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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
4일 |
루카 10,1-12.17-20 |
성가 283, 287 |
11일 |
루카 10,25-37 |
성가 25, 446 |
18일 |
루카 10,38-42 |
성가 437, 441 |
25일 |
루카 11,1-13 |
성가 18, 40 |
8월 | ||
1일 |
루카 12,13-21 |
성가 403, 459 |
8일 |
루카 12,32-48 |
성가 1, 480 |
15일 |
루카 1,39-56 |
성가 249, 259 |
22일 |
루카 13,22-30 |
성가 62, 517 |
29일 |
루카 14,1.7-14 |
성가 12, 26 |
●● 말씀나눔 l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연중 제22주일
함께하는 복음묵상
서울대교구 사무처장 안병철 신부
사진 : 서울대교구 사목국 이준성 신부
믿음의 뿌리를 찾는 계기로
7월 4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루카 10,1-12.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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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선포자들이 감내해야 할 박해의 고통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복음적인 가치는 기존의 가치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기존 가치 체계를 뒤흔드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복음 선포자의 자세를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님은 그렇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그분의 실존 자체가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련과 고통으로 점철된 짧은 생애를 사시면서도 복음을 위해 전 생을 투신하신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 민족 공동체 안에 가장 소중한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셨습니다.
이렇듯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우리 민족 안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은혜롭게도 알찬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변화의 큰 소용돌이 속에서 알차게 맺어지기 시작한 복음의 결실이 이 땅을 복음화하는 새로운 출발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는 믿음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믿음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숙고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오늘 이 순간을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한 재도약의 시간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 묵상: 믿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나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가요?
생명의 법이 되기 위해서는
7월 11일 연중 제15주일 루카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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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관한 유일한 율법은 하느님의 사랑과 결코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피와 접촉함으로써 자신들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 규정에 얽매여,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도 무심히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행위는 율법에서 명한 대로였기에 흠잡을 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되어가는 이를 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율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생명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생명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였던 것입니다. 율법, 민족적인 감정, 그 어느 것도 사랑의 요구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행위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이 보여준 모습이 하느님의 법을 생명의 법으로 만들 수 있는 길임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법은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고 생명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비유를 통해 율법주의로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당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법의 문자적인 잣대로 판단하려는 현대적 율법주의를 과감하게 떨쳐야 하지 않을까요?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이 우리에게 그런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묵상: ‘이웃 사랑’의 의미를 어떻게 알아듣고 있는지 말해봅시다.
진정 중요한 것은?
7월 18일 연중 제16주일 루카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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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으로 시중들었던 마르타는 질책하시고 오히려 마리아를 치켜세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물질적인 봉사가 환대 내지는 접대의 질을 규정하는 최우선적인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투신하는 모습을 취해 보임으로써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를 좇고 있습니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신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삶의 역동적인 자세를 촉구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일상 안에서 주님을 어떻게 맞아들여야 할까요? 밖으로는 요란하지만 정작 속은 빈 강정처럼 외적인 형식에만 치우친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살아가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우리는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가 주님과 함께 함에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 묵상: 일상 안에서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노력은 어떠했는지요?
가까이 계시는 주님이신데... 7월 25일 연중 제17주일 루카 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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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가 늘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듣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우리 모두가 참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원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삶을 겸손하게 주님께 맡기는 것만이 주님의 자비하심 아래서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길임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버거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께서 모른 체 하시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욕심을 채우거나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요구하거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하기는커녕 주님의 무관심과 무응답을 불평합니다.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떤 행복으로 우리가 기쁘게 살기를 바라시는지 우리는 그것들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안 들으시거나 못 들으시거나 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분께서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고 느낄 만큼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데 급급해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실존은 하느님 안에서만 그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인식해야 인간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이기적인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는데, 우리도 우선적으로 그분과 함께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나머지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그분께서 채워주실 텐데 너무 조바심 내는 것은 아닐까요?
■ 묵상: 어떤 식으로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가 해 온 기도에 문제는 없는지요?
참다운 부자란?
8월 1일 연중 제18주일 루카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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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유산 문제를 해결달라는 요청을 받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요청을 단호하게 거부하시면서 근원적인 문제를 끄집어내십니다. 소출을 많이 거두어들인 어느 부자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심으로써, 어떠한 경우에도 물질적인 부유함이나 풍족함이 참다운 생명의 원천이 될 수는 없음을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물질의 무가치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려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가치의 혼돈을 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소유의 욕구가 삶의 가치를 정하는데 있어서 실질적으로 걸림돌 아닌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대개 물질을 풍부히 소유하면 삶의 질이 높아지고 삶이 안정될 뿐만 아니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적 사회 환경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강렬한 물질의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소유는 물질을 쌓아둠으로써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눔으로써 풍요로워집니다. 물질적인 소유가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거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묵상하게 합니다. 참다운 부자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끊임없이 물질 소유의 유혹을 받고 있는 우리는 참다운 부자의 범주에 속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 묵상: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 8월 8일 연중 제19주일 루카 12,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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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허황된 재산이나 재물에 얽매여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재산이나 재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마치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종처럼 삶의 가치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올바로 인식하며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의 모습은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표본적인 모습입니다. 그 모습은 주인이야말로 자기 삶의 절대 가치라고 여기며 살아가려는 모든 신앙인의 모습을 표상합니다. 올바른 가치를 좇을 때만이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보화가 아니라 보화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그 진정한 가치를 왜곡시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상 안에서 주님의 현존을 깊이 인식하며 흐트러짐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깨어있는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신앙인들이 살아야 할 삶일진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물질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적인 조건과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진정한 삶을 살아야만 할 당위성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선택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후회 없는 선택을 결단력 있게 내리도록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 묵상: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아! 어머니, 불러보는 그 이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루카 1,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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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녀 마리아의 승천은 그분의 실존, 곧 영혼과 육신이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져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1950년에 성모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습니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교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옛 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회칙을 발표하시어 위대한 옛 전승과의 연속성 안에서 마리아의 승천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를 그녀의 아들과 연계시키는 밀접한 관계에서 비롯한 당연한 결과라고 설명하십니다.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면 믿을 교리의 의미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당신 태중에 주님을 잉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계획 속에서 선택된 마리아는 관습에 따라 태중에 아이를 가진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찾아가 문안하는 아주 평범한 여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 인사를 드릴 때 그녀의 태중 아이가 뛰놀았다는 것과, 성령께서 엘리사벳으로 하여금 마리아의 태내에 있는 아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주셨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데 대해서 칭송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조건 없이 주님께 순종하는 태도를 간직함으로써 주님의 계획이 성취될 수 있도록 자신을 충실한 신앙인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 묵상: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요?
구원을 향해 가는 길 8월 22일 연중 제21주일 루카 1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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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받는 자들의 숫자 문제로 조바심을 갖고 있던 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방식과 관념대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논리를 정당화시키려는 어리석은 모습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나름대로 하느님 나라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바라고 찾으려는 구원이 혹시라도 우리의 논리와 방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주님의 준엄한 심판의 말씀이 이 순간 우리의 귓전을 울립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회개의 시급성과 필연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시간은 우리를 마냥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지금이 주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입니다. 구원을 향해 가는 길은 우리가 만든 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길입니다.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대로 갈 수 있도록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인간적인 고집에 사로잡혀 구원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실존의 문제마저도 세속화하려는 유혹을 과감하게 떨쳐버려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이미 주님을 믿고 그 믿음의 토대 위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가 잘못된 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꼴찌로 추락하는 아픔을 떨칠 수 없을 것입니다.
■ 묵상: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알아듣고 있는지요?
분명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8월 29일 연중 제22주일 루카 14,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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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식사를 하시던 중,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내 안에 내재된 인간적인 명예욕이야말로 다양한 이유로 이미 고착화된 차별적인 인간관계를 더욱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허황된 명예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은 결국 자신을 인간적인 한계 속에 감금시킬 뿐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워야만,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담아낼 수 있습니다.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 그것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삶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인간을 위해 내어 주십니다. 그 삶을 통해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써 세상을 하느님의 사랑이 머무르는 행복의 공간으로 바꾸어 가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존의 가치와 낡은 사고를 떨쳐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무상의 선물임을 깨달을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한 새로운 인식이 우리 안에 자리매김 되어야만 기존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낡은 질서와 사고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도 낡은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 묵상: 기존의 가치 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우리의 구체적인 노력은?
●● 도란도란 성경이야기
“언제나 기뻐하십시오.”(1테살 5,16)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평생 동안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처럼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부족하고 불완전한 부분을 무엇인가로 채우려고 합니다. 돈을 버는 것, 배우자를 찾아 결혼을 하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것, 취미 생활을 하는 것 등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투신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노력들입니다. 무엇인가 원하는 바를 소유했을 때 사람은 기쁨과 만족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거나 잃어버렸을 때에는 슬픔이나 분노, 고통을 느낍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것들로 채워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나 재물을 통해서나 권력을 통해서 나의 부족함을 채워보려고 하지만 이들 역시 부족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쉬움과 공허함이 남습니다. 우리는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완전한 존재, 즉 하느님으로 우리를 채워야만 부족함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그 순간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살이가 끝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곳에서는 더 이상 필요한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이 기쁨과 만족만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21,4).”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하 테살로니카서)에서도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기쁨을 기대하라고 말합니다.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1테살4,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 하여 돌아가셨습니다(1테살5,10).”
테살로니카는 필리피에서 서쪽으로 1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예로부터 무역과 행정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기원전 315년 마케도니아 임금 필립 2세의 사위이며 알렉산드로스의 장군이었던 카산드로수스가 자기 부인 테살로니케이아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입니다. 테살로니카는 테살로니케이아의 라틴식 이름이며 오늘날에는 살로니카라고 불립니다. 테살로니카에는 유다교 공동체가 있었으나 동시에 여러 인종들이 섞여 사는 도시여서 수많은 종교 예식들이 성행하였습니다. 테살로니카 1,2서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활동 가운데 가장 초기의 활동을 전해 주며, 특히 테살로니카 1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먼저 쓰인 문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테살로니카서를 통해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도 부활의 희망이 생겼으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이 없고 부족한 것투성이라도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차고 넘치게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부러워하고 있는 누군가도 완전한 기쁨과 만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과 막대한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기쁘고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구속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 불안하고 불행해질 것입니다. 사실 기쁘게 살기 위해서는 어느 것에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면 됩니다. 돈이 부족하다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존중이 부족하다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언제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기쁨과 만족은 이 세상 것들을 통해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본래의 창조 의도대로 하느님의 모습과 비슷해질 때 가장 기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하느님 안에서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기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1테살5,16)”
●● 문화산책 l 치유하는 고해성사
치유하는 고해성사
고해를 통해 우리는 치유되기 시작한다.
구입문의 : 02)944-0944 또는 바오로딸 인터넷 서점(http://www.pauline.or.kr)
스콧 한 지음 / 강우식 옮김 / 211쪽 / 9,500원
●● 만남,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부 교회의 일곱 성사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치유의 성사(고해성사, 병자성사), 친교와 사명을 위한 봉사의 성사(성품성사, 혼인성사)로 구분됩니다. 이 성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탄생시키고 성장시키며, 치유하고 사명을 부여합니다.
제1장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1210~1419항)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의 성사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신자들은 견진성사로 굳건하게 되며, 성체성사로 양육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입문 성사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생명을 더욱 풍부히 받게 되고 사랑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세례성사
1277항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한다.
세례성사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기초이며, 다른 성사들로 가는 길을 여는 문입니다. 세례는 물로써 그리고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사입니다. 세례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 묻히며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로운 피조물(2코린5,17)”이 됩니다. 또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은(티토3,5)” 세례 받은 사람은 “빛의 자녀(에페5,8)”가 됩니다. 세례성사의 핵심적인 예식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비신자를 물에 담그거나 머리에 물을 붓는 것입니다.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이는 누구나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 준비 기간은 교리 지식을 갖추게 하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교회 공동체와 하나 되어 회개와 신앙이 성숙하도록 이끄는 시기이므로 아주 중요합니다.
어린아이들도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므로, 어둠의 세력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자녀가 되도록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에게 세례의 은총을 누리게 할 책무가 있으며,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생명을 양육하는 역할에 포함되는 사항입니다. 오늘날 자신의 구원은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이 막중한 책임을 저버리는 신자들이 있음은 크게 염려되는 일입니다. 신자들은 당연히 자기 자녀가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선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물, 은총, 기름 바름, 조명, 불멸의 옷, 재생의 목욕, 인호 등 가장 귀중한 모든 명칭으로 부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선물이고, 죄인들에게도 주어지기 때문에 은총이며, 죄가 물속에 묻히기 때문에 세례(물에 잠김)이고, 신성하고 왕다운 것이기에 도유이며, 밝은 빛이기에 조명이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것이기에 옷이며, 씻어 주기 때문에 목욕이고, 우리를 지켜 주며 또한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표이기 때문에 인호라고 합니다(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견진성사
1303항 견진성사는 세례성사의 은총을 증가시키고 심화시킨다.
견진성사는 세례성사의 은총을 완성하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성숙한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더욱 굳게 결합시키고, 성령의 선물을 증대시키며, 교회와 이루는 친교를 더욱 완전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견진성사입니다. 견진의 도유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과 성령 충만에 더 깊이 참여함으로써 삶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2,15)’를 풍기게 됩니다. 견진성사의 주요 예식 곧 기름을 바르는 예식 때문에 ‘도유’라고도 부르는데, 세례를 확정하고 세례의 은총을 견고히 한다는 의미로 ‘견진성사’라고 부릅니다. 핵심 예식은 집전자의 안수와, 세례를 받은 사람의 이마에 축성 성유를 바르는 것입니다. 이때 집전자는 “성령 특은의 날인을 받으시오.”라고 말하면서 신자의 이마에 축성 성유를 바릅니다.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는 이 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만 12세 이상이면 받을 수 있습니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67조). 이 성사를 받으려면 은총 상태에 있어야 하며, 고해성사로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대는 영적인 날인, 곧 지혜와 통찰의 영, 의견과 용기의 영, 지식과 공경의 영, 주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의 영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대가 받은 것을 지키십시오. 하느님 아버지께서 그대에게 인장을 찍으셨고, 주 그리스도께서는 그대를 인정하셨고, 그대의 마음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성 암브로시오).”
성체성사
1324항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를 완결 짓습니다. 세례성사로 왕다운 사제의 품위에 오르고 견진성사로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게 된 사람들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온 공동체와 함께 주님의 희생 제사에 참여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와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와의 일치를 증대시키며,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때 받은 은총의 생명을 보존하며 새롭게 해 주고, 이웃 사랑 안에서 우리를 성장하게 해 줍니다. 또 성체는 우리의 사랑을 북돋아 주며, 소죄를 없애 주고, 미래의 대죄(죽을죄)에서 우리를 보호합니다.
성체성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 곧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미사성제’를 말합니다. 성체성사는 ‘감사’라는 뜻의 ‘성찬례’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예수님께서는 성목요일 당신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1코린11,23)”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 뒤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면서 이 성사를 제정하셨기 때문이며, 교회가 이 성사로써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의 만찬, 빵 나눔, 성찬 모임, 영성체(친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영속화하고, 또한 그때까지 교회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를 맡아야 합니다.
성체를 받아 모시려면, 신자는 교회와 온전히 결합되어 있고 은총의 상태여야 합니다. 곧 죽을죄를 지었다는 의식이 없어야 합니다. 중한 죄를 지었다고 느끼는 사람은 성체를 모시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또한 정신 집중과 기도, 교회가 정한 공복재의 준수,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의 표시인 몸가짐(행동, 복장)도 중요합니다.
“성찬례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위한 약이요 죽지 않게 하는 해독제이며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유일한 빵을 나누어 먹습니다(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 자세한 내용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485∼552쪽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가정기도 l 참으로 소중하기에
참으로 소중하기에
가정에서 온 가족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진행합니다.
1. 시작 기도
│진행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 중의 한분이 주님을 초대하는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생활 말씀
│진행자│ 다음의 성경 말씀을 다함께 소리 내어 읽겠습니다.
† 잠언 17장 1절
편안하게 먹는 마른 빵 한 조각이 불화 섞인 잔치 음식으로 가득한 집보다 낫다.
│진행자│ 더 큰 목소리로 다함께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다 읽은 후) 약 2분 정도 성경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묵상을 끝내고 다음의 나눔을 진행합니다)
♠ 나눔
1) 성경 말씀을 읽고 느낀 점을 이야기해 봅시다.
2) 다음 문장의 빈칸을 완성해 봅시다. 그리고 서로의 답을 비교해봅시다.
“나는 ( )할 때 우리 집이 편안하게 느껴지고,
( )할 때 불화 섞인 잔치 음식으로 가득한 집처럼 느껴진다.”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진행자│ 다음의 내용을 다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참으로 소중하기에
우리는 대부분 가족들 앞에서 너무 쉽게 화를 낸다. 남들 앞에서는 침 한번 꿀꺽 삼키고 참을 수도 있는 문제를 가족이라는 이유로 못 참아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서로 허물없다는 이유 때문에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는 편한 관계라는 핑계로 발가벗은 감정을 폭발시키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가.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뜨거운 불은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불을 지른 쪽은 멀쩡할 수 있지만 불길에 휩싸인 쪽은 크건 작건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불길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입은 화상이야 말로 오래 오래 흉한 자국으로 남는다.
내 곁에 가까이 있어서 나 때문에 가장 다치기 쉬운 사람들...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화상 자국을 남겨왔던가.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에게 함께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남긴 그 많은 상처들을 이제는 보듬어 줄 때인 것 같다.
나로 인해 상처를 주기보다는, 나로 인해 기쁨을 줄 수 있고, 나로 인해 모든 이가 행복했으면 참 좋겠다. 우리 모두는 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소중하기에 조금씩 놓아 주어야겠다.
- 최일도의 「참으로 소중하기에 조금씩 놓아주기」 중에서
♠ 나눔
1) 이 글을 읽고 느낀 점을 이야기해 봅시다.
2) ‘참으로 소중하기에 조금씩 놓아준다’는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4. 함께 실천합시다
│진행자│다음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야구에서 타자가 홈런을 치기 위해서는 몸에서 힘을 빼야 합니다.
투수가 강속구를 던지기 위해서도 몸에서 힘을 빼야 합니다.
가족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도 몸에서 힘을 빼야 합니다.
우선 나의 눈과 입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 가득한 힘을 빼야 합니다.
내가 힘을 뺀 그 자리에 가족이 들어올 수 있도록
내가 힘을 뺀 그 자리에 주님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참으로 소중하기에 조금씩 놓아 주어야 하겠습니다.
5. 가족 회의 시간
│진행자│ 가족 회의 시간입니다. 가족이 함께 알아야 할 사항이나 논의가 필요한 일들, 가족 친지들의 생일, 축일 소식이나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 가족에 바라는 점 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해주시기 바랍니다.(자녀에 대한 훈계의 시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6. 가족 평화의 인사
│진행자│지금부터 평화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온 가족이 돌아가면서 포옹을 하며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해줍니다.)
7. 마침 기도
│진행자│다함께 손을 잡고 주모경을 바치겠습니다.
펠리칸은 새끼에게 줄 먹이가 없을 때, 자기 가슴에 상처를 내어 흐르는 피를 먹인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새끼를 살리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펠리칸의 모습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의 죄를 대신해 피 흘리고 생명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시어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으므로, 주님과 형제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다(1요한3,16; 요한15,13 참조). 사랑의 이러한 최대 증거를 모든 사람에게 특히 박해자들에게 보여 주도록,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첫 시대부터 부름을 받았고 또 언제나 부름을 받을 것이다(교회헌장 42).
이사야는 아무런 조건 없이 당신 생명을 바치시고, 스스로를 낮추신 예수님에 관해 예언했습니다(이사53,7 참조). 그리고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요한15,1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 안에서 구체화되는 사랑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6,54).”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4년 성체성사의 해에 발표한 교서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성찬례 안에서 우리 하느님께서는 인간관계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힘의 모든 기준을 뒤엎으시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는 섬김의 기준을 근본적으로 천명하시면서, 최상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28).
또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당신의 최초 회칙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성찬의 친교인 ‘예배’ 자체 안에는 사랑받는다는 사실과 그에 이어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4).
●● 성경 속 교리 단상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
1. 시작 기도
(진행자) 한분이 시작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성경 읽기
(진행자) 돌아가면서 한 구절씩 성경을 읽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19절 (해당하는 성경 구절을 찾아서 읽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
3. 묵상하기
(진행자) 성경 말씀을 읽고 잠시 묵상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질문을 서로 나누어 봅니다.
■ 위의 구절에서 아브라함의 굳은 신앙을 다루는 곳은 어디입니까?
■ 가톨릭 신자들이 사제에게서 가장 먼저 보아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어떻게 섭리하십니까?
4. 함께 읽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 자체를 믿고 따랐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강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살다보면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제를 파견하여 그 계시를 전달합니다. 더불어 교회는 하느님의 계시가 설명된 거룩한 책, 즉 성경, 교리서, 기도서, 공의회 문헌 등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믿고, 사제들을 주님의 대리자로 여기며, 믿음과 존경심을 가지고 교회서적을 읽어야 하겠습니다.
5. 마침 기도
(진행자) 마침 기도로 신덕송을 바치겠습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시므로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나이다.
참고문헌 : 성서와 교리교육(광주가톨릭대학전망편집부, 1986)
●● 노년의 향기 l 노인에 대한 이해
배움의 의미: 늙음과 젊음의 차이
흔히 우리는 ‘나이’만으로 늙음과 젊음을 구분 짓는데, 미국 코비리더십센터의 CEO 스티븐 코비가 쓴 <신뢰의 속도>라는 책 속에는 다음과 같은 하비 울먼의 글이 소개됩니다. “스무 살에 중단하든 일흔 살에 중단하든, 배움을 중단하는 사람은 노인이 된다. 배움을 계속하는 사람은 젊은이로 남을 뿐 아니라, 신체적 능력에 관계없이 더욱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
6년 전, 일본 효고현(兵庫縣) 아카시시(明石市)에 위치한 한 노인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은 한국보다 더 일찍 고령화를 경험한 사회로, 그 중에서도 효고현은 노인인구가 제일 많은 곳입니다. 길거리 어디서도 어린이를 마주치기가 쉽지 않고, 그러다보니 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도 점점 폐교되어가는 추세랍니다. 그런데 줄어드는 어린 학생들 때문에 학교 문을 닫는 대신, 지역에 넘쳐나는 노인 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열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기존 건물이 학교시설로 사용되었으니 따로 짓지 않아도 되었고, 시청에서 파견된 공무원이 노인학교 교장이 되어 운영을 담당하였는데, 입학하려는 학생들이 줄지어 있어서 학생 유치로 골치를 앓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학교인 만큼 엄격한 규정과 규율은 있습니다. 노인학교가 ‘대학’인만큼 4년제로 운영이 되는데, 졸업한 이후 재입학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또 4년간 학교를 다니는 데 드는 모든 비용이 시에서 지원되므로, 졸업 후에는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입구에 가지런히 놓인 신발장 칸마다 각자 이름이 붙어있고, 청소며 학교와 교실의 정리정돈은 모두 노인학생들이 ‘당연히’ 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소학교 건물이 노인대학 건물로도 손색없이 쓰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도 군데군데 마련되어 있는 개수대에는 ‘물을 아껴쓰자’는 표어를 붙이고 작은 망사주머니에 비누 조각을 매달아 걸어둔 모습도 보였습니다. 소파의 찢어진 곳을 청테이프로 붙여놓은 모습에서는 이들 노인 학생들의 애교심은 물론 집안의 어르신의 검소한 모습 또한 엿볼 수 있었습니다. 졸업생들이 가꾼 거리의 화단에는 꾸민 사람의 이름이 적힌 푯말이 있고, 지나가는 아이들은 “우리 할아버지다!”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하였습니다.
요즘 노인대학이나 실버아카데미라는 이름의 노인교육기관과 프로그램이 많이 생기고 있어 그야말로 배우고 싶은 것은 마음껏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배운 후에 그 앎을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사가 끝날 무렵 늘 듣는 “복음을 전하라.”라는 말씀이 미사에만 통용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배우려는 자세, 무언가 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사명(mission)이지 않을까요?
노인사목연구위원 이경희(세라피나)
● 나눔 : 우리가 배워 온, 혹은 지금 배우고 있는 많은 것 중 실천할 수 있는 사항을 나누어 봅시다.
●● 노년의 향기 l 웰 다잉
죽어가는 사람에게
다가올 세대의 부모 되길 권하기
1. 서론 : 죽음 - 최고의 과제 2. 죽음준비와 고독
3. 죽음준비의 첫 번째 과제 :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
4. 죽음준비의 두 번째 과제 : 우리는 하느님의 같은 자녀임을 인식하는 것
5. 죽음준비의 세 번째 과제 : 미래의 세대에게 부모 되기
6. 잘 죽기로 선택하는 결단 내리기7. 죽어가는 사람 잘 보살피기
8. 죽어가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 알리기
9. 죽어가는 사람에게 모든 인류와의 연대 권하기
10. 죽어가는 사람에게 다가올 세대의 부모 되길 권하기
11. 결론 : 예수님 부활의 지평 아래 죽음 맞이하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에서 받아들이는 것으로 옮겨가셨습니다. 마침내 그분이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는 단지 “내가 해야 할 모든 일들을 다 했다.”라는 뜻만이 아니라, “나에게서 일어나야 할 모든 것들이 다 일어났다.”라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사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완성하셨습니다. ‘하는 것’으로부터 ‘받아들임’으로,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으로, ‘주도권을 쥐는 것’으로부터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죽어가는 것’으로 움직여가야 합니다. ‘하는 것’의 시간은 성공과 성취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공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요? 그 너머에 있는 진정한 결실은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우리의 삶이 의존을 통해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의존을 부담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의존 속에서 충만에 이른다고 믿는 것은 엄청난 신앙의 도약을 요구합니다. 결실보다 성공이 중요히 여겨지고, 받아들임을 통하여 오는 결실은 무시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는 하느님의 길은 ‘받아들임’입니다. 이 길은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고 싶은 길이지만,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일은 그들이 ‘하는 것’으로부터 ‘받아들임’으로, 성공으로부터 결실로, 아직도 얼마나 더 많이 성취할 수 있는가 고민하는 것에서 그들의 삶 자체를 다른 이들을 위한 선물로 만드는 것으로 바꾸도록 돕는 일입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는 것은 죽어가는 이들이 점점 더 약해지는 가운데 하느님의 힘이 선명해지는 것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죽어가면서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세대의 부모가 되어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각과 느낌, 말과 글, 꿈과 비전은 단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고 지금도 우리들 안에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야기
공의회 정신을 되새기며
이번 호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가톨릭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공의회로서, 우리 신앙인들이 나아가야 할 바를 가장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1965년에 개최된 제21차 보편공의회입니다. 왜 새삼스럽게 50여년 전에 있었던 공의회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오늘 우리가 공의회 정신을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불안정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건만 어찌된 일인지 뉴스를 통해서 비극적인 소식들을 끊임없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지구 온난화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는 끔찍한 경고를 거의 매일 접하게 됩니다. 인간 생명의 가치가 최우선시 되지 않으며, 대자연의 여러 경고 앞에서도 인간의 탐욕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류 문명은 발전해 가는데 왜 인간성의 어두운 그늘이 더 많이 드러날까요? 그리고 왜 지구 환경은 계속 파괴되어만 가는 것일까요? 여기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시대적 혼란과 인류의 파국에 대한 불안감이 교차되는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답변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찾고 실행하라는 것(마태7,21 참조)’입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의 충실한 응답과 순종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식별과 식별된 바를 실천하는 투신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진실한 고민과 작업에 투신하지 않을 때,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은 마치 모래 위에 지어진 집처럼 어느 날 모두 무너져 떠내려가고 말 수도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모두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시련이 닥치면 그 참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내진 설계 없이 지어진 건물과 고속도로가 지진 앞에서 마치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찢겨진 종이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경제학의 개념에서는 이것을 거품에 비유합니다. 거품이 가라앉으면 참된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한국 교회가 이룩한 경이로운 성장에 경탄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더욱 깨어 있는 자세로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지금 하느님 뜻에 맞게 잘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듯, 양적 팽창은 질적 하락과 연결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박해 받던 초대 교회가 313년의 밀라노 관용령, 그리고 392년의 황제 칙령을 통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에 걸어갔던 길이 바로 이를 잘 말해 줍니다. 4세기 초엽 이후, 교회가 양적으로 팽창하고 수많은 개종과 입교가 이루어졌지만, 정작 찾아온 것은 하느님 나라의 온전한 실현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속화(俗化)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세의 수적이고 양적인 팽창이나 외부로부터의 인정과 기대감에 너무 기뻐하거나 안주해서만은 안 됩니다. 지금 쉬는 신자들이 얼마나 늘어나고 있는지, 청소년층과 젊은 층이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는지, 그리고 가난한 지역에서의 복음화 비율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등을 점검해보면서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내적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전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서구에서는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성당들이 더 이상 그 유지관리비를 감당할 수 없어 팔리는 일이 가끔 생기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매각된 성당 건물은 서점, 극장, 레스토랑, 술집, 나이트클럽 등의 용도로 개조되어 사용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번성과 혜택은 순교자들의 피로써, 예언자적 증거를 하였던 분들의 희생으로써 이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방심하여 내적 쇄신과 질적 성장을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할 때, 비바람이라도 몰아치면 우리는 마치 거품처럼 혹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처럼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음을 생각하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음을 범할 것이 아니라 반석 위에 세우는 슬기로움이 진정 필요한 시점입니다(마태7,24-27 참조).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되돌아가고자 전반적인 쇄신 작업을 이룩하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하여 보다 자세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새로이 되새기며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철저한 교회의 쇄신 작업은 복음의 정신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입니다.
박준양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및 생명대학원 교수)
●● 이달의 성가
가톨릭 성가 274번
성모송
우리가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문을 꼽으라 하면 역시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이 아닐까 합니다. 그 중에서도 성모송은 특별히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는 분이라면 더욱 많이 드리는 기도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부터 성모님께 특별한 공경을 바쳐 왔고, 성모님을 우리의 어머니로 모시며 기도해 왔습니다. 성모님께 바치는 특별한 기도인 ‘성모송’은 가장 아름다운 기도문 중의 하나이기에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작곡가들이 이 곡에 선율을 붙여 노래하며 성모님을 찬송해 왔습니다. 우리 성가책에는 모두 다섯 곡이 실려 있는데, 265번 김대붕 선생님 곡, 266번 이연국 신부님 곡, 273번 그레고리안 성가, 274번 아르카덜트(Arcadelt)의 곡, 그리고 522번 이종철 신부님 곡입니다.
오늘은 274번 성가를 살펴볼까 합니다. 이 곡은 성가책에 실린 곡 중 그레고리안 성가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성모송입니다. 헨리 로리(Henry Rowley) 주교에 의해 알려진 바로는 16세기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 아르카덜트(Arcadelt)가 작곡자라고 하는데, 일각에서는 이 곡의 그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기는 합니다. 곡의 양식은 그가 살았던 16세기의 양식을 지니고 있으나 그 당시의 악보는 전해지지 않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악보는 1842년 것입니다. 이 악보는 4성부 악보이고, 교회음악을 많이 작곡했던 프랑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루이(Pierre-Louis-Phillippe Dietsch, 1808-1865)가 편곡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몇몇 사람들은 이 사람이 본래 작곡자가 아닐까 추정하기도 합니다.
아르카덜트는 태생은 확실하지 않으나 1505년경에 벨기에에서 태어나서 1568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활동한 작곡가이며, 이탈리아의 세속 노래 중 ‘마드리갈’이라는 장르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16세기에 로마 시스틴 성당의 어린이 합창단 지휘자로 12년 동안 활동했으며, 1542년에 미켈란젤로를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가 많이 작곡했다는 ‘마드리갈’이라는 노래 장르는 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세속 노래입니다. 당시 교회의 노래는 주로 각 노래 파트 선율의 흐름을 중요시하는 다성 음악이었고 보수적인 경향을 지녔으나, 이에 반해 새로운 경향은 마드리갈이라는 세속 노래들을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이 노래들은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기법과 반음계를 사용한 대담한 화성, 그리고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인 화성을 중요시 여기며 각 성부가 서로 얽히면서 짜여 나가는 것보다는 가장 높은 선율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고, 이 양식이 후에 모노디라는 양식으로 발전하며 오페라의 아리아로 발전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이 아름다운 노래 274번 성모송은 작곡될 당시에는 대단히 혁신적인 음악 양식이었던 것이지요.
성모송은 6세기에서 16세기까지 약 천년의 역사를 거쳐 정착된 기도문입니다. 명확하게 언제부터 어떻게 이 기도문을 바치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처음에 몇몇 사람들이 성모님께 바치는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고, 여러 변천 과정을 거치며 이어져 오다가 1568년 전례개혁 때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오늘날의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성모송은 크게 세 부분으로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 엘리사벳의 인사, 우리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모송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천주성자이신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님에게 이루어진 구원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교리를 담고 있으며, 그래서 이 기도문은 성모님에 관한 기도문이지만 그 초점은 하느님의 구원역사에 맞추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모송은 시골의 한 처녀 마리아를 통해서 나타난 구원역사와 그 역사를 자신의 처지를 돌보지 않고 오로지 그 뜻에 순명하신 마리아의 복되심과 그 영광을 노래하는 것이며, 바로 그 구원에 우리도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간구의 기도문인 것입니다.
성가를 노래하는 것은 두 배로 기도하는 것이라 합니다. 성모송을 말로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가끔씩은 노래로도 바쳐본다면 더 아름다운 기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상철 신부 (가톨릭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 교수)
●● 사목국 교육안내
사목국 일반교육부
■ 7월 구역(반)장 월례연수
주제 : 사회복지를 위한 구역반장의 역할
7월 |
오전 10:30 |
오후 2:00 |
6일(화) |
고척동 |
연희동 |
7일(수) |
|
흑석동, (중앙동) |
8일(목) |
서초동 |
혜화동 |
9일(금) |
창 동 |
오금동(2:30) |
12일(월) |
(불광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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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화) |
이문동 |
명일동 |
14일(수) |
구의동 |
역삼동 |
15일(목) |
대방동 |
등촌1동 |
16일(금) |
목 동 |
|
※ 8월 월례연수는 휴강입니다.
문 의 : 727-2062~3
■ 삼위일체리더십
날 짜 : 8월 24일~9월 28일 (매주 화, 5주간)
시 간 : 14:00~17:00
장 소 :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교육비 : 30,000원 (접수마감 8/17)
■ 남성 총구역장 피정
일 시 : 8월 29일 (일) 10:00~16:00
장 소 :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교육비 : 10,000원 (접수마감 8/23)
■ 여성 총구역장 피정
일 시 : 8월 30일 (월) 10:00~16:00
장 소 :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교육비 : 10,000원 (접수마감 8/23)
사목국 선교전례사목부
■ 전례꽃꽂이학교 (1년 과정 중 2학기)
대 상 : 본당 전례꽃꽂이 봉사자, 일반신자
날 짜 : 8월 26일~12월 9일 (매주 목, 15주간)
시 간 : 10:00~12:00
장 소 : 가톨릭회관 2층 강당
교육비 : 300,000원 (재료비 별도, 접수마감 8/19)
문 의 : 727-2065~6
■ ‘함께하는 여정’ 교육 1단계
대 상 : ‘함께하는 여정’ 교육을 받지 않은예비신자 교리봉사자
날 짜 : 8월 26일~9월 16일 (매주 목, 4주간)
시 간 : 19:30~21:30
장 소 : 가톨릭회관 3층 대강당
교육비 : 25,000원 (접수마감 8/19)
문 의 : 727-2065~6
사목국 성서사목부
■ 하계 구약특강
대 상 : 일반신자 및 수도자 (선착순 450명)
일 시 : 1회) 7월 12일 (월) 10:30~15:30
오경, 역사서 (이석재 신부)
2회) 7월 19일 (월) 10:30~15:30
시서와 지혜서, 예언서 (김건태 신부)
장 소 : 명동성당 꼬스트홀
교육비 : 회당 1만원 (강의록, 점심식권 제공)
접 수 : http://cafe.daum.net/BibleMot 참조
(접수기간 6/28-7/2)
문 의 : 727-2381
사목국 노인사목부
■ 노인사목후원회 미사 및 시니어 문화 마당
대 상 : 노인사목후원회 회원 및 모든 시니어
내 용 : 미사 및 강의 (노년기 외모 관리의 중요성)
강 사 : 김수경 (배화여대 전통의상학과 교수)
일 시 : 7월 6일 (화) 10:30
장 소 : 종로 성당
문 의 : 727-2121
■ 노인대학 봉사자 연수, 캠프
대 상 : 연합회 소속 본당 노인대학 학장 및 봉사자
내 용 : 야외 및 특별행사 기획법과 실제
일 시 : 7월 13일(화)~15일(목), 2박 3일
장 소 : 충남 서천 서울시공무원연수원
참가비 : 90,000원 (선착순 250명)
문 의 : 765-8456 (노인대학연합회)
■ 노인대학 봉사자 월례교육
대 상 : 연합회 소속 본당 노인대학 학장 및 봉사자
내 용 : 장수하는 식이요법
일 시 : 7월 20일 (화) 10:00~13:00
장 소 : 우리은행 본점 4층 대강당
교육비 : 7,000원
문 의 : 765-8456 (노인대학연합회)
■ 노인대학 봉사자 특별교육
대 상 : 연합회 소속 본당 노인대학 학장 및 봉사
내 용 : 특별한 전례 행사 준비
일 시 : 8월 10일 (화) 10:00~16:00
장 소 : 우리은행 본점 4층 대강당
교육비 : 10,000원
문 의 : 765-8456 (노인대학연합회)
사목국 가정사목부
■ 가정성화 생명수호 월례특강 및 미사
일 시 : 7월 6일 (화) 13:30~16:30
(밝고 건강한 청소년 성 심리)
8월 3일 (화) 13:30~16:30
(경계선 성격 청소년 원인과 예방)
장 소 : 가톨릭회관 2층 강당
준비물 : 필기도구, 미사준비 (회비 없음)
문 의 : 727-2071 (www.ihome.or.kr)
■ 낙태치유 프로그램 및 월례미사
대 상 : 낙태의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
내 용 : 생명의 소중함, 화해 및 치유 프로그램, 미사
일 시 : 7월 13일, 8월 10일 (화) 13:30~16:30
장 소 : 서울대교구청 별관 6층 소성당
준비물 : 필기도구, 미사준비 (회비 없음)
문 의 : 727-2071 (www.ihome.or.kr)
■ 74차~77차 약혼자주말
대 상 : 예비부부, 1년 미만 신혼부부
내 용 : 건강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프로그램
일 시 : 74차 7월 2일 (금) 19:00 ~ 4일 (일) 18:00, 2박 3일
75차 7월 23일(금) ~ 25일(일), 2박 3일
76차 8월 6일(금 )~ 8일(일), 2박 3일
77차 8월 20일(금) ~ 22일(일), 2박 3일
장 소 : 신길동 살레시오 회관
참가비 : 240,000원/커플
문 의 : 727-2069 (www.ceekorea.or.kr)
●● 성화에 담긴 영성
<장미 화관의 축제>는 독일 작가 특유의 세부 묘사에 이탈리아적인 인체 묘사가 어우러진 알브레히트 뒤러의 수작입니다. 케루빔이 받쳐 들고 있는 초록색 장막 아래에 성모님께서 푸른 옷을 입고 좌정하고 계십니다. 작은 구름을 탄 또 다른 케루빔들은 성모님의 머리 위에서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관을 들고 있습니다. 의자에 앉아계신 성모님의 무릎에는 아기 예수께서 비스듬한 자세로 기대어 있습니다. 아기 예수의 자세와 통통한 살점의 표현, 그리고 성모님의 옷 주름을 통해 드러나는 인체의 굴곡에서 뒤러의 르네상스적 회화의 특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작품 중심에서 성모님의 좌우로 무릎 꿇고 있는 이들은 교황과 황제입니다. 성모님은 황제의 머리에 장미 화관을 씌워주시고, 아기 예수께서는 이와 똑같은 장미 화관을 교황의 머리에 씌워주려 하십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왼편에 서 있는 성 도미니코는 주교에게 장미 화관을 씌워주고 있습니다.
교황과 황제의 뒤편에 각각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은 이 그림의 후원자들로, 모두 성모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뒤편에 있는 몇몇은 시선을 딴 데 두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작품을 보다 자연스러워 보이게 하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뒤편의 사람들 위로도 다른 케루빔들이 장미 화관을 들고 내려오고 있고, 작품 중앙 성모님과 아기 예수 밑에는 뤼트를 연주하고 있는 천사도 보입니다. 뒤러는 장미 화관을 쓰고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바치려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 봉헌과 구원의 축제 분위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지영현 신부 (가톨릭회관 평화화랑 담당)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장미 화관의 축제 (The Feast of the Rose Garlands, 1506)
목판에 유화, 162×194cm, 프라하, 국립미술관
2010년 8월 31일~9월 5일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 대회’기도문
온 세상의 주님이시고 창조주이시며 자비로우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저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시아의 거룩한 작은 고을에서 태어나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셨나이다.
주님, 구하오니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저희의 아름다움을 증거할 수 있도록 |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 대회’를 강복하시고 저희에게 성령의 선물을 내려주시며 저희 안에 성령강림의 특은을 새롭게 하소서.
또한 복음 때문에 박해 받는 이를 지켜 주시고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를 위로하여 주시며 저희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얼굴을 비추어 주소서.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의 여왕이시며 복음화의 찬란한 별이신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구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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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청 평신도평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