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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음'이라는 경계와 '지금', '여기'의 재영토화 / 박용진
ㅡ 최재영 시집 <통속이 붉다 한들>
1.
타자를 비롯한 물상物象과의 교류는 주체를 실존케 하는 방식이자 나 - 그리고 - 너를 넘어선 '우리', '함께'라는 인식을 존속하게 만든다. '너'와 '이것'이 없다면 '나'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는 '너'라는 존재에 대해 '나'와 다르다고 여기는 이질성은 개별적 형상에 따르는 것이며 각각의 사유 분화로 명확해지는 물질적 구분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표층 의식과 달리 심층 의식과 미시(micro)의 세계에선 모든 만물은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선 감각의 한계로 이를 감지하기 어렵고 물질의 심화만이 있을 뿐이다.
최재영 시인은 시집 통속이 붉다 한들에서 기억의 간극으로부터 건져낸 아스라이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안은 꽃, 계절, 나무, 붉음에서 표출한 영원에의 절정과 현상의 변화와 순환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볼 수 있으며 분별심을 넘어선 피안彼岸을 향한 좌표 설정을 읽을 수 있다.
이전의 시간을 매개로 하는 기억은 실존의 바탕이 되며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의 언저리를 맴돌며 계속 지난 기억에 매몰됨은 현존에 대한 의구심을 일으켜 피폐한 삶을 지속하게 만든다.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동일성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힘들었던 순간도 지나고 보면 추억이고 그리움이 되는 경우가 있기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의 확산이 본능적으로 두려운 것이다.
"백 년을 걸어가는 한 그루 꽃나무"(백 년의 사원)
태고적부터 지구에서 번성했던 나무에서 꽃이 피는 순간은 시인에게 있어 '지금'과 '여기'라는 온전체다. '백 년'과 '사원'이라는 두 단어에 작품집이 함축되어 있으며 정신적 구심점에서 펼치는 수명의 한계와 이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나무가 피운 꽃을 지나는 계절풍으로 절정에 이르렀음은 다음의 작품에서도 읽을 수 있다.
"화르륵 등꽃이 피어나고"(등나무, 5월)
시인에게 있어서 등나무, 목련은 등불이다. 밤이어도 환하게 빛을 내는 꽃에서 누구나 체감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반대편 가지에서 한 잎의 등이 툭, 지고 있다"(목련 눈) "백 일을 피고 지는 중입니다"(배롱나무) "꽃잎 사이로 여자의 한 생이 지나고 / 수줍던 날들이 화안히 피었다 진다"(좋은 날)에서는 꽃과 환한 순간이 피었다가 져버림을 읊었다. 만물은 절정(타자, 외부자극으로 인함)을 넘어서면 시들기 마련으로 넘길 수 있지만 주목할 것은 피고 지는 순간을 한 장면으로 묶었다는 점이다.
시인이 제시한 나무는 사원寺院이다. 사원에 들어서면 누구나 경건해진 자세로 하침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꽃이 피는 순간도 낙화의 순간에도 경문을 읊조리며 경배를 올린다. 사원(나무)은 '지금', '여기'라는 시인의 주체성을 나타낸 상징이다. 사원에 머무는 순간, 머물렀던 기억조차 현재로 작동한다. 어빈 얄롬이 강조했던 '지금', '여기'라는 순간의 속성은 물리적 계측이 어렵지만 사유를 통한 의식의 환기와 노매드에서 멈춘 다음 현재에 집중하여야 할 동기 부여의 발견이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기억의 다음을 시인은 탈기억이 아닌
재영토화(reterritorialization)를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인간 의식도 물질이라는 이론이 있지만 기억은 좀 더 체화體化된 물질이라 부를 수 있다. 의식 저편에 자리 잡은 채 계속 욕망을 부추기면서 괴롭히기 십상이다. 시인은 나무가 되었다. 꽃이 피고 지더라도 이를 관조하는 모습에서 스스로에게 부여한 자유를 떠올린다.
2.
노을이 안마당까지 들어와 판을 벌린다
기왕지사 엎질러진 한 시절이라고
파도는 후렴구를 되풀이하며 울컥거리고
새 떼들 제 안의 깊이를 가늠하며
붉게 젖은 가슴으로 한 생을 횡단해간다
어쩌면 당신에게 이르는 길은 끝없는 항해와 같아서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건너가야 할지도 모른다
노을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파도가 밀려드는 긴 눈썹 같은 해안선을
생의 내륙까지 밀어붙인다
소금기 가득한 자서전을 기록하는 내내
잠시 감았다 풀어지는 눈꺼풀의 기척만으로도
해안선은 밤새 뜨거울 것이다
새들의 노래를 끊임없이 분만하는 물거품
붉음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이곳을 통과할 수 없으리
새들은 침잠하려는 노을을 거두어 돌아가고
각혈 같은 울음을 지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서로 눈물겨운 호흡을 주고받으리
온통 붉은 울음 범람하는 바닷가
그리하여 눈시울 붉힌 해안선을 읽어내느라
새들은 기어이 환상통을 뱉어내는 중이다
ㅡ 붉은, 전문
삶은 숱한 경계를 거니는 여정이다. 의도하지 않게 늘 생성되기 마련인 경계는 시간과 공간, 기억과 경험, 상상 과다의 일상에서 기원하며 갈등과 시행착오의 근원이자 별도로 생성되는 반증 가능성의 공간에서 혼재 상태로 머물게 한다. 다른 사유가 침투하기 어려운 내적 관념이 굳은 상태의 사람에게 외부 자극은 자기 영역이 전복될 두려움에 방어기제의 작동으로 두터운 경계는 생성되기 마련이다. 이런 생존본능은 누구나 내재되어 있으며 일정한 단계를 거치며 허물어진 인간 의식의 확장과 발전을 이루게 된다.
시인의 작품에서는 해안선(붉은,), 피멍(지심도 동백), 글자의 행간(우저서원牛渚書院), 모퉁이(대장간), 반대쪽의 국경(사과), 서로의 필법(갈등), 양날의 칼날(도마), 안개 같은 시어에서 경계를 발견한다.
작품 (붉은,)에서 깊어진 저녁노을과 붉게 젖은 가슴, 해안선의 물거품은 시간에 따라 잊히거나 지워져 가는 기억에도, 아직은 존속하는 풍광에 안도하는 시인을 떠올리게 된다. 나를 비롯한 만물은 변화하며 소멸을 향한다는 의식의 잠재에서 감각 인식에 따르는 현존의 스스로를 발견하기도 한다. 시인의 아쉬움이 무엇에 기인하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펼친 경계는 변화와 회귀임을 짐작할 수 있다. 노을과 파도는 늘 접한다. 노을, 파도, 물거품의 모습이 감각에 중첩되며 지난 기억은 변하지 않은 듯 여겨지는 자연풍경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얘기한 탈코드화(decoding)의 시작임으로 여겨진다. 해안선을 나는 새와 노을에서 건진 바닷가의 붉은 울음은 시인과의 경계가 맞닿는 부분이다. 아픔이라는 것도 환상통이라는 허구의 감각임을 알고 뱉어내고 날아가는 새에게서 아포리즘(aphorism)적 유의미를 추출해 본다.
시는 철학을 배경으로 조립되기도 하고, 경험을 토대로 경계에 맞닥뜨린 내적 사유를 제련하며, 나름 축적한 세계를 승화, 창출해 나가는 문학이다. 이런 전개는 주변 상관물과 왜곡된 기억에 상상력이 더해지며 언어 작업은 숙성하게 된다.
작품(지심도 동백)에서 말한 '피멍'(안개)에 나타나는 '뼈'의 이유와(잃어버린 마을)에서 그을음의 안타까움은 불화와 갈등의 정점을 나열한 것으로 추정한다. 지심도는 일제강점기 시절 요새로서 일본군 1개 중대가 광복 직전까지 주둔하였으며 해방 이후 포대, 탄약고 등이 남아있으며 건물 신축을 허용하지 않고 남아 있는 건물을 증축 개조하여 사용했기 예전 모습을 간직하는 섬이다. 지심도에 많이 핀 동백의 색은 붉은색이다. 파란 멍 대신에 붉은 피멍과 시뻘건 쇳물을 언급한 시인의 시집에선 '붉음'이 넘쳐난다. 주체의 내면을 쉽게 나타낼 수 있는 붉은색은 다중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지만 대체로 열정적이고 아픔을 나타낸다. 시인에게 있어서 동백의 '붉음'은 역사적 통증을 승화시키는 경계이리라. 입구를 향하는 뼈와, 바다를 덮은 안개와, 잎을 물들이는 단풍이든지, 항상 시인의 경계에선 형성체形成體를 파악해 나가는 '붉음'이 피어난다.
새빨간 거짓말은 내게 맡겨요
오전과 오후가 빨갛게 익었잖아요
겉과 속이 똑같으니 믿음직 스럽지 않나요
세상의 거짓을 모조리 키우는 중이거든요
표리부동하지 않을 것
한 계절 내내 우리들의 좌우명이죠
통속이 붉다 한들 나만 하겠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형태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매력이죠
최근엔 내 모습을 흉내 내느라
여기저기서 추파를 던지기도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죠 크기부터 압도적인걸요
완숙이란 더 이상 붉어지지 않을 때까지
속울음을 익혀야 하는 법
울음의 끝은 메마른 줄기로 마무리해요
오늘도 나를 지나는 태양은
걷잡을 수 없이 맹렬해지네요
그야말로 감정에 충실하다는 증거죠
어때요 감쪽같이 익어버렸죠
당신, 붉은 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회의적인가요
제발 나를 좀 믿어주세요
완벽한 불신을 완성해 드릴게요
ㅡ 토마토 전문
통속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널리 통하는 일반적인 풍속이나 비 전문적이고 대체로 저속하며 일반 대중에게 쉽게 통하는 일, 비밀리에 서로 통한다는 뜻이 있다.
연중 비닐하우스 재배가 가능한 토마토는 덜 익은 상태에서는 솔라닌이라는 독성성분이 있다. 완전히 익어 빨간 상태가 되면 독성성분은 사라진다. 시인은 "새빨간 거짓말은 내게 맡겨요"라고 했다. 왜 거짓말은 새빨갛다는 인식이 퍼져 있을까. 색채용어사전에서는 붉은색은 새빨간 거짓말, 진홍빛 사랑, 붉은 마음 따위의 표현에서는 '명백(明白)하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 관련도 없다'¹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 완전히 익은 토마토는 속을 모두 드러낸 것이다. 가지과 식물열매의 특성상 과일과 채소의 두 가지, 독성과 영양분의 특성은 '붉음'이 가진 여러 상징과도 일치한다. 속울음을 넘어 이미 익은 '지금'을 설파하고 있고 작품(단풍나무)에서도 시인은 붉은, 단풍나무가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 앞선 언급에서 붉음이 불화와 갈등에 따르는 아픔이었다면 토마토의 붉음은 완전에 다다른 원숙한 상태다. 그러면 시인이 말하는 익은 상태는 어떻게 해야 도달할 수 있을까. 작품 18행에서 "그야말로 감정에 충실하다"라고 했다. 미완의 감정상태는 무의식에 잠재되어 현실에 반영이 된다. 표면의식과 달리 심층의식은 뜻하지 않게,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때에 불쑥 튀어나와 일상 교란의 원인이 된다. 미 충족된 감정은 만성 결핍의 상태로 의식에 머물게 된다. "실재적 행복이란 고통과 노동이 수반되는 집합적 진리의 정동이다"라고 했던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완숙, 원숙의 의미는 미완이나 결핍이 충족되기 전의 상태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미완의 감정상태가 여물기 전에 이를 다독여주면 명백明白해지면서 사라진다. 토마토는 덜 익은 상태를 경험하지만 완전히 익은 상태는 미완의 상태를 포함함을 알 수 있다.
3.
을숙도는 낙동강 끝자락에 자리한, 토사가 퇴적되어 형성된 하중도河中島이며 낙동강과 남해가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다. 한때 쓰레기 매립지이자 파밭으로 채워졌던 을숙도 하단은 2005년 5년간의 복원공사를 통해 철새들의 휴식지인 철새공원으로 태어났다.
시인은 을숙도라는 섬에 대해 "섬이 아닌 채 섬을 품고 있다"(을숙도2)라고 했다. '섬'이라는 용어는 육지와 물을 사이에 둔 형태로 개별적이거나 고립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을숙도에서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기 전 이미 수많은 경계에 대한 전경全景을 읽어왔기에 잉여적 선입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경계를 둔 이분법적 사고가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일까. 말러의 분리개별화(separation-individuation)²에 의하면 모성적 존재의 발달, 즉 리비도적 대상 항상성의 성취는 유아가 일차적인 양육자에게서 벗어나 독립적인 기능과 대인 간의 분리를 경험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것이 성취되는 정도에 따라 유아는 스스로 기능할 수 있고 건강한 대상관계를 확립하는 능력을 통합해 간다.라고 했다. 양육과 교육의 과정을 거치며 옳고 그름의 판단 능력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 분간의 필요성은 방어적 본능과 연관되기에 구분과의 차이는 분명해야 할 것이다.
을숙도에서 건질 수 있는 유의미는 변화다. 세월이 지나가는 사이를 관찰하는 시인은 '섬'의 지위를 가진다. 쓰레기 매립지에서 철새들의 공원이었다가 인위적인 개발로 줄어든 철새, 다시 이를 보존하려는 모습에서 시인이 말한 "알지 못했던 지상의 근원을 / 섬이 빠져나가면서 깨닫는다"(을숙도2)에서 유추하듯이 시인의 섬은 주변의 변화가 가져오는 고립(섬)에서 유연한 갈대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게 하며 빠져나가는 섬(변화, 전환)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섬은 분리 독립된 듯한 착시 상태지만 실은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시인의 '섬'은 '앎'이다. 깊은 관찰과 사유를 통해 발견, 변화를 이루는 스스로를 말하며, 시인의 앎은 변화를 발생시켜 나갈 것이다. '고정된 불변'이란 애초부터 없는 것이며 진리의 상대성을 보더라도.
4.
원림에 드니 그늘까지 붉다
명옥헌*을 따라 운행하는 배롱나무는
별자리보다도 뜨거워
눈이 타들어 가는 붉은 계절을 완성한다
은하수 쏟아져 내리는 연못 속 꽃그늘
그 그늘 안에서는 무엇이든 옥구슬 소리로 흘러가고
어디선가 시작된 바람은 낮은 파문으로 돌아와
우주의 눈물로 화들짝 여울져 가는데,
기어이 후드득 흐드러지는 자미성紫微星
연못 속으로 어느 인연이 자맥질해 들어왔나
문이란 문 죄다 열어젖히고
한여름 염천에 백 리까지 향기를 몰아간다
그 지극함으로 꽃은 피고 지는 것
제 그림자를 그윽이 들여다보며
아무도 본 적 없는 첫 개화의 우주에서
명옥헌 별자리들의 황홀한 궤도가 한창이다
한 생을 달려와 뜨겁게 피어나는 배롱나무
드디어 아무 망설임 없이 안과 밖을 당기니
활짝 열고 맞아들이는 견고한 합일의 연못
눈물겹게, 붉다
ㅡ 명옥헌 별자리 전문
밤하늘에 점의 형태로 반짝이는 별은 과거의 모습을 빛에 실어 우리에게 보여준다. 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희망, 추억 같은 긍정의 이미지다. 기존의 별자리를 두고서 특정 이미지(변상증, pareidolia)를 찾을 수 있거나 새로운 상상력을 더할 수 있는 별하늘은 무한의 가상공간이기도 하다.
명옥헌 별자리에서 시인이 말하는 별자리는 배롱나무다. 담양에 있는 명옥헌鳴玉軒 정원 연못 주위엔 은하수를 본떠 심은 28그루의 배롱나무가 있다. 땅 위에 핀 별을 꽃이라 했던가, 배롱나무가 틔우는 꽃에서 별과 별을 이어서 새로운 별자리를 만들 수 있듯이 여러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시인의 작품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표는 '백'이다. 백 일, 백 리, 백 년 등, 색상과 시간, 거리, 혹은 별도로 연상되는 백(back)을 가정했을시엔 레트로적 회상과 '없음'의 배경을 떠올리게 하며 시인의 근본 미학인 '붉음'을 보충한다. 주체와 대상의 대립이 없이 밀착한다는 슈타이거의 회감回感은 서정시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시인의 '백'은 간혹 카오스적 상상력이 파생시킬 주체와 대상의 불일치를 희석시키고 핀 꽃이 백 리를 마다하지 않고 퍼뜨리는 향기에서 완료감을 주는 역할을 볼 수 있다.
시인들은 존재에 대해 늘 의구심을 가진다. 현상의 근원과 의미를 탐구하며, 산물의 총체성에 대해 다시 환원의 질문을 던진다. 이에 페르난두 페소아는 사물들의 경이로운 진실에서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라고 했다. 하늘에서 일생을 다한 별이든지 명옥헌에 활짝 꽃을 피운 배롱나무든지 모습만 다를 뿐 동일한 떼창(코스모스)을 한다고 규정하는 시인이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여기'가 별이며 별자리라고 할 말을 짐작해 본다.
5.
"욱신, 꽃이 피고 지는 이 간격을"(꽃이 피는 사이)
최재영 시인은 두 번째 시집인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에서 이미 꽃피는 순간을 허구라고 했다. 어째서 화사했던 시간에 허구라는 이름을 붙인 걸까. 틈, 사이와 비슷한 간격은 장소성도 포함하며 일반적으로 선형적으로 흐른다고 여겨지는 시간의 반지속성을 보여준다. 우리가 '지금', '여기'라고 느끼는 순간도 틈, 사이, 간격이 된다. 시인이 말하는 간격은 인지적 시간으로서 자체적 속성은 기억이라는 재연기능(reenact function)으로 인하여 끊임없는 사유의 투여와 한계의 확장으로 이전의 경계에서 한정하던 구분, 분별력을 희석시킬 수도 있으며 현상에 대한 오인誤認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시인은 한 겹 경계를 허문다고 했다. 봄은 저만치 밀려나 있다.라고 말한 시인은 감각이 가져다준 허위적 속성에 물들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든 현상은 허위와 실제의 양가적兩價的 성질을 가진다. 우리가 인식하는 순간은 이미 지나간, 실재하지 않는 허위를 감각할 뿐이지만, 실제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온전한 실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이런 만상의 지고 솟음에 좁은 시각과 편향적 사고가 더해지면서 갈등이 발생한다. '있음'은 그 자체로 있을 뿐이다. '있음'과 '없음'은 이어져 있으며 단독으로 존재하지도 존속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처럼 맞닿아 있는 모든 것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런 경계를 명확히 하며 생기는 구분과 차별, 치우친 사고로 사회, 정치적인 갈등이 발생하는 단초를 주기 때문이다.
시인은 '붉음'이라는 의미망의 경계에 핀 나무다. 나무는 계속 성장한다. 기존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구조나 체계의 가치를 추구하는 나무는 재영토화 하는 사원寺院이다. 절정의 꽃을 피우며 지는 순간을 모두 가지며 그 순간들은 기억을 바탕으로 지속하지만 머물지 않는다. 단지 '지금', '여기'에 집중할 뿐이다. '지금', '여기'는 과거의 시간과 기억을 바탕으로 한 사유의 일부와 편린이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스펙트럼처럼 펼쳐진 시간에서 감각하는 모든 현상은 토폴로지(topology)라는 앎으로 귀결한다. 감각이 습득하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기울어진 구분이 아닌 바른 분간으로 조망眺望하는 시인은 편년체編年體의 느낌을 주기도 하는 작품 화살, 촉에서 느낄 수 있듯이 올곧게 정진精進하며 사유할 것을 말하고 있다.
1. 색채용어사전 (도서출판 예림, 2007)
2. 말러(M. Mahler)의 대상관계이론
첫댓글 시도, 시평도 깊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