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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포(藥圃) 정탁(鄭琢)선생 은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이충(鄭以忠)의 둘째아들이며, 중종21년 (丙戌, 1526) 10월 8일 외향인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에서 출생.
藥圃 鄭琢(1526~1605)은 본관이 청주(淸州)로 중종 21(1526) 10월 8일 예천군 용문면 하금곡에서 충의 차남으로 태어나 17세에 퇴계의 문하생이다.
1558년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600년(75세)에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특히 임진왜란(1592년 67세) 때 충성을 다한 명재상이다.
그는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등 명장을 발탁하여 국난을 극복하였다. 선조 36년(1603) 사직을 청하고 노년의 몸으로 향리인 예천으로 돌아와 보문면 고평동에 은거를 하였다.
이듬해 호종공신 3등으로 서원 부원군에 봉해졌고, 忠勳府에서 畵師를 보내어 초상을 그렸다.
선조 38년 9월 고평 집에서 숨을 거두니 1605년 9월 19일 향년 80세다.
그의 묘가 있는 본리 새랄부락 동구에 들어서면 당수 나무 세 그루가 금줄을 두르고, 마을 중앙으로 흐르는 개울을 경계로 하여 예천군과 안동시로 나뉘었으나, 지금은 개울을 복개하여 골목길로 변하였다.
이 길을 따라가다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예천 청주 정씨 재실`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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