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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申外淑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팔부터 낚아챘다. “왜 이러는 거야?”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 팔 놓고 얘기해.” 내가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가자 뒤따라온 그녀는 그만 내 바짓단을 붙들고 대로변에 주저앉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창피하게 사람들이 보잖아.” “가지 말아요.” 그녀는 글썽글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애원하고 있었다. 이년 전만 해도 내게 온갖 포악을 다 떨고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서더니 이게 웬일인가. 난 너무도 어이가 없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다시 한 번 내 팔목을 붙잡았다. 인사동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전통 찻집에 마주 앉게 되었을 때 그녀는 또 다시 눈물 세례부터 퍼부었다. 얘기인즉슨 애초부터 자신에게는 헤어질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무관심한 내게 일부러 도전 의사를 비추어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헤어지는 남자가 어디 있냐며 그녀는 눈물을 떨구었다.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제 입으로 헤어지겠다고 말해 놓고서 이제 와서 아니라니… 어쨌든 그때 내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은 하신 거예요?” 그녀는 생각난 듯이 물으며 내 손가락을 살폈다. “참 일찍도 물어본다.” “안 하신 거예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면서 재차 말했다. “그런데요 너무너무 많이 뵙고 싶었어요” 그녀가 탁자보 귀퉁이를 손으로 잡아당기며 살며시 웃었다. “아까 얘기했잖아” “그래두요” 처음부터 죽자사자 따라 다닌 건 내가 아니고 지혜였다. 대학서클 동아리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는 후배 녀석의 여자 친구였다. 처치곤란의 진드기여서 몹시 귀찮았는데 마침 잘 되었다며 속시원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녀석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녀석은 내가 그녀와 교제중이란 소문을 듣자마자 소주병을 나발불고 다닌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고 찾아왔다. 강의실. 식당. 도서관. 아르바이트하는 장소… 그리고 내 주변에 여자가 얼씬거리기만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 들었다. 미인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밉상도 아니어서 나도 그리 싫지만은 않았었다. 그러나 워낙 감정표현에는 둔재인지라 난 그녀에게 별다른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지냈었다. 아르바이트와 논문준비를 하느라 몹시도 바빴고 또 취직 준비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는 시간만 나면 찾아와 자신과 함께 유학을 떠나자고 졸랐다. 내가 알기엔 적어도 그녀는 공부체질은 아니었던 것 같다. 빈 강의 시간을 이용해 라켓볼이나 치러 다니는 주제에 유학이라니… 난 코웃음을 치며 단연코 No라고 대답했다. “난 졸업하면 취직해서 가계를 책임져야 할 몸이라구.” “그럼 난 어떻하구요?” “그건 니가 알아서 할 일이구.” “그뿐인가요?” “그럼 내가 너한테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주기를 바라니?” 난 당연한 듯이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졸업 때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먼 발치에서 내가 보일라치면 제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 처음에는 쟤가 왜 저러나 싶었고 그 다음에는 이상하다 싶었고 그 다음엔 허전함과 분노 같은 감정이 밀려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부터는 내 쪽에서 그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없는 용돈을 쪼개어 레스토랑에서 맥주도 사주고 아이스크림도 사줘가며 이유를 물었지만 그녀는 잘 대답하려 들지를 않았다. “졸업하면 뭐 하실 건데요?” “취직해야지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있거든 그 부양의무가 내게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었고 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그날따라 그녀는 값나가 보이는 실크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그런지 어느 때보다도 격조있는 분위기였다. 동대문 시장에서 포목상을 한다는 그녀의 부모는 꽤 큰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하고 다니는 행색이 고급 일색이었다. “괜히 저까지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네요.” 그녀는 말끝에 묘한 비웃음을 매달고는 눈을 내리 깔았다. 그녀에게 너무 자신만만했던 게 화근이었을까. 그녀의 태도가 점점 냉냉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별의 전초전일 줄은 난 꿈에도 알지 못했다. 옛날보다 얼굴이 많이 야위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때 제가 많이 성가시게 굴었죠?” “아니야.” “정말요?” “절대로 아니야.” “그럼 나 어땠어요 사랑했었나요?” “그건… 그렇지만 이것만은 분명해 난 늘 지혜가 내 곁에 있어 주었으면 그런 생각을 했었어.” “사랑해요.” 들릴락말락 그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에 기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나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그냥 여러가지를 했었어요.” “여러가지라니….”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뭐 힘든 일이라도 있었나?” “네 좀….” 그녀는 창 밖의 거리에 시선을 두면서 울먹거렸다. “엄마가 돌아 가셨어요.” “저런.” “그리고요 문기씨도 많이 보구 싶었어요.” 그럴테지, 죽음의 실체를 보았을 땐 그리움이 더해지는 법이다. 그래서 얼굴이 몹시도 야위었구나. “그런데 직장이 이 근처신가봐요.” “응 이 근처 잡지사에 다니고 있어 작년까지는 신문사에 다녔었는데 퇴출대상이었나봐 짤렸어.” 어머나? 그녀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우습고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지혜는 뭐하고 지내지?” “저는 신림동에서 아동미술학원을 운영해요.” “잘 돼?” “그냥 그럭저럭요 오늘 인사동 나왔다가 문기씨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기적 같아요.” “나도 그래.” 난 지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계모와 두 여동생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계모는 문 밖만 나서도 죽는 줄 아는 여자였다. 평상시에도 아버지의 눈길이 무서워 나다닌 적이 별로 없었지만 아버지의 사후에는 더 밖에 나가는 걸 싫어했다. 동네 시장에 가 반찬거리를 사는 것 외에는 집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두 딸의 귀가 시간이 조금만 늦어지면, 안절부절하다 문지방을 넘어서는 딸에게 일찍 다니라고 성화를 해댔다. 상처한 지 1년도 안 돼 맞아들인 재취였다. 계모는 아버지의 학교 제자였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계모의 나이는 스물 아홉이었다. 나는 계모의 존재를 아예 무시했고 무관심과 냉대로 일관했다. 집안에서 난 절대로 계모에게 호칭을 부치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제 에미를 닮아 차갑기가 뱀 같다며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아버지와 면대하는 일조차 없이 지내다가 군대를 가 버렸다. 군에 복무하다가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들었고 난 어쩔 수 없이 집안의 가장이 되어 버렸다. 어릴 때도 그랬지만 성인이 된 지금에도 난 본시부터 정이 없는 성격이다. 사람을 봐도 반가운 내색이나 싫은 표정은 하지 않았고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가만 골똘히 생각하며 살아온 터였다. 10년이나 어린 제자를 아내로 삼은 아버지를 증오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체면과 도리를 아는 것이다. 그것을 상실했을 때 그건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난 알콜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이성을 잃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극히 경멸하고 외면하며 살아왔다. 다행이랄까 계모와 두 여동생은 아버지와는 안 닮았다. 오히려 내 쪽에 더 가까웠다. 흐트러짐 없는 행동거지로 내 시선 안에 움직이고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난 부양의무를 착실하게 지켜가고 있었다. “지혜라는 아가씨한테 전화왔던데 어떤 사이냐?” 이미 오십 줄에 들어서고 있는 계모는 불안한 표정으로 내 의향을 묻는다. “그냥 아는 사이에요.” “그래애.” 말꼬리를 내리며 계모는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난 문득 내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쇳덩어리를 느낀다. 나를 향한 계모와 배다른 두 여동생의 눈빛.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은 이미 성숙한 티를 벗었다. 장래희망이 모델이라며 내 앞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아 보인다. 아닌게 아니라 늘씬한 체격이 모델감이다. 그보다 한 살 적은 막내는 장래 희망이 교수라며 두꺼운 안경테를 들어올리며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다. 돈 덩어리들…. 계모는 계속해서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일부러 내 쪽을 바라보며 여동생이 기특하지 않느냐며 동조를 구하는 표정이다. 핏줄을 향한 모성애의 지극한 정성이 그녀의 딸들에게 흐른다. 난 문득 심각한 소외감에 젖는다. 기업퇴출이니 재무구조 조정이니 하면서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아우성치는 판에 계모와 두 여동생은 너무도 평안하다. 그 무모한 평안이 내게는 무척이나 버겁다. 난, 두 손 탈탈 털어버리고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상념에 사로잡힌다. 어느 날 신문사에서 퇴출이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난 뒤통수를 날카로운 칼로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표정으로 회사 정문을 나서는데 발걸음이 허공을 내 딛는 것 같았다. 난 그때 삶이 그토록 절박한 것인 줄 처음 알았었다. 인간이 도리와 체면을 지키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퇴출이란 있을 수 없다고 자위해 온 터였다. 다행히 신문사와 연계한 자매지에 취직이 되긴 했지만 난 극심한 불신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상대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만 어긋나도 난 곧바로 상대를 불신했다. 직장의 그 어느 누구도, 내가 만나서 취재하고 업무상 꼭 가야 하는 만남의 장소에서도 난 먼저 불신감을 무기로 상대를 관찰했다. 사람의 감정을 수치적인 계산으로 측정한다면 기쁨이나 만족감은 100이 될 것이다. 그러나 슬픔이나 허탈감, 분노, 배반감, 불신감은 그 측정지수가 0이 될 것이다. 나는 감정의 잣대를 아무에게나 함부로 휘두르면서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들고 있었다. 사회의 저명인사나 연예인을 만나 대담하고 취재한 것을 기사로 올리는 나는 그들의 표정과 미세한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늘 세밀한 관찰자가 되었다. 난 매양 똑같이 그런 짓거리를 되풀이했고 그것이 시들해지면 거리도 뛰쳐나가 자신도 모르게 피울음을 삼켰다. 아니 난 자신을 잊고 마구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었다. 고정화된 나의 틀을 벗어버리고 인간답지 않은 나를 잊어버리고 싶었다. 평소 주벽이 심한 편집장은 농담을 할 적마다 늘 나를 끌어들였다. “이 기자 오늘 단란주점 오픈하는데 우리 같이 갈까 오늘 술내기 시합에서 누가 이기나 해봐야지.” “그야 물론 이기자가 이기겠죠 이기자! 빅토리! 승리! 아닙니까?” 차 기자가 옆에서 거든다. 난 말없이 사무실을 빠져나와 인사동 거리를 걷는다. 「고서 삽니다」 윈도우에 붙여진 누런 종이를 들여다보며 난 함부로 갈 짓자 걸음을 걷는다. 삭막하고 메마른 가슴속에 불덩이가 올려지고 있었다. 뜨거워진 가슴이 목구멍을 치받고 머릿속을 태우고 있었다. 기사가 나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잉꼬부부가 이혼부부로 변신한 것은 예사였다. 견실한 기업가가 자산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갈취한 사건은 이제 신물이 날 만큼 흔한 일이어서 더 이상 기사거리도 되지 않았다. 좀더 쎈셔날 하고 드라마틱한 것, 자극적이고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킬만한 그런 기삿거리를 찾아내는 게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더 정보에 민감하고 민첩해야 했다. 남들이 다루지 않는 르포 특종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 모두가 불신감을 전제로 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지혜였다. 새로 산 검은 쌕을 어깨에 매고 짧은 반바지를 입은 그녀는 어느 때보다 늘씬해 보였다. 쪽 뻗은 각선미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눈가에 내려 앉은 검은 그림자가 왠지 불안해 보였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거야?” “아무래도 학원을 처분해야 할까 봐요.” “왜?” “수지 타산도 안 맞고 신경쓰는 것도 귀찮고….” “신경 안 쓰고 되는 일이 어디 있다고 그래?” “문기씨는 그럼 제가 그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건가요?” “그거야 지혜가 알아서 할 일이고….” “언제나 타인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하긴 항상 그래왔으니까요.” “오늘 정말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군 사뭇 시비조야.” “시비조라구요? 그렇게밖에 말씀하실 수 없는 건가요 하긴 옛날부터 쭉 그래왔으니까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왜 힘들어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잖아요.” “오늘 정말 이상하군 그런 식으로 말하지마 나도 요새 힘들어.” “아빠가 문기씨를 만나고 싶어해요.” 속으로 아차! 했다. 그래서 단단히 화가 나 있었구나. “언제쯤이 좋을까요?” “…………….”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 있더라구 말씀 드릴까요?” “요새 많이 바쁘니까 시간 나는 대로 찾아뵙겠다구 말씀드려.” 그건 사실이었다.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하고 계모와도 상의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난 당연히 지혜가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 반대였다. “저한테도 자존심이 있다는 걸 명심해 두세요.” 자존심…. 싸늘해진 표정으로 일어나면서 그녀는 말없이 카운터로 걸어갔다. 지갑을 열어 값을 치르고 나서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계모가 식당을 해 보겠다고 나선 건 그 무렵이었다. “문기 너도 결혼을 해야할 테고 네 여동생들도 곧 대학엘 보내야 하는데 이렇게 앉아 있기엔 너한테 미안하단 생각이 들어서….” 계모는 시선을 방문께로 향하더니 말꼬리를 흐렸다. “모아 놓은 돈은 있으세요?” 생각과는 달리 엉뚱한 말이 튀어 나왔다. 당초 예상했던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계모는 저으기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 담보로 대출 좀 받으면 안될까?” “세상물정도 모르시면서 그만 두세요 식당일이라는 게 얼마나 중노동인지 아세요?” “쟤들 학비라도 보탤려면 내가 그거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손아귀에 쥔 힘이 스스로 빨려 나가고 있었다. 인간의 도리와 체면이란 단어가 이 순간에 떠오르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미술학원을 처분해야겠다던 지혜의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정히 소원이라면 해보세요.” “고맙다.” 계모의 환한 모습이 난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불길한 예감이 내 뒤통수에 달라 붙는 걸 난 그리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그건 거의 치유불가능한 정신병의 원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썩어빠진 세상을 취재하느라 생긴 직업병이겠지 스스로를 진단했다. 불신감 그것은 항상 불길한 예감을 동반한다. 부자유와 불안, 극도의 혼란 속으로 끌어들이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끊임없는 自我의 흔들림. 잠시라도 경계를 소홀히 했다가는 허를 찔리고 마는 내부의 성벽, 그것이야말로 마음의 감옥을 만드는 불신감의 시초인 것이다. 기사가 마감되는 대로 지혜를 만날 작정이었다. 미술학원을 처분했는지 어쨌는지 알아볼 겸해서였다. 퇴근시간이 가까워 오자 난 지혜에게 핸드폰을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았다. 발신자 표시가 되어 있어서 금방 연락이 올 줄 알았는데 30분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문자 메시지를 날려 보았다. 그래도 연락이 없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난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상심한 마음을 달랬다. 퇴근 후에 대포나 한 잔 하자는 차기자의 권유를 뿌리친 채 밖으로 나온 나는 그녀와 우연히 만났던 인사동 네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 단장한 거리는 깨끗하고 화려해 보였지만 왠지 썰렁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경제 한파가 제일 먼저 화랑가에 몰아쳤기 때문이다. 가격을 아무리 다운 시켜도 그림 매매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녀의 무리가 내 앞을 가로질러 갔다. 안국동 네거리에서 경찰차가 싸이렌 소리를 내며 한국일보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할 일 없이 종로 쪽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갑자기 119구급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복잡한 차량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다급하게 울려대는 소리는 급보를 전하기라도 하듯 마구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뭔가 허전한 느낌이 내 발목을 붙잡나 했는데 난 그때 비로소 느낄 수가 있었다. 그건 지혜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아버지가 계모를 처음 데리고 나타난 것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어머니를 파묻은 지 1년도 채 안 되는 시기였다. 이모집에 가 있다 얼떨결에 불려나온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 차렸다. “새엄마다 인사해라.” 앳돼 보이는 계모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여 누나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순진해 뵈는 눈망울을 굴리며 계모가 물었다. “문기구나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다.” 나는 인사도 않고 아버지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모집으로 갈 거야.” 난 끓어오르는 적대감으로 집에만 들어오면 입을 붙이고 살았다. 불신감의 시초 는 아버지에게서 비롯되고 있었다. 사도(帥道)의 표징이었던 아버지는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강직한 인물이었다. 생모와는 같은 직장에 근무했던 동료교사였다고 한다. 자신과는 반대되는 매몰찬 성격의 어머니가 마음에 들어 적극적으로 구혼해 성사가 이루어 졌었다고 한다. 집안에서도 근엄하고 올바랐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늘 경어를 썼다. “당신 몹시 피곤한 모양인데 직장을 그만 나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럼 나보고 문기나 보면서 집안에서 썩으란 말예요?” “자식을 키우는 일이 어때서 그럽니까?” “난 집안에만 있으면 답답하고 숨이 막혀서 못살 것 같다구요.” “당신이 피곤해 하니까 하는 말이오.”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친자식인 내게도 특별한 관심이나 애정표현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를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사뭇 정중했었다. 지극한 정성과 애정표현은 자식인 나도 경외할 정도였다. 그런 어머니가 어느날인가 새벽 1시가 넘어도 들어오지 않는 일이 발생했다. 이튿날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집은 나서던 아버지는 저녁 무렵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헝크러진 머리칼에 온몸이 먼지투성이 아니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모가 어린 나를 끌어안고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불쌍한 우리 문기… 이 어린 것을 두고 먼저 가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뺑소니 교통사고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원망하는 아버지의 넋두리는 두 달이 넘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채 1년도 안 돼 계모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난 용돈이나 학비를 타는 일 외에는 일체 말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안가 허물어지고 말았다. 계모가 연년생으로 두 여동생을 낳은 것이다. 아무리 배가 다르다고는 하나 핏줄이었다. 온갖 여우짓을 다 떨어대며 매달리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특히 막내 여동생은 유난히도 나를 더 따랐다. 온순한 성격의 계모는 내가 두 여동생을 좋아하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버지로 인해 생긴 불신감과 증오심이 두 여동생으로 인해 차츰 녹아지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의 부고장이 날아든 것이다. 여기에서 불신감은 조금씩 싹을 틔워가고 있는지 몰랐다.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역시 계모 밑에서 성장한 계모는 평상시 존경해 마지 않던 스승이었던 아버지에게 몸과 마음을 의탁하고는 난생 처음으로 행복했었다며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을 의탁한다는 표현은 얼마나 무책임하고도 전근대적인 발상인가. 자신의 운명을 팔자와 연계시켜 타인에게 맡겨 버리겠다니… 그러나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일뿐 더 이상 무슨 이유가 추가된단 말인가. 사랑은 理性的인 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한낱 감정에 기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오직 주관적인 시선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결혼에는 반드시 등식이 성립된다. 결혼에는 미래가 보장되어야 하고 당사자뿐 아니라 양가와도 연결되는 끈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계모의 사랑은 내게는 몹시도 금기시 돼오던 것이었다. 제자와 스승이 부부관계로 변한 것에 난 굳이 내 도덕적인 가치관을 들이대며 두 사람을 힐난하고 있었다. 거기에 왜 도덕적인 감정을 따져야 하는지 스스로 의문에 빠지면서도… 그러나 정작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본처에게 끔찍했던 그 기막힌 사랑이 본처 아닌 다른 여자에게 부어질 수 있었던 그 사실에 난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둘을 바라볼 때마다 수모감 멸시감 천대감이 내 얼굴위에 부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행복은 부끄러움 그 자체였다. 그들의 행복은 필연적으로 내 어머니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상상력이 자학에 가까운 불신감을 유발시켰다. 그것은 내 안에 늘 잠재되어 있는 불행의 씨앗과도 같았다. 계모와 아버지는 언제나 화기애애했고 그때마다 난 절망했다. 인간의 감정이 획일적이거나 늘 일직선상만을 달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난 유독 감정의 획일성만을 주장했다. 어릴 때부터― 그것이 신뢰의 근거가 되기라도 할 것처럼. 계모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견고하면 할수록 난 불타는 질투를 느꼈다. 그 이면에는 생모에 대한 그리움이 핏줄에 대한 연정이 늘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계모의 친절과 너그러움이 비록 냉담했지만 생모의 사랑에는 미치지 못했다. 난 오히려 계모가 친절할수록 그 저의가 의심스럽고 거추장스러웠다. 다만 예외가 있었다면 그건 배다른 두 여동생에 대한 나의 감정이었다. 어쨌든 내리 사랑이니까. 불신감의 원류는 배반감이며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다. 또한 불신감의 자녀는 소심증과 상대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과거로부터의 나쁜 기억과 올무에 결박된 부자유다. 불신감의 이면에는 감정의 영속성에 대한 기대감을 깔고 있다. 불신은 항상 최악의 경우만을 상정한다. 억측과 추측이 난무하며 영적고통을 자초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불신은 인간 사이의 정을 차단한다. 용서하지 않고 살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뜻하기도 한다. 불신의 결국은 자기 부정이다. 그러나 예외는 항상 존재하는 법이다. 난 지혜가 내가 설정해 놓은 예외 속에 안주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서 내심 헷갈리는 것이다. 지혜에게 사랑 받겠다는 것인지 사랑하겠다는 것인지. 사랑받겠다는 건 상대방의 감정에 나를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겠다는 건 감정의 행복지수를 노린 이기심의 발로일는지 모른다. 오랜만에 지혜에게 연락이 왔다. 정장으로 잘 차려 입은 모습이 왠지 낯선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의 옷차림에서 가을 분위기가 느껴졌다. 야윈 뺨에 새초롬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가 왠지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 있었나? 몹시 야워었군.” “문기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한때 유행하던 말이 있었다. 웬일이니… 집안 일이야, 상관하지 말라는 뜻. “미술학원은 처분했나?” “처분하지 말래요.” “누가?” “………….” “분위기가 냉냉하군 뭔가 탐색하려는 의도가 엿보여.” “문기씨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어요 마음대로 상상하세요.” “도대체 왜 그래? 뭐 나에 대한 불만이라도 있나?” “불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눈을 내리 깔았다. “문기씨는 제가 해바라긴 줄 아세요?” “해바라기라니….” “언제까지나 내가 문기씨만 바라볼 줄 알았냐고요 손짓만 하면 언제나 달려가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여자 말이예요.” “미안해 뭔가 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내 성격이 원래 그렇잖아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이고.” “언제까지 그렇게 이해 받기만을 바라실 건가요?” 심사가 꼬여도 단단히 꼬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늘 만나자는 목적이 뭐야?” “역시 문기씨답군요 목적과 이유를 묻는 폼이… 사실은 이런 식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끝내다니 혹 유학이라도…?” “유학이요?” “지혜가 늘 입버릇처럼 말했잖아 같이 유학 가자고.” “그때가 언젯적 얘긴데 차암 순진하시긴….” “순진하다니… 그럼 결혼?” 미심쩍어 하는 내 표정을 뒤로하고 지혜는 이미 카페 출입문을 나서고 있었다. 순간 내 의식은 태풍의 회오리 속에 갇혔다. 믿었던 마지막 보루가 와르르 무너지는데… 공동화(空洞化)된 도심 속에 내 추한 모습이 부랑아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둡고 초췌한 모습으로 거리를 나서는데 나무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IMF 실직자 합숙소. 계모가 분식점을 개업했는데 꽤 많은 손님이 몰려들었다. 집안에만 틀어박혀 대인관계가 전혀 없는 줄 알았는데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왔다. 대부분이 사오십대 중년여인들이었지만 가끔씩 낯모르는 남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집안에만 계시면서 언제 이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었어요?” 나의 물음에 계모는 시덥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 네 아버지 제자들이다.” 주택가 골목길을 끼고 하는 분식점이라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었다. 저녁 시간이면 두 여동생이 나가서 돕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계모의 귀가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헤어진 이후 지혜에게는 종무소식이었다. 2년 전처럼 다시 돌아와 줄지도 모른다는 나의 바램을 완전히 꺾고 지혜는 결혼과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지혜의 결혼은 나의 믿음에 대한 배반이요 내 기대감을 꺾은 최후의 복수였다. 늘 태만한 정신 속에 안주해 있다 허를 찔리고 마는 것도 늘 있어온 나의 관행이었다. 불신감 속에 갇혀 허둥거리다 세월을 놓치고 나면 아무 것도 결단할 수가 없었고 다방면으로 뻗쳐야 할 신경도 그냥 맥없이 놓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삶은 늘 제자리 걸음을 못 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혜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난 극심한 그리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고지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절대적인 감정으로까지 승화해 난 시내 곳곳을 뒤지며 지혜를 찾아 다녔다. 다시 돌아 왔는지도 몰라. 유학 생활을 견뎌낼 만큼 지혜는 강인하지가 못해. 나와 함께 보냈던 세월이 얼마나 긴데 아마도 나를 못 잊고 괴로워 하다가 다시 돌아왔을 거야. 그래서 나와 함께 걸었던 이 거리를 헤매면서 울고 있을지도 몰라, 지혜가 결혼을 결심한 건 나에 대한 서운함과 반항심리 때문이었을 거야. 난 현실과 동 떨어진 엉뚱한 상상을 부추기면서 삶의 정상궤도에서 이탈되기 시작했다. 알콜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경멸했던 내가 그들보다 더한 추태도 서슴치 않고 자행했다. 집안에 들어서면 여동생들에게 마구 신경질을 퍼부어 댔고 계모의 늦은 귀가에도 별별 꼬투리를 다 잡아 억지 부리기 일쑤였다. 계모와 여동생들은 어느새 나를 이방인 취급하기 시작했다. 나를 보자마자 외면했고 겁부터 냈다. 난 시간이 날 때마다 지혜에게 핸드폰을 걸었다. 신호음 대신 여자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지금 거신 번호는 결번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걸어 주시기 바랍니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취해 있다고 해서 고통이 반감되는 것도 아니었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알콜에 취한 몸을 억지로 자리에 뉘이면 지혜의 얼굴 모습과 함께 고소에 찬 말이 떠올랐다. “내가 해바라기라도 된 줄 아셨어요?” 그래 난 네가 나만 바라보는 해바라긴 줄 알았다. 적어도 너 만큼은 내 불신감을 불식시켜줄 마지막 보루라 믿었다. 네가 나를 떠난 건 네 자유지만 너를 놓친 건 내 실수였어, 내가 너한테 적극적이지 못했던 건 너에 대한 사랑이나 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야. 내가 널 무시하거나 하대하지 않은 건 너도 잘 아는 사실이잖니. 그런 걸 잘 알면서도 왜 나를 외면했니. 내가 너한테 이해받기를 바랬던 것은 내 이기심 때문이 아니란 걸 너도 잘 알고 있었잖니. 난 지혜가 떠나버린 후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자신을 향해 마구 하소연하고 있었다. 출근길에는 퀭한 눈으로 몸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이기자 저러다 안되겠는데 황천 갈 날이 멀지 않겠어 이기자 제발 정신 좀 차려 지난번에 올린 기삿거리도 엉망이었잖아 저러다 퇴출당하지 않을래나 모르겠네.” 차기자의 걱정어린 말에도 내 의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 차라리 퇴출이라도 당해버려라 사원퇴출이 아니고 인생퇴출이라도 좋다. 아침부터 속이 울렁울렁하고 메스꺼워 병원이라고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의료보험증을 집에 두고 온 게 생각났다. 집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하긴 이 시간이면 분식점에 나가 있을 시간이지… 생각하면서도 계속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잠을 못 잤더니 예민해진 모양이야… 동네 골목길을 들어서며 분식점 윈도우를 쳐다보는데 웬일인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혹시? 불길한 예감으로 집 안에 들어서는데 휑한 느낌이 가슴에 와 닿았다. 계모와 두 여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등기소로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세상이 끝나버린 느낌이었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발걸음이 걸을수록 피곤과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건물대장분을 신청해 놓고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다. 설마했는데 건물대장이 엉망이었다. 집 담보로 빌어 쓴 은행 대출이자만 해도 엄청났다. 분식점을 차리느라 그랬는지 개인 이름으로 근저당도 설정돼 있었다. 곧이어 집달리가 들어설 것 같은 위기가 내 의식에 팽팽하게 전해져 왔다. 청천벽력이란 말이 따로 없었다. 새벽마다 작은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대문간을 나서던 계모의 모습이 생각났다. 언젠가 계모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던 중년남자의 음흉한 미소도 떠올랐다. 간드러진 교태어린 여동생의 웃음소리도 생각났다. 허탈감이 몰려왔다. 무엇보다 분한 건 나와 한 마디 상의 없이 일을 꾸민 계모의 계략이었다. 재산이라곤 한 채 뿐인 집을… 아니 그보다는 그래도 핏줄이라고 믿었던 그 믿음에 대한 마지막 상실감이었다. 혹시 무슨 쪽지라도 남겨 놓지 않았을까 책상 위와 서랍 곳곳을 뒤져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계모와 여동생의 방으로 건너가 장롱 안을 뒤져보았다. 옷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여동생의 책꽃이에도 책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이것들이 너무 급해서 몸만 빠져 나간 모양이군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아침에 만들어 놓은 반찬이 그대로 있었다. 그래도 전화라도 걸어오지 않을까 전화기를 노려 보았지만 잘못 걸려오는 전화 한 통조차 없었다. 열이 뻗친 난 수화기 코드를 뽑아 전화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성을 상실한 난 길길이 날뛰며 집안 세간들을 부수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괴기 영화에 나오는 드라큘라와도 흡사했다. 벌겋게 충혈된 눈빛에서 독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구나 이렇게 내 인생도 끝장나고 마는구나. 집 담보로 대출 받은 은행 이자만 생각해도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도장을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분식점을 차리겠다기에 아무 의심없이 덜컥 도장을 맡긴 게 화근이었다. 도대체 그 손바닥만한 분식점 하나 차리는데 웬 돈이 그리도 많이 소요 되었단 말인가 여기에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계모에게 남자가 생겼거나 나만 제외하고 저희들끼리 무슨 꿍꿍이속이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염려해오고 근심해오던 모든 결과가 한꺼번에 터져 버린 것이다. 그래도 지혜와 계모만큼은 설마하고, 의심하면 죄려니 생각하며 믿음의 터를 지켜 왔는데 모든 게 허사였다. 지혜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밀어닥친 이 미증유의 대 환란 앞에 난 이제 분노할 힘마저 없었다. 유리와 사기파편들로 가득한 방바닥에 앉아 난 목이 터져라 울었다. 짐승처럼 마구 표효했고 울부짖으며 온 방안을 헤매고 돌아 다녔다. 아버지와 생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신뢰의 대상이 아니었던가 관점의 차이가 있었을 뿐 그 순수성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이상하게도 마음의 평안이 몰려왔다. 난 내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깔고 아주 오랜만에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방문을 거칠게 두드려 대고 있었다. 아! 드디어 운명의 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집달리가 온 모양이다. 난 꿈속에서처럼 느릿느릿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계모였다. “언제 들어왔었니 방안이 엉망이다 강도라도 들은 것 아니니?” 난 최대한으로 평안을 가장하고 물었다. “어디 가셨다 오신 거예요 애들도 보이지 않고….” “네 여동생들하고 철야 기도하고 왔지 어제가 금요일이었잖니 그런데 밤새 강도가 든 모양인데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장롱이고 서랍이고 죄다 열려져 있고….” “전 멀쩡해요.” “뭐 없어진 물건이 없는지 찾아봐야겠다. 그런데 어젯밤에 어딜 갔었니 아무리 전화해도 통 받지를 않으니….” “철야기도회는 언제부터 다니신 거예요?” “내가 분식점을 내느라 빚을 엄청 끌어다 썼다. 결국 사기당한 거나 마찬가지지만… 걱정이 되다보니 견딜 수가 있어야지 네 이모와 함께 지난달부터 철야기도에 나가고 있지 너도 힘들어 하는 것 같고… 사실 나도 많이 힘들었다 빚은 분식점 처분해서 갚든지 하고 파출부라도 하든지….” “그런데 새벽마다 어디를 그렇게 가신 거애요?” “어디긴 교회지 새벽기도 나갔지 그런데 요새 지혜라는 아가씨하고는 도통 안 만나는 것 같다 전화도 없고….” “헤어졌어요.” “왜?” “제 성격이 소극적이고 우유부단 하다보니 화가 났었던 모양이에요 다른 남자랑 결혼해서 프랑스로 유학갔어요.” “세상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더니… 그 아가씨가 널 그동안 얼마나 따라 다녔었니 정말 못 믿을게 사람 마음이라더니… 그래서 어젯밤도 술 마시고 저 난리를 피운 게냐.” “아니에요.” “그나 저나 네 작은 동생은 여상 보내기도 했다.” “왜요?” “왜요라니 몰라서 묻니 형편 봐 가면서 살아야지 그게 다 사람 사는 도리 아니겠니.” 난 갑자기 생각난 듯 책상서랍을 마구 뒤진다. 맨 아랫칸 서랍에 누렇게 찌든 편지 봉투가 보인다. 결혼 전에 보내졌던 것으로 발신인이 지혜로 되어있다. 낯익은 활자체가 조립 안 된 개개의 글자체로 떠올라 시야를 어지럽힌다. 낙서처럼 써내려간 글씨의 맨 아랫칸에 나의 시선이 머문다. [난 아무도 믿지 않아요. 특히 당신이라는 사람의 감정은 믿지 않아요. 당신이라는 사람의 진실은 늘 오리무중이었으니까요. 난 나 자신만 믿을 뿐이예요. 난 나 자신의 감정을 따라 행동할 뿐이죠. 사실은 나도 나 자신을 믿지 못해요. 그러니까 내가 떠났다고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아요.] 봉투 안에는 언젠가 캠퍼스 안에서 함께 찍었던 사진도 몇 장 들어있다. 이런 식으로 감정처리를 하는 것인가. 쓴 웃음이 나오는데 그 사진을 감싸고 있던 하얀 종이 위에 역시 낙서처럼 휘갈겨 쓴 파괴적인 내용의 詩 한 편이 눈에 보인다. 불 신 감 한 겨울 속 살얼음 낀 가슴 속으로 시퍼런 바람이 분다. 어떠한 언어로도 해빙될 수 없는 분노의 응고 무표정한 얼굴위로 칼날같은 고통이 무덤 같은 침묵이 흐른다. 기적을 바라지 않는 잿빛사랑 눈물 없는 애원 죽음의 향기 부르는 언어 가슴속으로 새파란 파란 바람이 분다. 끝 |
첫댓글 신작가님, 잘 읽었습니다. 항상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하옥이 선생님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시는 모든 일에 형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