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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보다 여러모로 후진(적) 사회에 갔을 때 제일 염려되는 것은 우선 음식이다. 나는 안정적인 한국인 가정으로 갔기 때문에 먹는 일로 따로 신경을 쓸 일은 없었지만 흑인들은 어떤 음식을 먹는지 관심을 가져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흑인들의 주식은 쌀이 아니라 옥수수였다. 앵? 쌀 아니면 밀가루, 감자를 주식으로 먹는다는 소리는 들어 보았어도 사람이 가축의 사료로나 쓰이는 줄 알았던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니?
그러나 한국인들이 옥수수가 동물의 사료로 쓰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편견이다. 그런데 이게 한국인인 김순권 박사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김 박사는 막상 한국인들은 잘 모르지만 노벨상 후보로도 여러 번 올랐던 세계적으로 가장 탁월한 옥수수 박사이다. 그는 옥수수가 세계의 식량문제 뿐 아니라 평화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70년대에 이미 아프리카에서 종자 개발에 젊음을 소비했던 사람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북한의 옥수수종 개발을 위해 1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하고 거기서 연구 활동을 하셨던 분인데 4대강 정부 들어와서는 훅! 그 다음에는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김 박사는 지금도 여전히 중동과 아프리카에서는 국빈대우를 받는 분인데 금년에 중국에서 극진히 모셔갔다고 한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을 필요가 없는 국내에서는 김 박사가 한국 환경에 맞는 사료용 옥수수종을 개발했기 때문에 한국 사람은 옥수수가 주로 사료로 쓰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김순권 박사
그러고 보니 몇 해 전에 아프리카에 기근이 들었을 때 미국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농사를 지은 옥수수를 보내주겠다고 해서 아프리카에서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에게 동물의 사료로 먹이는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인다니 이런 죽일 놈들이 있나?"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이었다.
옥수수를 지름 1mm 안팎으로 가루 낸 것을 쌀밥 짓듯 앉혀놓고 뜸을 들이면 밥처럼 Pop이 된다. 우리도 맨밥을 먹지 않듯이 Pop도 반찬과 함께 먹는다. 전통적인 반찬으로는 우리의 김치와 비슷한 망고무침도 있고 'chakalaka'라는 야채무침도 있고 무엇보다도 거의 항상 고기류와 함께 먹는다.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닭고기들을 가공한 소세지류 등이 주요 반찬들이다. 아프리카가가 거의 체질화된 구름은 Pop을 너무 좋아해서 출장을 다니면 햄버거 보다는 Pop을 더 선호한다. 그래도 주식으로 삼지 못하는 건 불행히도 어릴 적부터 먹어 버릇한 게 쌀밥이라 몇 배를 비싸게 들여서 억척스레 쌀밥을 주식으로 한다고 한다.
흑인들 가운데 비만이 많은 이유는 바로 이 옥수수밥이 제일 큰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걸 먹으면 항상 기름진 고기류를 같이 먹게 되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구운 옥수수 하나 사먹으면 US 1불정도, 굽지 않은 생옥수수는 0.7불. 물론 가공된 가루는 훨씬 싸다. 옥수수라는 것이 사실 덩지만 컸지 알맹이 양이야 얼마 안 되니까 끼니로 채우려면 3~4개 정도 먹어야 성에 차니까 결코 싸구려 음식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이것은 그걸 좋아해도 매끼 먹을 수 없는 사람이 여기엔 무수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한 평생 옥수수만 먹고 산다니 평생 쌀만 먹고 살아온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일이었다. 만일 내가 쌀 대신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으면 당연히 내 위장이 받아들이지를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내 머리의 기준이 아니라 위의 기준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한국, 혹은 서구화된 내 머릿속 시스템과 달라서 받아들일 수없는 것이다. 그런 기제를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이 교육이란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보수 세력이 교과서를 고치려고 그 난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자기들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분명히 한국에서 가져온 종자를 텃밭에다 심었는데 막상 수확을 해보니 그 맛이 안 나서 실망한 적이 종종 있다. 땅에서 나고 자라는 식물들이 자연에 맞게 자라듯이 사람 또한 그러한 것이다. 결국 인간은 태어나 자란 곳과 받아들인 교육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되는 법이니 사람도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을 수 없듯이 타인이 먹는 음식을 내 몸이 거부하기도 하고 내 몸이 잘 받아들이는 음식을 타인이 먹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니꼽게도 서럽게도 불쌍하게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하늘로 부터 뚝 떨어져 온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인간이 살고 경험한 세계에서 생성된 기억과 습관, 생각과 행동의 조합일 뿐이다.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 종교이다. 중동이나 인도에 가서 예수 믿어야 한다고 선교하시는 분들 참고 좀 하면 좋겠다.
한 번 <레인보우>나 <세세미 스트리트> 같은 어린이들을 위한 연속극이나 영화들을 보자. 비록 여러 색깔을 지닌 아이들을 평등한 주인공들로 설정했다 하더라도 이 영화들이 남미나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 수출되어 그 나라의 아이들이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바로 같은 유색인종의 어린이가 아니라 백인 아이들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백인들의 문화는 고급문화이고 선진문화라고 배워왔고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학습 받아왔기 때문에 비 서구권 아이들의 눈에는 백인 아이들이 우월하고 선진적인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특히 비 서구권 아이들도 오랫동안 서구 백인들이 중심이 된 제국주의의 역사를 직, 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백색문화는 더욱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흑인들이 어렵고 힘들게 번 돈을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형편에 비해 비싼 가발을 사면서까지 백색문화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허덕이면서 서구화를 따라가기에 바쁜 남아공 흑인들의 모습으로 보면서 언젠가 읽었던 산악인들에 대한 책이 떠올랐다. 에베레스트 등정대가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지역 출신의 셰르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중에는 어떤 산악인보다 8,000m급을 많이 오른 셰르파가 있었다. 셰르파들은 8,000m급 등정을 마치면 등정 팀의 초대를 받아 이 나라, 저 나라를 구경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고향에 돌아오면 술로 신세를 한탄하거나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문명을 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비루한 삶을 의식한 것이다. 문명에 노출된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이다.
아내를 여럿 두고 싶어?
남아공은 기본적으로 일부다처가 보장되는 나라이다. 일부다처는 이곳의 줄루족에게는 오랜 전통이고 회교도들에게는 당연한 제도이다. 현 대통령 주마는 현재 서너 명의 부인을 두고 있는데 마지막 부인과는 재작년에 결혼 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 이 문제가 이슈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완전히 명문화 되었다고 들은 바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부인을 여럿 가진 사람이 거의 없고 남녀를 불문하고 이것이 대화의 소재가 되는 것조차 반기지 않는다. 법이 보장함에도 결코 일부다처가 사회에서 환영받지는 못한다는 또한 재미있는 현상이다.
줄루 족과 같은 Nguni족에 속하는 스와질란드에는 스와지족 왕이 매년 결혼식을 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 얼마 전 부인 중 하나가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국제적 비판을 받아선지 스스로 힘에 부쳤는지 이제는 그만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곳 역시 왕을 제외하고는 여러 부인을 둔 남성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것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인식이 높아졌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아프리카 대부분 부족의 전통에 이곳 말로 'lobola'라고 하는 게 있다. 이는 남자가 여자를 부인으로 맞으려면 여자의 아버지에게 주어야 하는 소를 말한다. 소를 몇 마리 요구하고 주느냐에 따라 결혼 여부가 결정되는, 그냥 전통 정도가 아니라 아주 강하고 오래된 풍습이다.
이 풍습의 장단점을 외부인이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 테지만 이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보자면 좀 황당하다. 여자 가족들은 10마리 안팎의 소를 원하는 경우가 보통인데 한국 돈으로 천만 원이 넘는다. 이 돈을 내지 못하면 같이 살고 있고 애를 여럿 낳아도 아무 상관 않지만 정식 결혼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냥 사실혼 관계만 유지하고 있는 커플이 많고 이 풍습은 대부분의 여성들을 미혼모로 만들고 있다. 바람네 회사의 자녀 딸린 흑인 여성들은 거의 다 미혼모였다. 전통적으로는 애 아빠가 책임을 다해야하지만 슬그머니 사라진 경우가 허다하다. 메기라는 흑인 여성은 15살에 딸을 낳고 딸이 15살에 아이를 낳아 30살인데 벌써 할머니가 되었다.
또 다른 면으로 흑인들의 문화를 들 수 있는데 원래 줄루족이 주류인 남아공 흑인들은 '네 것, 내 것이 없는'것이 기본 정서이다. 지금도 이런 전통이 남아 있어서 도시로 몰려온 흑인들 가운데 같이 사는 동료가 실직을 해도 나누어 먹는 것에서는 별로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이러한 미풍양속(?)은 공무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 친구나 친척의 부탁이 사회의 법률이나 도덕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친척이나 친구가 갱이면 경찰이 함부로 체포를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찰이나, 경비 업체의 정보를 공유해줘서 그들의 범죄를 돕기까지 하는 가족적(?)인 관계가 돈독하다고 한다.
안전하다고 판단되었던 외곽지역 민박집 등도 가끔씩 털리는 이유가 경비나 가정부가 그들의 친척이나 지인의 부탁에 못 이겨서 집 열쇠를 넘기기 때문이다. 이런 끈끈한 유대감 때문에 그들은 동료나 이웃이 잘못한 일에 대하여도 절대로 고자질을 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흑인들끼리는 좋을지 몰라도 그들을 고용하는 입장에서는 흑인들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매우 곤란한 것이다.
가정부 토베카
사무실에서 청소와 주방을 담당하는 토베카는 매우 단정한 모습에 머리 모양이 매일 바뀌는 40대 여자였다. 알고 보니 여러 개의 가발을 바꾸어 쓰기 때문이었다. 보통 한 개에 15,000원 정도 하는 가발을 3, 4개 씩 가지고 조심스럽게 관리하면서 쓰던지 대충 쓰다가 버린다든지 한다. 흑인들은 머리칼이 길게 자라주지 않기 때문에 멋을 부리려면 연장을 해야 하는데 동네에서 야매로 하면 만 원, 제대로 된 미장원에 가서 하면 3,4만원 한단다. 그런데 머리를 그렇게 재개발하면 삼푸로 시원하게 감을 수가 없기 때문에 물을 대충 뿌려서 청소를 한다고 하니 얼마나 불편할까?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몇 달 동안이나.
이런 흑인들 덕분에 가발 장사하는 한국 사람들이 먹게 살게 되는 것이다. 가발 장사를 하는 교민에게서 아프리카 열대에서는 백인이나 황인종의 머리처럼 착 달라붙는 머리카락은 습진이 생기기 쉬워서 적당치 않고 흑인들의 머리처럼 꼽슬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창조주의 오묘한 뜻을 짐작하게 되었다.
흑인들의 머리카락은 나사같이 살을 파고 들어간단다. 그래서 흑인들의 머리빗은 황인종이나 백인들이 사용하는 빗과는 달리 ‘솔’ 같이 생겼단다. 더욱이 흑인용 삼푸는 사람이 사용하는 삼푸가 아니라 말의 꼬리를 닦을 때 쓰는 삼푸란다. 그러다 보니 독한 삼푸를 써야 해서 머리카락이 상한단다.
흑인들에게는 스트레이트 파마가 유행인데 꼬부라진 머리카락을 곧게 피려면 돈이 보통 많이 드는 게 아니다. 그리고 소위 레게 머리라고 하는 스타일로 머리를 꼬는 것 또한 무척 돈이 많이 든다. 흑인들에게는 머리 관리가 가장 높은 우선권을 차지하는 관계로 통계에 의하면 식비의 1.5배가 머리 관리에 들어간다고 한다. 하여간에 흑인들의 머리 관리에 대한 정성과 노력은 그들의 경제 규모로 볼 때 가히 우주개발에 맞먹을 정도(?)로 투자를 쏟고 있는 현실이다. 오죽하면 흑인 사회의 대학가에서 ‘머리를 내추럴 하게 놔두자‘는 캠페인까지 벌였을까?
사실 흑인들은 아주 오랜 예전, 원시부족 시대부터 자기 몸을 치장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보았듯이 팔과 목에 현란한 구슬을 두른다든지 머리카락을 복잡하게 땋는다든지 하는 것이다. 아마도 자연세계의 단조로운 생활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생계비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치장을 하는 현상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도 오로지 서구적 미의 기준에 따라서.
구름이 나에게 흑인들이 사는 모양을 보여주겠다는 배려에서 청소부 레베카를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사실은 얼마 전에 레베카가 이사를 했는데 격려금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사는 곳도 가보고 돈도 주려고 하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는 길에 묘한 일이 있었다. 구름이 흑인들이 이용하는 쇼핑센터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오겠다면서 차를 세우고 레베카에게 '너는 필요한 것이 없니?'라고 물었다. 레베카는 '없다'고 했는데 그 뉘앙스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구름이 차에서 내리자 레베카가 더듬더듬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상황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분명히 나도 구름이 '너 살 것 없니?'라고 하는 것으로 들었는데 레베카는 '무엇을 사줄까?'로 이해를 한 것이다. 양 쪽 다 그 정도 영어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의사소통의 오해가 생긴 것이다. 왜 그런 오해가 생겼는지는 그 다음 이야기에서 밝혀졌다
구름과 바람은 늘 고용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려고 노력을 했기 때문에, 그날도 현이 '너 살 것 없니?'라고 물었을 때 토베카가 '내가 사줄 터이니 필요한 것이 없니?'로 이해를 했던 것 같다. 나중에 구름에게 물어보니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잠시의 혼동이었지만 그것은 감동적인 혼동이었다.
구름이 거침없이 흑인들 사이를 걸어가는 것을 보고 토베카에게 '이 지역은 안전한 모양이지?'하고 물었더니 구름과 바람은 보통 흑인이 아니면 가지 않는 지역에도 전혀 꺼리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드나든다고 했다. 자기는 이 회사에 다니는 것이 매우 좋다면서 바람 부부에 대해서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토베카는 기술직이 아닌 까닭에 회사 안에서 비교적 적은 임금인 300불 정도를 받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집에 가보니까 방범 창살이 설치된 깨끗한 방에 침대를 비롯한 가구를 제대로 잘 갖추어 놓고 살고 있었다. 그녀는 월 90불 정도의 방세를 지불하고 있는데 좀 더 싼 곳도 있지만 안전을 위해서 이곳을 택했다고 한다. 모든 집에 전기가 흐르는 담장이 기본인 남아공에서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은 가진 사람대로 적게 가진 사람은 적게 가진 대로 안전을 위해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니까 에리히 프럼이 말하는 '소유가 존재를 위협한다'는 말은 여기에서도 증명이 되는 셈이다.
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사회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아서 잃어버릴 걱정이 전혀 없는 사람일 것이라는 결론도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하기야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염려해야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전기가 흐르는 담장
무질서의 질서
겉에서만 보면 남아공은 글자 그대로 무질서와 혼돈의 나라 같아 보인다. 남아공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애초부터 남아공은 위험을 전제로 설계된 나라이다. 호주의 행정 수도인 캔버라는 애초에 행정 중심으로 도시가 설계되어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는 이웃과 소통이나 왕래가 어려운데, 이 때문에 정신 질환의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마치 캔버라처럼 남아공은 범죄가 많을 수밖에 없도록 건설이 된 것이다.
보편적으로 세계 어느 곳이나 대도시는 소득에 따라 주거환경이 구분되는 형태로 되어 있다. 보통 미국의 경우 도시 북쪽에는 고소득층이 거주하고 남쪽에는 비교적 저소득층이 산다. 시드니만 해도 북쪽과 해안가인 동부는 고소득층이, 남부와 내가 사는 서부는 저소득층이 사는 것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악명 높은 '그룹 지역법'(Group Areas Act)'이라는 것을 만들어 어느 인종은 어느 지역에서 살아야 한다고 구역을 지정해 놓았다. 이 법에 따라서 흑인은 주거지역에 제한을 받으면서도 백인들이 쉽게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백인 거주 지역 가까이에 거주 지역이 하나씩 만들어졌다. 그래서 지금 흑백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를 두고 아귀다툼의 가족적, 가축적인 분위기로 섞여 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주거 조건이 천국과 지옥 만큼이나 격차가 벌어진 상태에서 어느 누가 편안하게 섞여서 살 수 있겠는가? 오히려 편안하면 반칙이지.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심하게 무장을 한 채 대치된 상태에서도 잠 잘 자고 밥 잘 먹고 살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남아공은 있는 사람은 철조망에 전기펜스를 두르고 살고 없는 사람들은 호시탐탐 침입할 기회를 엿보며 사이좋게(?)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은 우발적인 범죄보다는 기획범죄의 목표물이 되지 않기 위하여 전 국민이 신병훈련소에서 배우는 사주경계를 생활화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르크스가 표현 했던 대로 명실상부하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모두가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자 남아공은 세계 최대의 보안 시장이 되었고 이에따라 확인, 점검이 일상화된 것이다. 한 마디로 남아공에서는 어디나 모든 문에는 실제로 문지기가 붙어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남아공의 집들이 철조망이나 전기 펜스를 친 걸 보고 우리나라의 5,60년대가 떠올랐다. 물론 우리는 남아공처럼 범죄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공권력이 강력한 분단 체제의 국가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라서 모두들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까닭에 좀도둑들이 많았다. 그래서 집들의 담이 높았고 담을 쌓을 때 철조망을 치거나 유리병을 깨어서 올려놓기도 했었다. 그 당시 신당동에 성처럼 높은 담을 쌓고 살았던 이병철(우리는 돈병철이라고 불렀지만)의 집 대문의 처마 밑에서 놀다가 경비원에게 쫓겨나기도 했었다.
만델라가 나고 자란 SOWETO는 전통적인 요한네스버그 흑인 밀집 빈민지역으로 악명이 높았던 지역이다. 지금은 정부에서 방 2개짜리 오막살이집을 한 쪽에 계속 짓고 있지만 인구 1,000만의 요하네스버그의 거의 절반이 사는 SOWETO 지역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걸음마 단계의 작업에 불과하다. 주민의 절대 다수는 아직도 절대빈곤에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SOWETO 지역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해서 빈곤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기도 하다.
소웨토 지역
과거에 전쟁까지 치렀던 영국계와 네덜란드계 백인 사이의 불편함, 남아공 주민들과 이웃 나라에서 흘러 들어오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 빈부의 격차가 빚어내는 높은 범죄율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이 이 정도로 운영이 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어느 날 남아공의 모든 흑인들이 부처나 예수와 1대 1 카운슬링을 받아서 범죄가 없어진다면 오히려 수많은 경비 산업 인력, 경찰 등등이 당장 실업자 신세가 되어 국가가 지탱될 수 없을 것이다. 적당히 도둑과 강도도 있고 적당히 경찰도 있고 하면서 사회가 굴러 가고 있는 것이다. 한 직장, 한 사무실에서 월급의 차이가 10배, 20배, 심지어는 100배의 차이가 나도 폭동이나 내란이 일어나지 않고 그런대로 굴러가고 있는 곳이 바로 남아공인 것이다.
돌아오지 못하는 그들의 사정
회사에는 남아공에서 두 개의 나라를 통과해야 갈 수 있는 말라위에서 온 흑인들이 있다. 같은 아프리카임에도 말라위는 영어권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지만 일거리를 찾아서 남아공으로 내려온다. 회사에서 1년에 한 달간 유급 휴가를 주는데 문제는 고향에 갔다가 제 시간에 맞추어 돌아오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길거리에 나가면 모퉁이 마다 자기를 불러 주기를 바라면서 하루 종일 서 있거나 앉아 있다가 오후까지 불러 주는 사람이 없으면 점심도 굶은 상태에서 걸어 갈 힘조차 없어서 휘청거리면서 양철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인데 그들은 왜 제 때에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휴가를 얻어 귀향을 하는 사람은 고향에 가서 팔 수 있는 물건을 사 가지고 가서 파는데, 이게 수금이 안 되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혹자는 '아니? 돈을 벌러오는데 그냥 오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국경을 통과할 때 200불 정도의 돈이 없으면 통과를 시켜주지 않기 때문에 그 돈이 없어 오지 못하는 것이다. 무작정 떠돌아다니는 것을 막기 위한 법이지만 안정된 직장이 있는 사람의 통행에도 지장을 주는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는 정해진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사람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당사자가 돌아왔을 때 일자리를 없앨 수가 없기 때문에 파트타임으로 다시 시작하는 방법을 쓰려고 한다. '생산 양식이 인간의 상황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던 마르크스가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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