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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 구름 잡는 소리
덕현스님
세 번이나 순간포착에 실패했다.
하늘에 부처님 얼굴, '옴'자, 코끼리 모양의 구름이 차례차례 나타났었다. 서둘러 휴대전화를 들고 문밖에 나가 찍어 봤지만, 벌써 모양이 흐트러져버리고 난 다음이었다.
바람 많은 날. 가까이 솔숲의 바람소리도 속을 시리게 하는데, 2월 하늘의 서북풍은 얼마나 세차게 뼈대 없는 구름들을 몰아댈까.
바람은 멈춰 서는 순간 더 이상 바람이 아니다. 하여, 바람의 다른 이름은 흐름이요 움직임이고, 무상이다. 바람은 차고 더운 가운데서 일어나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변화하게 하고 생멸하게 한다. 풍대(風大)는 화대(火大)와 수대(水大) 사이에서 지대(地大)를 이기고 일어난다. 바람이 목표로 하는 방향은 찬 것과 더운 것의 통일, 그 균일화다. 부지런한 바람은 그 평등과 통합을 향하여 쉼없이 흐르지만, 순간순간의 그 흐름은 다시 천변만화의 차별상을 낳는 까닭에, 바람의 길을 가다가 어김없이 천 갈래 만 갈래가 되어 더욱 복잡하고 어지러워진다. 어떤 바람도 영원히 불어갈 수는 없다. 바람은 존재가 평등성을 향해 다가갈 때 늙어가고 결국은 쉬어, 더 이상 바람이 아니게 된다. 바람이 죽고 멈추면 싸움은 정지성과 견고성을 특질로 하는 지대(地大)의 승리가 되는 듯하지만, 이 승리 또한 결코 영원하지 않아, 다시 역전의 드라마를 향해 진행된다. 지대 속에도 반드시 차별상이 있고 그 차별상은 그대로, 다시 소생할 바람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바람의 정체는 흔히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듯이 공기의 움직임으로 파악되나, 그것만이 바람은 아니다. 바람은 물 속에도 있고 불 속에도 있고 땅 속에도 있고, 심지어 진공 속에도 있다. 불이 바람 속에도 있고 땅 속에도 있고, 심지어 몸 속에도 있는 것처럼.
존재화된 모든 것은 바람에 떠밀려간다. 생명들의 탄생과 성장과, 과정의 온갖 신진대사와, 병증과 사멸, 밤낮의 교차, 계절의 그침 없는 순환, 장대환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반복하는 우주의 역사……. 이 모든 것이 어찌 보면 바람의 이야기다. 무상의 농간이다.
왜 이렇게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무상하고 덧없고 허무할까?
누구나 다 이 무상의 칼날 위에서도 존재계의 가장 가벼워진 무게로 빛의 우아함이 되는 순간이 있다. 나도 아마 누군가의 눈길 속에서 한때 그런 순간이 있었을지 모른다. 옛날에, 옛날에, 그 푸르던 날에.
나는 그 여자를 이상한 데서 만났다.
공사판에 다니며 막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친구가, 이런데도 가 봐야 한다면서 데리고 들어간 곳은 룸살롱이었다. 먼저 나온 여자는 제법 귀엽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친구와 경계가 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처음 만난 사람과 조금도 거리낌 없이 그럴 수 있는지 놀라고 있는데 두 번째 여자가 나왔다.
그 여자가 들어서는 순간은 이 세상을 여태껏 지겹도록 잘 방영하고 있던 비디오 플레이어가 갑자기 멈칫하며 일시정지되는 느낌이었다.
그 무렵 나는 이미 출가를 결심하고 있었고, 세상 모든 여자들을 어머니나 누이처럼, 딸처럼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눈길이 부딪친 순간, 돌연 정지된 그 장면에서 나를 보고 있는 여인은, 분명 세상을 대표하는 한 여자 같았고, 새로 태어난 여신 같았고, 기억보다 더 먼 시간 전부터 한 남자를 기다려온, 우주의 여성에너지가 피어낸 꽃, 아낙이었다.
예상치 않은 순간에 채널이 바뀐듯한 어색함을 지우려는 듯, 친구가 그 여자에게 내 곁에 가서 앉으라고 명령했고 말했다. 명령에 굴복당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힘에 이끌린 것인지, 정말 그런 곳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여자는 결국, 조금 답답하고 침침한 밀실에서, 나에게로 와 앉았다.
"더 붙어. 더. 더."
어려보이는 그 여자아이는 만난지 10초도 안 된 남자 옆에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 있는 것처럼 앉았다. 오히려, 아주 우아한 블루스처럼 빛나는 그 공존의 느낌은, 위대한 마에스트로에 의해 창조된 음들이 조화의 영감으로 춤추며 그 생생한 존재감으로 시간을 뛰어넘듯, 나를 지나 저 아늑한 심연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와 그 여자가 만들어낸 침묵의 무게 탓인지, 그때부터 내 친구와 다른 여자의 농담은 조금씩 핀트가 안 맞고 튀기 시작하더니 얼마 되지 않아 한 사람씩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런데도 우리는 떨어져 있지 않았다.
시간 속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 여자는 술잔을 들어 조금씩 마셨다. 그녀의 술잔이 비어갈 때쯤 나도 잔을 들어 단번에 들이켰는데, 그 잔엔 한 영혼이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 속을 지나오며 겪은 아픔과 상처가 쓰린 향기로 담겨 있었다.
또한, 어찌할 수 없는 무상(無常)의 예감으로 …… ·
"제가 노래 한 곡 불러 드릴까요?"
그녀가 처음 하는 말이었다. 그 얼굴을 돌아보며, 아까 그 시간 없는 심연 속에서, 그녀의 상반신을 끌어당겨 어깨를 한 번 껴안았던 기억이, 상상 속의 사건처럼 떠올랐다.
그것은 전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의식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존재의 만남이 파생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사로 안에서 되새김질 되고 있을 뿐. 문득, 그날 일터에서 돌아와 아직 씻지 않았다는 자각이 죄책감처럼 들었다. 고맙게도 그것은 곧, 세상에서 만난 정말 아름다운 한 여자의 슬픈 목소리를 통해 씻겨나가고 있었다. 젊어서 죽은 어떤 남자가수의 노래였다.
노래의 여운이 내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친구 마에스트로가 들어와 가자고 했다. 연주가 끝났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몹시 힘들게 그녀의 자력으로부터 벗어나, 친구를 따라 나왔다. 그녀는 배웅 나와 있었지만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을 뿐, 끝까지 나를 보지 않았다.
다음 날도 막일을 하러 가야 했다. 구름 위를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다리에 힘이 가지 않았지만. 물론 화두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그 다음 날도……. 저녁에 돌아오다가 그 룸살롱 간판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다. 받아요. 제발……. 그녀가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순진한 놈아, 그만 끊어."속으로 자신의 조소어린 명령을 듣고 있는데, 문득 신호음이 멈추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화들짝 일어났다.
"나 기억하세요? 그저께 친구랑 둘이 갔었는데."
"…….잊어버려야 하는데, 기억이 나요."
"……. 밖에서 언제 볼 수 있을까요?"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언제 봐요?"
"……. 일요일 오전 열 시에 봐요."
"어디서?"
"……. '빛과 그림자'. 카페예요. 근처에 있어요."
일요일. 열 시가 조금 지나면서 시간이 점점 느리게 기어가기 시작하는데, 디제이가 와서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저 그 룸살롱에서 도망쳐 나왔어요."
"네?" 지금 어딘데요?"
"Ο Ο 대 근처 친구 집요."
"아니, 왜"…………? 애초엔 왜 그런 데 있었어요?"
"오빠 친구 업소였는데 한번 와
보라고 해서 믿고 갔다가…….
잡혀있었던 거예요."
내
목소리는 활시위보다 더 팽팽해졌다.
"좋아요. 지금 내가 거기로
갈게요."
"아니 오지 마세요. 위험할 수
있어요……. 다음 일요일에 Ο Ο 대 입구 정문 앞에서 봐요. 또 열 시에요.
지금 전화 끊는 게 좋겠어요."
다시 일주일을 구름 속에서 헤맸다. 함께 무술을 연습하기로 했던 친구에게 얘길 했더니 어쩐지 삼류영화 같다고 했다. 나는 이 세상이 삼류영화보단 조금 나아서 2류영화 정도는 된다고 말했다. 결국, 그 친구가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Ο Ο 대 앞에서 일찍부터 기다렸다. 열한 시쯤이 되자 초조함과 좌절감이 뒤죽박죽 엉키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에게 여기 Ο Ο 대 들어가는 문이 또 있느냐고, 정문 앞이 맞느냐고 물었다. 여긴 후문이고 정문 아니라는 대답이 날아와 이마를 쳤다. 하마터면 불쑥 치밀어 오르는 화를 그 사람에게 터뜨릴 뻔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정신없이 정문과 후문 사이를 거의 뛰다시피 오가며 두 시간을 계속 허탕만 쳤는데, 남는 것은 끝내 100프로의 좌절감이었다.
아, 인생은 4류영화인가 보다. 삼류영화도 이렇게 끝나지 않았는데……. 부처님께선 4문을 유관하고 출가를 결심하셨는다는데, 말세의 중생은 Ο Ο 대 정문과 후문, 2문을 오락가락하다 결국 출가를 하게 될 것인가.
왜 이렇게 세상 온갖 것들이 다 무상하고 덧없고 허무할까? 무상은 너무나 빠르고, 한 순간도 멈춰서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온갖 것들이, 그 무엇이 무상하다는 말조차도 붙일 수가 없다. 그 무엇도 '이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다른 것이 되어 있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찰나간에도 포착할 수조차 없이 빠른 변화 그 자체일뿐인데, 무엇 하나를 따로 떼어 이것이다 저것이다 할 수 있으랴. 이것이다, 저것이다, 나다, 너다 하는 것은 온통 망상이요, 실체없는 환상이요, 가정일 뿐이다, 공(空)이다. 수학에서, 사실은 없는데 존재한다고 가정한 허수, i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 무엇도 사실은 인식의 오류일 뿐, 플라톤은 우리가 실재한다고 경험적으로 인식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이데아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가정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우리는 이 세상에 '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시하고 어딘가 일그러져 있고 정학하지 않아서 사실은 원이 아니다. 완벽한 원이란 우리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실체다. '점'이라는 것도 아주 큰 비율의 확대경으로 보면 결코 점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인체의 좌우는 얼핏 보아 좌우가 대칭인 것 같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이지, 그 누구의 몸도 좌우가 정확히 같지는 않다. 절대적인 '미'? 그 또한 결코 현실 속에는 없는 것.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가 미인이라는 것은 전설이요, 그저 사람들이 하는 말이며, 그렇게 통용되는 약속일 따름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언명은 망발이 아닌가? 생각을 관찰할 수 있다 해도 어떻게 그것이 바로 '생각하는 자'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가? '생각하는 자'가 있다 해도 무엇을 근거로 그것이 바로 '나'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나가 존재한다'는 것은 순전한 엉터리 가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픽션들이 사실 환각이며 환각작용을 증폭시키고 중독성이 있듯이, 현실의 이 세상 흐름 자제도 역시 하나의 픽션이며, 환각이며, 환각작용을 증폭시키고, 중독성이 있다!
세상 모든 존재라는 것이 사실은 인식의 오류에서 생겨나고, 오류 그 자체일 뿐인데, 이 인식의 오류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부처님이 깨달으셨듯이 우리의 생사가 단순한 인식의 오류라면 이 인식의 오류는 왜 생겨나서 우리를 괴롭히고 피곤하게 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꿈속에서 헛웃음을 짓고 식은땀을 흘리고, 소설을 쓰거나 읽으며 울고 웃고 분개하고 슬퍼하고, 공상과학영화나 납량영화나 코메디나 비극의 영화를 종류대로 보고 연극은 더 많은 돈을 주고 보고 진짜 같다고 감탄하면서 감동하고, 만화를 읽고 키득거리며, 도대체 왜 이야기란 이야기에 온통 빠져드는 것일까? 대관절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대로의 우리를 권태롭게 하고, 잔치나 축제를 찾아다니고, 게임과 오락과 도박과 마약에 빠져들게 하는 것일까?
인식에 바른 것과 오류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모든 인식 자체가 오류요, 터무니없는 것이다. 왜 점을 동그랗게 몇 개 찍어 놓으면 원으로 보일까? 왜 날아가는 기러기떼가 V자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일까? 왜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 따위가 순간적으로 부처님으로, '옴'자로 코끼리로 보일까? 왜 밤하늘의 저 일곱 별은 국자로 보일까? 왜 꿈에라도 너를 보고 싶고, 어쩌다 만나면 그지없는 행복에 겨울까? 왜 사진이나 영사막에 비친 빛, LED화면이 일으키는 빛의 조합과 변화를 보고 울고 웃고 짜릿함을 느낄까? 왜 글자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머리를 쥐어뜯을까? 왜 그냥 소리일 뿐인 사랑한다는 말에 가슴이 뛸까? 왜 그놈만 생각하면 이건 그냥 생각일 뿐인데 화가 나고, 본다고 해도 본 것은 그놈이 아니고 그놈의 이미지일 뿐인데, 놈을 보기만 하면 죽이고 싶을까?
붉은색을 보고 왜들 흥분할까? 다 잃어버릴 걸 왜 구하여 얻으려고 할까? 결국 죽을 거면서 왜 살려고 할까? 왜, 왜, 왜?
이 얼토당토않은 환영들, 이렇게 우리를 농락하는 착각들, 안개 속에서 피어나는 끝없는 과대망상, 관계망상, 편집증, 조울증……
부처님의 통찰에 의하면 환멸문(幻滅門)의 연기, 그 최초의 근원은 홀연히 일어난 무명(無明)이다. '홀연히'라는 말은, 모든 것의 인과를 밝혀 아시고 명쾌하기 그지없이 연설하시는 부처님께서는 좀 의외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말만큼 무명의 연기를 적실하게 표현하는 말도 없다. 무명이 '홀연히' 일어난다는 것은, 사실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난다는 말이고, 뜬금없다는 말이고, 더 이상 추적할 수 있는 원인이 없다는 말이며, 허황되어 그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무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중생의 착각일 뿐이며 그것이 멸한다는 일조차도 사실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표현대로, 반야로 비추어보면 무무명(無無明)이요, 무무명진(無無明盡), 그러니까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한다는 일도 실제로는 없는 일일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진여문(眞如門)의 실상(實相)이다. 그리하여 진여문은 환멸문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무명이 사라져 진여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무명이 본래 없으므로 그대로 진여이며, 무명이 다하는 바도 없으니 진여를 따로 세울 것조차 없는 것이다.
문수보살이 아주 오랜 육도만행(六度萬行)에서 돌아오자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그대는 그동안 정말 많은 것들을 보았겠구나."
"먼지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
부처님은 미소를 지으셨다.
"먼지는 보았던가?"
"사실은 먼지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조주스님께 제자가 와서 물었다.
"부처님은 어디 계십니까?"
"법당 안에 있지."
"법당 안의 부처님은 흙으로 빚거나 나무 따위를 깎아 만든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니 부처님은 어디 계십니까?"
"법당 안에 계신다."
가장 진실되게 굴자면, 입을 벌리기만 하면 벌써 그르치니(開口卽錯, 할 것이라곤, 말 하려고 하는 놈, 무슨 수작을 하는 놈, 소리치고〔할(喝)〕, 두들겨〔방(榜)〕쫓아내거나, 입 닫고 가만히 있는 것〔양구(良口)〕뿐이다.
쳇! 내가 룸살롱에서 안았던 그 여자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아까 찍으려고 했던 구름은?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其中一物常獨露
淡然不隨於生死
무슨 뜻이냐고 묻는가? 검은 것은 글씨요, 하얀 바탕은 종이로다.
틀렸다고? 에라, 그럼 더 틀리 게 한 번 새겨 보자.
생겨나는 것들 다 어디서 오고
죽고 나면 다들 어디로 가는가
태어난다는 일,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는다는 것, 그 조각 구름 사라지는 일인데
그 가운데 한 물건 언제나 홀로 드러나
맑고 맑은 그대로, 생사를 따르지 않네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그 여자가 그립다. 그리움은 가슴에 피어올라 코 끝에 이르는 바람.
소식지 法華법화 2012 / 1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던 글이었네요^^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_()_
사진 참 좋습니다!
불법을 만나고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알았지요.
그저 스치는 인연일지라도 여러 생을 맺어 온 사이이니 함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