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생사관
첫 번째 이야기
노자(老子)가 죽었을 때 진실(秦失)이 문상하러 갔는데, 곡을 세 번만 하고는 나와 버렸습니다.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분의 친구 분이 아니십니까?”
“친구지.”
“그런데 지금처럼 그런 식으로 문상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되지. 처음엔 나도 여기 모인 사람들이 노자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으이. 아까 문상하러 들어가 보니, 늙은이들은 마치 자식을 잃은 것처럼 곡을 하고, 젊은이들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것처럼 흐느끼고 있더군. 이처럼 모인 사람들이 떠들고 우는 것은 노자가 원하는 바가 아닐 걸세. 이렇게 하면 하늘을 피하는 것이요, 사물의 본성을 배반함이요, 받은 바를 잊어버리는 것일세. 옛날 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늘을 피하려는데 대한 벌’이라고 했지.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어쩌다가 세상을 떠난 것도 순리이기 때문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지. 옛날 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느님의 매닮에서 풀려나는 것(縣解)’이라 했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는 이 글에서 공자의 가르침으로 대표되는 인과 의, 그리고 예와 같은 인위적인, 순리에서 어긋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지.”
장자는 (노자와 더불어) 직설적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저 도의 흐름을 따르라고 한다.
‘오컴의 면도날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실이나 현상에 관한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다면 그 중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법칙이다. 한편으로 보면 장자의 행동 법칙이랄까 처세의 원칙이랄까, 이것은 아주 단순하다. 도의 흐름에 따르라는 것이다. 이것이 니 마음대로 해라, 방종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자기자신이라는 아상과 고집을 내려놓고, 높은 도의 흐름에 열려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지 (도의 흐름과 하나가 되어야지) 하는 의지로 한순간에 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와 하나 됨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적인 것은 사실이다.
두 번째 이야기
장자의 처가 죽자 혜시가 조상(弔喪)하러 갔다. 장자는 그 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그를 본 혜시가 말하였다.
"부인과 함께 살아왔고, 자식을 길렀으며, 함께 늙지 않았는가. 그런 부인이 죽었는데 곡을 안 하는 것은 물론,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까지 부르고 있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네. 그가 처음 죽었을 때에야 나라고 어찌 슬픈 느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이전을 살펴보니 본시는 삶이 없었던 것이고,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형체조차도 없었던 것이었으며,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운조차고 없었던 것이었네. 흐리멍텅한 사이에 섞여 있었으나 그것이 변화하여 기운이 있게 되었고, 기운이 변화하여 형체가 있게 되었고, 형체가 변화하여 삶이 있게 되었던 것이네. 지금은 그가 또 변화하여 죽어간 것일세. 이것은 봄, 가을과 겨울, 여름의 사철이 운행하는 것과 같은 변화였던 것이네. 그 사람은 하늘과 땅이란 거대한 방 속에서 편안히 잠들고 있는 것일세. 그런데도 내가 엉엉 하며 그의 죽음을 따라서 곡을 한다면 스스로 운명에 통달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곡을 그쳤던 것이네."(장자, 33)
장자의 자연관, 인생관이 명확하게 나타나는 우화이다. 당연히 장자가 자기 처가 죽었다고 기뻐했던 것은 아니고, 삶과 죽음이 본시 자연의 일부분이자 순환의 일부분이니 누군가가 우리 곁을 떠나간다 한들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
장자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제자들은 그를 성대히 장사지내려 하였다. 그 때 장자가 말하였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과 겉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구슬 장식으로 삼고, 별자리를 진주와 옥 장식으로 삼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삼으려고 하니, 나의 장구는 이미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닌가?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태겠느냐?"
제자들이 말하였다.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먹어버릴까 두렵습니다."
장자가 말하였다.
"땅 위에 놓아두면 까마귀와 솔개가 먹을 것이고, 땅 아래에 묻으면 개미들이 먹을 것이다. 이쪽 놈이 먹는다고 그것을 빼앗아 딴 놈들에게 주는 셈이다. 어찌 그리 편협하게 생각하느냐?"(장자, 34)
장자의 처의 죽음과 더불어 장자의 자연관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장자는 이렇게 자기 자신이 자연의 일부분이고, 자연과 함께 살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막연한 공포마저도 초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