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에 퇴근하는 길에 콩밭으로 향했다.
부르릉
경쾌한 엔진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렸다. 예초기로 콩을 베기로 했다.
그러나 한 줄 베다 말고 포기해야 했다. 여름에 웃자라 이리저리 쓰러지고 어떤 것은 덩굴져 엉켜있어서 도저히 예초기로 벨 수 없음을 알았다. 제기랄.
꾼은 할수없이 낫을 찾아들었다. 예초기로 하면 빨리 할 수 있었을 테니 낫으로 한포기씩 베려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가을해는 짧았다.
낫으로 두 고랑을 베고 나니 벌써 사위가 침침해져 있었다. 꾼은 주말농부의 비애를 맛보았다. 여름에는 퇴근해서 한참동안 할 수 있었던 일을 고작 한시간도 못하겠으니 400평이나 되는 콩을 꺾는 일을 양반처럼 밝은 낮에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승처럼 쓰려면 개같이 벌라고 했으니 밤작업도 불사해야 했다.
<어쩜 좋아.> 꾼은 해결방법을 고민했다.
맞다! 언제부턴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무릎을 탁 치는 습관이 들어있었다. 무릎이 얼얼할 정도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불달린 모자.
등산다니거나 낚시하는 사람들이 모자에 불을 달고 다니는 것을 보았던 터였다.
집에 도착한 꾼은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여보 얼른 씻고 식사부터 해야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데...”
“당장 하지 않으면 당신이 차려 드세요. 당신 때문에 식구들이 밥 못먹고 기다린 거 몰라욧.”
“알았수.”
꾼은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꾼의 아내는 항상 유교식이었다. 맛난 게 있을 때 꾼이 없을 때는 다른 식구들이 기다려야 했고 꾼이 없으면 아무리 늦어도 식사를 하지 않고 기다리게 했다. 처음에는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좋아했으나 그것은 또 하나의 속박이었다. 불만을 이야기하면 부부전쟁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꾼은 꼬리를 바로 내려버렸다.
3일만에 물건이 왔다.
LED 전구 세 개가 붙어있는 작은 뭉치인데 챙있는 모자에 끼워서 쓰도록 되어 있었다. 값은 만원정도였다.
“여보 오늘은 콩밭 평정을 해야 하니 늦더라도 아이들과 저녁을 먼저 먹어요.”
꾼은 비장한 결심을 했다. 밤늦더라도 이틀동안에 콩을 꺾어야 한다고.
서리내려 잎이 죽었어도 풀 잔해들이 많았다. 친환경농사랍시고 풀농사 때문에 기세가 대단했다. 콩을 꺾으며 풀도 함께 베어야 하는 일이 몹시 성가셨다. 꾼은 11시까지 이틀동안 강행군하여 이틀에 모두 베어 넘겼다.
<헤드랜턴, 쓸만하군.>
<쓸데없는 비가 왜 이리 내리는 거야?>
동생과 함께 작업하기로 한 날인데 아침부터 꾸물거리더니 토요일 오전근무 후 퇴근하자마자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목말라 죽는다 할 때는 내리지 않던 비가 서리내려 김장거리가 성장을 멈춘 이 때에 내리는 비가 몹시 못마땅했다. 높은 산 밑의 밭의 콩을 이틀동안에 베어넘겨야 하는데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비예보가 있어서 내리는 것은 예상했지만 정확히 맞추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여름에는 가능성 100%라고 해도 비가 안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 내리는 비는 가능성 60%라고 예보하여 문제없다고 생각했었다. 머피의 법칙이란 이런 걸 말하는 걸까?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꾼은 퇴근하자마자 책을 뽑아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농사꾼 이야기>였다. 가을 수확 후 마늘을 심고 상추를 뿌려놓으면 다음해 봄에는 마늘 사이로 상추가 자라서 풀이 자동으로 제어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많은 상추씨앗을 구할 수가 없었기에 꾼은 상추씨앗을 뿌리는 대신 낙엽을 덮기로 했다. 낙엽을 두툼하게 깔아주면 얄미운 풀이 덜 나올 거라 여겼다. 다른 낙엽보다 은행잎 낙엽이 땅속의 나쁜 벌레도 잡아줄 거라 생각했다.
비가 어느 정도 그쳤다.
<부뚜막의 소금도 한 줌이라도 집어넣어야 짠 거야.>
가까운 철물점에서 마대자루를 오십여장 사서 동네놀이터 은행나무 밑으로 갔다. 갈퀴로 은행잎을 긁어 마대자루에 담았다. 물먹은 은행잎이라 많이도 들어갔다. 여우비라더니 언제 그쳤나 싶더니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했다.
“어이쿠 추워.”
꾼이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갈퀴에 묵직한 게 걸렸다. 이건 뭐야?
플라스틱 맥주병 대여섯병이 나왔다.
<이게 웬 횡재냐? 두었다가 벌레잡는 기피제로 써야겠다.>
놀이터의 모래를 얼개미로 치면 동전이 무수히 나온다더니 낙엽청소하는 착한 꾼에게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라 여기고 잘 모셔 두었다.
“허얼, 누가 가져갔네.”
10분이나 지났을까?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새끼들 넷, 지지바 넷이 짝을 이루어 나타났다. 새끼들은 하나같이 담배를 물고 지지바들은 조잘대며 오더니 새끼들 중 하나가 그렇게 외쳤다.
<이크!>
꾼은 바로 들킨 것 같아 뒤꼭지가 무척 땡겼으나 모르는 척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한 녀석이 근처 슈퍼로 뛰어가더니 두툼한 맥주봉지를 가져오더니 일행들이 사라졌다. 꾼이 없었더라면 놀이터에서 마시고 갔을 터이지만 어른 있는 곳에 마시기엔 술맛이 없었으리라.
<녀석들 그래도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군. 그래도 뒤꼭지가 몹시 땡겼어. 무슨 주책이야 이게>
띠리링
“네 동생녀석이 서울 가더니 눈탱이 맞고 들어왔다.”
“엄마, 동생이 어디가서 패싸움이라도 했나요?”
꾼 형제들은 패싸움에 말려들 정도로 강심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짐짓 물었다.
“서울에 데모질한다고 가더니 그랬다는구나. 요즘 바빠 죽겠는데 얻어 쳐먹을 일 났다고 데모질인지 몰라. 많이 다친 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진 말아라.”
뚝. 꾼의 어머니는 자신의 할 말이 끝나면 다짜고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꾼은 더 물어볼 말이 없었다.
<요즘 농사꾼도 데모할 일이 있나? 눈탱이를 맞을 정도면 대단한 시위를 한 모양이군.>
35부에 계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