避太伯山谷沸流川上(今白頭山?河)
이 때 졸본태수 연타발에게는 딸이 있는데 소서노라고 하며 대단히 아름다웠다.
우태가 그 소리를 듣고 졸본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해부루)왕이 우태의 모를 불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우태는 사사로이 졸본에 가서 산에서 소서노 더불어 정을 통하였다.
연타발은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결혼을 금지하고 허락치 아니하니, 둘은 이내 태백산 골짜기 비류천 위로(지금 백두산?하) 도피를 하였다.
= ‘山西奴’는 ‘召西奴’의 남당 박창화 선생님의 오기로 추정
祀河神而生子曰沸流. 延陀勃聞之使人迎皈遂以卒本之地皈之, 時漢元年初元二年甲戌歲也.
하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비류라 하였다.
연타발이 그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졸본의 땅에 맞이하였다.
때는 한 효원제 초원 2년(B.C.47) 갑술년이다.
=여기서 남당 박창화님의 오기가 발견됩니다. 해석은 제대로 된 것입니다.
時解夫婁王太子金蛙立. 卽優台之父也. 命優台王于卒本.
이 해에 해부루왕 태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즉, 우태의 아버지다.
우태에게 명하여 졸본의 왕노릇을 하게 하였다.
元年甲戌五月立召西奴爲妃
원년(B.C.47) 갑술 5월 소서노를 왕비로 삼았다.
立東明廟於沸流川
동명묘(사당)을 비류천에 세웠다.
四年丁丑三月次子溫祚生
4년(B.C.44) 정축 3월 둘째아들 온조가 태어났다.
七月分國爲東西南三部, 使乙氏吃氏解氏分長其州
7월 나라를 나누어 동, 서, 남 3개부로 나누고, 그 땅을 을씨, 흘씨, 해씨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七年庚辰正月王母乙氏薨於夫餘, 王往迎其喪而皈之得疾而薨
7년(B.C.41) 경진 1월 왕모 을씨가 부여에서 세상을 떠났다. 왕이 모친상을 치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四月王遺腹女阿爾生
4월 유복녀 아이가 태어났다.
= 유복녀 아이는 후에 유리의 정실이 되었다가 유리왕 13년(B.C.7)에 사망
참고 : 박창화님 유고 '고구려사초' pdf파일에서 6페이지
十三年 甲寅 正月 阿爾崩 春秋三十三 后皇后 前夫仇台女也.
性溫慈貞敏生都切(土刀)太子及三公主.
13년 갑인 정월 아이가 붕崩하였으니 춘추는 33세 后皇后(소서노)의 전남편 우태왕의 딸이다. 성격은 온자하고 정민하였으며, 도절都切태자와 3명의 공주를 낳았다.
五月以妃召西奴爲女君.
5월 소서노 왕비를 여군(장)으로 하였다.
八年辛巳年七月慕漱王太子朱蒙自北夫餘逃來.
8년(B.C.40) 신사 7월 (해)모수왕태자 주몽이 북부여에서 도망쳐서 졸본으로 들어왔다.
年十九而英雄無比, 召西奴迎之置于賓堂侍之甚厚, 朝暮用浴朱蒙誘以甘言曰女君年才二十七能爲先王守貞乎, 召西奴曰非敢, 曰貞也無可以爲夫者也. 朱蒙乃知其意遂挑而通之恐國人不悅而諱之.
나이는 19세 비교가 되지 않는 영웅이었다. 소서노는 그들을 환영하여 손님을 모시는 방에 모셔두고 이침 저녁으로 대접하였는데 대단히 후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주몽 주몽이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자 하였다. 말하기를 “여군의 나이 이제 27세인데 선왕의 정조를 지키는 것이냐”고 하자 소서노가 말하기를 “(감히) 어찌 할 수 있겠소” (소서노가), 또 말하되 “정조를 지키는 것은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오.” 주몽은 곧 소서노의 그 뜻(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싫어한다)을 알고 따랐으나 정을 통하였다.
十月朱蒙與召西奴出獵獲神鹿. 朱蒙曰此天將祚我夫妻也. 召西奴曰今汝與我潛通以不告於國中奈何. 朱蒙曰吾善射汝宜擇夫以善射者. 何如召西奴諾之. 乃令國中曰吾年少而寡不可空房能善射者可以夫之各以其技來試吾前. 令下應募者甚衆皆不及於朱蒙. 召西奴大喜遂與朱蒙相婚於廟中. 不及者怒作亂朱蒙使其臣俠夫等捕而治之.
10월 주몽이 소서노와 더불어 사냥을 나갔다가 신록을 잡았다. 주몽이 말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장차 이곳의 왕(천자)은 우리 부부가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소서노가 말하였다. “지금 당신과 나는 몰래 정을 통하였는데 나라 안에 알리지 아니 하니 어쩌면 좋은가” 주몽이 말하였다. “나는 활쏘기를 잘한다. 당신은 마땅히 활을 잘 쏘는 자를 남편으로 선택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소서노가 허락하였다. 나라 안에 영을 내리기를 “나는 나이가 어리고, 과인(과부)이 홀로 사는 것이 가하지 아니하니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남편으로 맞아들이겠다. 각기 시험장에 와서 그 재주를 내 앞에서 발휘하라” 이러한 명령에 따라 응모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소서노가 크게 기뻐하며 주몽과 더불어 사당 안에서 혼인을 하였다. 시험에서 탈락한 자들이 노하여 난리를 일으켰으나 주몽이 협부(보) 등 그 신하를 부리어 난리를 일으킨 자를 체포하여 다스렸다.
= 此:이것 , 祚=복, 천자의 자리
‘朱蒙曰此天將祚我夫妻也’을 '주몽이 이르길, 이것은 하늘이 장차 우리 부부에게 복을 내리려는 구나!'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주몽은 임금이 되시는 분이므로 ‘祚’을 왕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요.
九年壬午四月朱蒙說召西奴曰吾爲汝夫而國人多不腹者以吾無功於國家也.吾欲養精兵以攻隣祁之已傲慢無禮者.何如召西奴曰吾爲汝妻惟命是從.而己於是朱蒙選民壯丁使習弓馬分署部回以其心腹臣領之.
9년(B.C.39) 임오 4월 주몽이 소서노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남편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데 많은 나라사람들이 내게 복종하지 않으니 이것은 내가 국가에 공이 없기 때문이요. 나는 정병을 양성하여 인근의 성하여 오만무례한 자들을 공격하겠소.” 그래서 소서노가 말하되 “나는 당신의 처로서 오로지 명을 따를 뿐이오.” 그래서 주몽은 몸소 민간의 장정을 선발하여 활쏘기와 승마를 훈련하고, 부서를 나누고, 부락을 돌면서 심복인 부하를 그 곳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十年癸未二月召西奴生朱蒙女甘兒
10년(B.C.38) 계미 2월 소서노가 주몽의 딸 감아를 낳았다.
= 감아는 온조의 동복동생으로 온조와 결혼하여 다루를 낳는다.
是年朱蒙盡平卒本諸部落威振一國. 召西奴曰吾以女子不識時務, 但居內育兒主饋可也. 天下奉惟卽君主之朱蒙大喜曰汝眞吾妻也, 奈汝旧臣不服何. 召西奴曰郎君以我爲妻以吾子爲太子則吾臣豈有不服之理哉. 朱蒙曰善
이해는 주몽이 졸본의 모든 부락을 평정하여 위엄이 떨쳐 일국을 이룬 해이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나는 여자로써 그 때 그 때 할일을 알지 못했다. 이제 단지 집에서 거주하면서 아기를 기르고 먹이는 것을 해야겠다.” 천하가 오로지 주몽을 군주로 받들자 주몽은 크게 기뻐하며 “당신은 나의 진실한 아내다. 그러나 당신의 옛 신하가 복종하지 아니하니 어찌할까?” 소서노가 말하기를 “낭군이 나를 처로 인정하고 아들을 태자로 인정하면 즉 나의 신하들이 어찌 복종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주몽이 말하기를 “이치에 맞다.”
= 識時務 : 그 때 그 때 할일을 앎.
十一年甲申正月召西奴立. 朱蒙爲王而沸流爲太子溫祚爲王子. 命憂臺旧臣卒本諸臣與朱蒙之臣相婚爲親戚. 改國號曰高句麗
11년(B.C.37) 갑신 1월 소서노가 왕이 되었다. 주몽을 왕으로, 비류를 태자로, 온조를 왕자로 하였다. 우대의 구신과 졸본의 모든 신하와 더불어 주몽의 신하는 서로 혼인하여 친척이 되길 명령 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쳐서 고구려라 하였다.
= ‘立’과 ‘爲王’으로 구별해서 기록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立은 스스로 왕이 된 것이고, 爲王은 선왕이 후왕을 지정했다는 뜻이다.
이 책이 고구려 역사서가 아니고 백제서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판단이 되므로 이렇게 정의했다.
왕이 두명이 나오므로 혼란을 주는 데 우태의 사망 후 소서노는 사분오열된 졸본부여의 수장이었고, 주몽의 노력으로 이제 졸본의 부족장들이 이제 소서노의 아래로 다시 들어오니 이제 와서야 소서노가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소서노는 왕위를 주몽에게 양위를 한다. 즉 소서노는 선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 이 해가 바로 고구려가 개국을 한 해이므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는 10년 차이가 난다. 백제서기에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역사가 뭉뚱거려져 있으므로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 이 때 고구려에는 세 부류의 신하가 존재한다.(우대, 소서노, 주몽계열)
서로 다른 세 무리가 어떻게 합심하고 나라를 이루어 가고, 어떤 사유로 다시 고구려와 백제로 나뉘어 가는지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지도 바랍니다.
十二年乙酉六月平沸流國以其主松瀼爲多勿候. 沸流本屬卒本. 今復皈故也.
12년(B.C.36) 을유 6월 비류국을 평정하여 그 땅의 임금 송양을 다물후로 삼았다.
비류국은 본래 졸본에 속하였는데 이제 다시 찾은 것이다.
十四年丁亥七月城郭宮室始大成. 王與后飮酒極樂賞賜內外宗戚及諸臣.
14년(B.C.34) 을유 7월 성곽과 궁실의 건축을 시작하여 완성하였다. 왕과 왕후가 술을 마시고 매우 기분이 좋아서 내외종과 친척, 모든 신하들에게까지 상을 하사하였다.
= ‘城郭宮室始大成’에서 ‘始’에 중심을 두느냐 ‘大成’에 중심을 두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도 성곽궁실이 완성되는 것으로 되어 있고, 다음 문장도 성곽궁실이 완성된 후의 모습으로 보인다.
十六年乙丑丁月將軍烏伊芙芬奴分兩道攻太伯山南東荇人國取其地爲城邑.
16년(B.C.32) 을축 정월(丁月) 장군 오이와 부분노에게 양쪽 길로 태백산 남동쪽 행인국을 공격하여 그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十九年壬辰五月以荇人國王女碧蘿爲太子沸流妃. 賜脯群臣.
19년(B.C.29) 임진 5월 행인국 왕녀 벽라를 태자 비류의 비로 삼았다. 군신들에게 포(말린 고기)를 선물로 하사하였다.
二十一年甲午十一月將軍扶尉厭寄?攻滅北沃沮國以其地置滿(또는溝)婁爲城邑.
21년(B.C.27) 갑오 11월 장군 부위압에게 맡기어(寄) 북옥저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 치구루를 성읍으로 삼았다.
= 寄: 맡기다, 奇:기이하다, 騎 : 말을 타다
二十四年丁酉王母柳花后薨於扶餘. 王與后發喪擧哀于鴨宮水上迷. 使于扶餘獻賻.
24년(B.C.24) 정유 왕의 어머니 유화가 부여에서 돌아가셨다. 왕과 왕후(주몽과 소서노)가 발상하여 압궁의 물위에서 애통해하여 혼미하게 되었다.
사신을 부여에 보내어 부의를 하였다.
是年王嫡子類利自扶餘來謁王于獵途. 王畏后不悅不亘率皈使. 寄多勿候松瀼家而巡行國中恤民窮乏者而醫其疾人稱其賢召西奴聞而怪之謂王曰夫婦一身郎君之子來居吾國而不來謁者何也. 王曰彼雖慕父而來我以沸流溫祚爲子何可戀戀于已棄之子乎.
이해 왕의 적자 유리가 부여에서 와서 사냥 가는 길에서 왕을 만났다. 왕은 왕비가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 두려워하여 거느리고 온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갔다. 다물후 송양에게 맡기었는데 나라 안을 돌며 나라 안의 궁핍한자를 구휼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현자로 칭해지는 자가 있다는 소리를 소서노가 듣고 괴이하여 왕에게 알리어 말하기를 “부부는 한 몸이요. 낭군의 아들을 우리나라의 사는 곳에 오게 하고, 어찌하여 오게 하여 만나지 아니 한가” 왕이 말하기를 “유리가 비록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나를 보기 위해 왔지만 비류와 온조를 아들로 삼았는데 어찌 연연할 수 있겠소. 이것이 내가 아들을 꺼리는 사유요.”
召西奴曰父子天倫之親也. 安可紊?之哉. 且妾與大王相婚二十餘年只有甘兒一人. 郎君之子乃妾之子也. 何不召來而置於宮中. 王曰吾妻之曰善矣若以阿爾妻之而共子是子則好. 莫甚矣. 后曰夫婦之間有何所惜惟汝所慾者是妾之心矣. 王大喜乃召類利置於阿爾宮中而妻之類利乃與阿爾(?)媚于父王母后外結執政大臣暗畜奪嫡之志.
소서노가 말하기를 “아비와 자식은 천륜이 정한 친함이 있는데 , 어찌 이것을 어지럽힐 수 있으리오. 또 첩(부인의 낮춤말)과 대왕과 결혼한 지 20여년이 되었지만 단지 감아 한명이 있을 뿐이다. 낭군의 자식은 첩의 자식이기도 하다. 어찌 불러 궁중에 불러 들어오게 하지 아니한가.” 왕이 말하기를 “나의 부인 말이 이치에 맞지 않소(矣:반어적인 표현임에 유의). 만약 아이(우태와 소서노의 유복녀)를 처로 하면 공동의 자식이 되므로 이것이 좋도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왕후가 말하길 “부부사이라면 어찌 아까운 생각이 들겠는가. 당신의 바라는 것이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유리를 불러 아이의 궁중에 두어 아이를 처로 삼게 하니, 유리가 아이와 함께 부왕과 모후에게 아양을 떨고, 밖으로는 암중으로 집정대신과 결탁하여 적자의 자리를 뺏을 생각을 하였다.
= 고대시대의 결혼 풍속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나중에 온조와 감아(주몽과 소서노의 딸)도 결혼을 한다.
二十九年壬寅四月右輔烏伊等上言曰自古帝王莫不立其子以爲太子今大王辛苦創業而不立己子臣等不取千秋萬歲之後沸流若立宜以其父優台配于吾后矣. 大王安得血食于此國乎, 若以類利爲太子而阿爾爲太子妃則阿爾今矣娠他日大王聖后之孫永久王于此土. 大王聖后哀在相配食苦吐(원문은 土)是非俱美之道哉. 王曰立子以賢者以重社稷宗廟也. 今沸流仁而有德. 吾何敢私其所生乎. 群臣曰沸流雖仁非帝王之器. 守成之人也. 類利才德雙全万姓. 答曰吾王之子. 以皈之今若不立悔之晩矣. 王不聽.
29년(B.C.19) 임인 4월 우보 오이 등이 위에 말하기를 “예로부터 왕은 그 자식을 태자로 세우지 않은 적이 없다. 지금의 대왕은 나라를 세우는데 어려운 일에 고생을 한 공이 있는데 만약 신들이 왕의 자식(유리)을 (왕)위에 세우지 못하면 천추만세(오랜 세월) 후에 만약 비류가 왕이 되면 마땅히 그 부와 우태의 처인 우리의 왕후에게 창업의 공이 넘어가게 되지 않으리오. 대왕이 이 나라의 제사를(血食) 편안하게 받으려면, 유리를 태자로 삼고 아이를 태자비로 삼아야한다. 즉 아이는 지금 임신 중이므로 다른 태양 대왕과 성후의 (자)손으로 왕의 지위가 이 땅에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다. 대왕과 성후가 서로의 배우자를 슬퍼하여 밥을 먹어도 써서 토하니 이것은 함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왕이 말하길 “사직과 종묘(종묘사직)를 중요시하는 현명한 아들을 세우겠다. 지금 비류는 어질고 덕이 있다. 내가 어찌 사사로이 所生(자기가 낳은 자식)을 세울 수 있겠느냐”
군신들이 말하기를 “비류는 오직 어질기만 할뿐 제왕의 그릇이 아닙니다. 단지 수성(조상들의 이루어 놓은 것을 이어서 지킴)의 그릇입니다. 유리는 재주와 덕을 모두 갖추었습니다.”
(왕이) 답하여 말하길 “과연 내 아들이다.”
“지금 돌이키지 않으면 만약 (유리를 태자로) 세우지 않아 후회해도 늦습니다.”
왕이 듣지 아니하였다.
= 他日 : 다른 태양, 다른 날
他日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데 어떤 뜻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여기에 대한 논의는 남당 박창화 선생님의 고구려 역사서를 살펴본 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 주몽과 소서노가 다른 태양의 후손이라고 했다.
앞에 주몽이 ‘慕漱王太子’라고 했으니 주몽은 해모수의 자손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소서노가 고무막한 동명의 후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서노가 고두막한과 어떤 관계인지는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 血食 : 나라를 보존함, 제사를 지냄
= 苦土 : '산화마그네슘'을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類利亦自辭讓而群情一動不可禁止. 王與同枕而憂之后曰吾子沸流雖仁而不及於汝子類利人所共知也. 阿爾若生好孫而能繼(?)邦. 吾於前夫後夫皆盡婦道矣. 汝何固執而憂之乎. 王曰建國之道莫如捀嗣以賢吾實不知吾子之賢若如汝言明日可試而. 爲之乃立幟於宮之左右而令曰欲立沸流者右而欲主類利者左伴. 左者三倍于右主, 嘆曰吾非不欲立沸流父(원문은 夫)也. 奈何乃立類利爲太子而使分三部也. 沸流夷其東南, 溫祚夷其西南, 類利其北部, 以慰后心, 自是國政多歸類利, 沸流溫祚漸懷不平之志
유리 또한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무리의 뜻이 같이 움직이는 것을 금하지는 못하였다
왕과 더불어 베게머리에서 왕후가 근심하여 말하기를 “나의 아들 비류는 오직 어질기만 할뿐 당신의 자 유리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만약 아이가 손자를 낳아 능히 ??방(큰 나라)를 이루면 좋은 일이고, 나는 전남편과 현 남편 모두에게 도리를 다하는 것이 된다. 어찌 당신은 고집을 부리어 근심을 하는가.”
왕이 말하기를 “건국의 도리(이념)는 어진사람을 후계자로 정하는 것이다. 나는 내 자식이 어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만약 당신의 말과 같은지 내일 시험을 해 보겠다.”
(다음날 왕이) 그렇게 하였다.
이내 궁의 좌우에 깃발을 세우고 령을 내려 말하기를 비류를 따라가려는 자는 오른쪽, 유리를 따라가려는 자는 왼쪽에 (서도록 하였다)
좌에 있는 (따르는) 자가 오른쪽에 있는 자보다 3배가 많았다.
왕이 한탄하며 말하길 “내가 비류의 부를 세우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찌 유리를 태자로 세워야 하는가. 삼부로 나누어 다스리겠다.”
= 이 말은 주몽이 창업의 공을 우대에게 돌리겠다는 뜻이다.
‘沸流夫’는 비류의 남편이 되므로 ‘沸流父’의 오기이다.
비류는 夷의 동남을, 온조는 夷의 서남을, 그 땅의 북부(고구려)는 유리가 다스리게 하겠다.
이로써 후의 마음을 위로했다. 이로부터 국정이 유리에게 다 돌아가게 되었다. 비류, 온조는 점점 불평의 뜻을 품게 되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 의하면 유리가 어머니 ‘예씨’와 단 둘이서 도망쳐 졸본으로 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따르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유리를 따르는 무리란 비류수의 송양의 무리와 어머니 ‘예씨’의 무리로 보여진다.
어머니 ‘예씨’가 대한 내용이 백제서기에 누락되어 있으니 남당 박창화님의 유고 중 ‘고구려’ 쪽에서 찾아서 보완해야 할 것임.(죄송)
= 이 기사는 다음 기사와 함께 고구려가 고구려, 비류백제, 온조백제로 나뉘는 주요원인이 되었다.
九月王薨. 后哀痛欲殉. 三群臣止之曰大王忽棄聖后亦從臣等何歸. 后曰太子在汝等奉之可也. 於是類利卽王位奉后位太后以阿爾爲后以沸流溫祚爲左右爲王.
9월 왕이 돌아가셨다. 왕후가 애통하여 따라 죽으려고 했다. 세 무리(우태,소서노,주몽의 구신)의 신하들이 왕후를 말리며 말하기를 “대왕은 홀연히 떠났다, 성후(소서노)는 역시 신하들을 따르지 않고 어찌 돌아가려(죽으려) 하느냐(반어적 표현)”. 소서노(后)가 말했다, “태자와 여기 있는 너희들은 가히 받들어야 한다, 이제 유리를 왕으로 봉하고, 후를 태후로, 아이는 후로, 비류와 온조는 좌.우왕에 봉한다.”
= 주몽이 특별한 질병도 없이, 전쟁 중의 사망도 아닌데 홀연히 죽었다는 것이 이상하다.
혹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다음의 기사에 주목해 보자.
= 주몽의 죽음을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주몽 재위시는 동부여와의 관계가 좋았는데 유리가 왕이 된 이후에는 갈등관계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리왕의 태자즉위와 관련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태왕 11년(고구려 동명왕 원년에 해당)에 비류가 태자로 즉위하는 데 비류와 동부여의 금와왕과는 조손관계입니다. 주몽이 의붓아비 노릇을 하고 다음 왕위는 자신의 손자한테 물려주겠다고 하는데 굳이 주몽과 갈등관계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볼모신분에서도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럼 결론으로 들어가 유리가 태자로 즉위시키고 나서 주몽은 동부여와 갈등관계를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외손녀가 태자비에 있으니 안심은 되지만 그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결국은 유리에게 태자에 세우고 주몽은 아들을 위해 죽었습니다.
하지만 유리는 계속 잘못을 행하고 맙니다.
첫째는 비류와 온조를 내쫒고, 두 번째는 아이를 후비로 격하 후 사망, 셋째는 도절태자를 죽게 만듭니다.
이렇게 계속되는 잘못들이 결국엔 동부여와의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문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 28년 기사
가을 8월,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으며 “우리 선왕이 그대의 선왕 동명왕과 서로 의좋게 지냈는데, 이제 우리 신하들을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도록 유인하는 것은, 백성을 모두 모아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다. (중략)”
丁月阿爾后生太子都切大赦
정월 아이후가 태자도절을 낳았다. 대사면을 했다
類利初在宋讓之時潛通其女宋花至是阿爾産臥而無, 浚宮宋花入開(또는 曰)浚通之如故. 太后不悅曰吾女産君之子而臥爲人之夫者當旦夕在其側而分勞之, 安可網?慾納不美之女哉. 類利曰人君當廣其嗣孫, 不可無一二浚宮, 況宋花者吾之糟糖餠母, 言不可棄也. 太后乃怒曰汝爲太子時欺吾夫妻示以仁賢今汝父沒而忽敢如此乎. 乃召沸流溫祚議曰吾爲類利所欺汝等宜早爲之計各往所封之地. 沸流曰大王生時愛吾等如子今則未免贅不如奉母南行開創新國矣. 溫祚曰諾.
유리가 처음에 송양의 집에 있을 때 송양의 딸 송화와 몰래 간통하였는데 아이가 출산하여 누워있는 때에 이르러 궁궐에 없을 때에 송화가 궁궐로 들어와 말하기를 “옛날과 같이 간통하였다.” 태후는 기뻐하지 않으며 이야기하길 “내 딸은 임금의 아들을 낳아 누워있는데 남편이라고 하는 사람은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그 옆에 있으면서 노고를 나누어야 하는데, 불미스런 여자를 거두니 편안한가?”
유리가 말하길 “사람의 임금은 마땅히 그 후계자인 자손을 널리 퍼트려야 하고, 불가결하게 한두 번 궁 안에 (깊숙이) 들어왔다. 더군다나 송화는 나의 조강지처(糟糖餠母)로 맹세했다. 버릴 수 없다” 고 말했다. 태후가 노하여 말하길 “너는 태자가 되려고 할 때 나의 남편과 나를 (네가) 어질고 현명하게 보이게 하여 속였다.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없는 지금 이와 같이 소홀히 할 수 있느냐.” 이에 비류와 온조를 불러 의논하여 말하길 “나는 유리를 왕으로 세웠는데 너희들을 버리는바 마땅히 각자의 봉해진 땅으로 갈 계획을 세워야겠다.” 비류가 말하기를 “대왕이 살아있을 당시 우리들을 마치 자식처럼 귀여워 해주었는데 지금은 군더더기 살을 면할 수 없으니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 새 나라를 열어 창업하는 것 같지 않다.” 온조가 승낙하였다.
= 不可無 : 불가결
= 糟糖餠母는 하나의 관용구처럼 보인다.
송화는 소서노의 입장에선 하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유리에겐 아버지가 있는 궁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5년을 살았으니 조강지처가 분명하지만 찾지는 못했다.
첫댓글 十一年 甲申 正月 召西奴立朱蒙爲王 而沸流爲太子 溫祚爲王子 11년 갑신 1월 소서노는 주몽을 세워서 왕으로 삼았고, 비류를 태자로, 온조를 왕자로 삼았다.
BC37년이면 고구려 건국 해입니다.
十一年 甲申 正月 召西奴立朱蒙爲王 而沸流爲太子 溫祚爲王子은 제가 무척 해석에서 고민했던 부분입니다. 시원하게 해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以)沸流爲太子 以가 생략된 형태입니다. 아니면, '~가 되었다.' 로 해석해도 좋아요. "비류는 태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