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숙희 시조집 「먼 길을 돌아왔네」 (푸른사상 . 2020) 서평
청아하고 단아한 ‘울음의 집’
유 진
그의 삶은 여전히 일방통행이다.
실존으로부터 도망치려하지 않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투명하고 단정하다.
서숙희 시조집 「먼 길을 돌아왔네」의 마지막장을 덮으며 떠올린 생각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캄캄한 울음의 집’을 지고서 여기까지 왔고, 고통과 상처의 맨발로 또 얼마나 더 가야할지 모른다. 그는 부조리한 운명, 절망과 고통과 상처의 실존에 대해 여러 겹의 눈으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하며 숱한 시간을 거쳐 왔다. 그리고 여전히 ‘운명’과 ‘화해’라는 묵시적 순응과 극도의 정신주의에 결탁하는 과정의 연속선상에 있다.
억압과 은거의 공간에서, 삶의 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벼리고 벼리며 먼 길을 돌아온 여기..... 큰 바람이 일어나려는 먼 산 바람꽃처럼 온통 잿빛이어야 할 그의 ‘울음의 집’이 어찌해서 청아하고 단아한 옥빛으로 장식되어 있을까?
그늘이라곤 없어 보이는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와 공직에 종사한다는 정도만 알고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으니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기회도 없었다. 수년간을 대면대면 지냈던 그를 별다른 조우도 없이 친숙하다고 느끼게 된 건 그의 시조집 『아득한 중심』을 읽고 난 이후부터라고 해야 옳겠다.
아담한 체구의 가녀린 모습 속에 내재된 고뇌와 묵음(默音), 그리고 강인한 의지와 진솔하고 야리야리한 내면을 읽으면서 그가 지닌 청백한 품성을 짐작했고, 책임감 강하고 경위(涇渭)가 분명한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얻었다.
동류항이랄까 동병상련이랄까, 마치 오랫동안 신의를 지켜온 관계처럼 느껴지는 것도 부조리한 운명과 상처, 외로움과 열정, 공익에 대한 올곧음 등 일련의 정서적 표출로 정직하게 다가오는 시편들에서 획득한 신뢰감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 확신에 대한 믿음은 조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러하기에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읽힌다고 하는 것이리라.
이번 시조집 『먼 길을 돌아왔네』 에서도 역시 그가 추구하는 세계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응시와 수용이다. 시종일관 단호하고 강한 이미지로 속도감과 긴장감을 이끌어내 사물의 이미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탁하면서 인습화된 지각을 뛰어넘고 있다.
태양은 순순히 오랏줄을 받았다
팽팽하게 차오르는 소멸을 끌어안아
일순간
대명천지는
고요한 무덤이다
입구와 출구는 아주 없으면 좋겠다
시작과 끝 또한 없으면 더 좋겠다
캄캄한 절벽이라면 아, 그래도 좋겠다
빛을 다 파먹고 스스로 갇힌 어둠 둘레
오린 듯이 또렷한 금빛 맹세로 남아
한목숨,
네 흰 손가락에
반지가 되고 싶다
ㅡ「금환일식」 전문
태양과 달과 지구가 일직선으로 놓이면서 태양과는 가장 가깝고 달과는 가장 멀 때 발생하는 일식이 금환일식이다. 달이 태양을 전부 가리지 못하고 달에게 가려진 둘레를 따라 태양의 가장자리가 금반지처럼 보이게 되는 천문현상의 잔상을 시인은 자신의 삶과 정서로 귀환해 들인다.
금환일식이라는 일순간의 현상에 태양과 오랏줄, 팽팽한 소멸, 입구와 출구, 시작과 끝, 빛과 어둠의 둘레 등, 서로 상반되는 이미지를 배치해 긴장감을 높이고, “한목숨, 네 흰 손가락에 반지가 되고 싶다”라며 들끓는 사랑의 감정을 감각적으로 이미지화시켰다.
순순히 받은 오랏줄은 대명천지 고요한 무덤이 되었고, 오린 듯이 또렷한 금빛맹세가 남아 고독한 일생을 조탁해야할 오랏줄이 되었다. 그래서 한순간의 덧없음을 회유할 수 있다면 “입구와 출구는 아주 없으면 좋겠다/ 시작과 끝 또한 없으면 더 좋겠다/ 캄캄한 절벽이라면 아, 그래도 좋겠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자신을 속박하는 운명으로부터 탈출하려기보다 차라리 그 속에 갇혀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랑과 이별은 아, 낙화이며 유수”이니 지나온 고통의 궤적이 되살아나는 금반지와 사랑의 맹세가 한순간의 덧없음을 알기에 더욱 갈망하게도 되는 것은 아닐까.
있고 없음이 생멸의 순환 속에 존재하듯이 광대무변의 우주 안에서 인간 또한 생하고 멸하는 유한존재이기에 무한을 꿈꿀 수 있는 것이리라.
아슬한 벼랑 위에 한 생을 걸어 놓고/ 명치 끝 으스러지도록 그늘을 껴안으련다/ 세상 가장 아름다운 슬픔과 내통하며/ 한사코 꽃잎을 밀어내는, 희디흰 꿈을 꾸련다 ―「바람꽃」 부분
젖은 생을 조금씩 배경에게 내어주고/ 저 또한 배경이 된/ 한 다발의 마른 시간/ 기억을 털어내고/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마지막 한 문장/
마른다, 그 말의 끝은/ 아직 젖어만 있네 ㅡ「먼 길을 돌아왔네」부분
잠든 세상 한복판이 환하게 날카로울 때/ 결벽증의 밤이 사방연속무늬로 번질 때 / 고독은 경전처럼 깨끗해지지 ㅡ「고독의 뼈는 단단하다」 부분
그는 사방연속무늬로 번지는 고독이 경전처럼 깨끗해질 수 있다고 증언한다. 아슬한 벼랑 위에서 스스로 바람의 딸이 되어 세상 가장 아름다운 슬픔과 내통하며 명치끝이 으스러지도록 그늘을 껴안아버리겠다는 심정일 때도 그렇고, 젖은 생을 조금씩 배경에게 내어주고 저 또한 배경이 된 한 다발의 마른 시간에도 그렇고, 적막의 목을 꺾어 단정하게 걸어두고, 단단한 뼈 하나로 서서 불가항력으로 웃는 밤에도 그렇게 경전처럼 깨끗해지는 고독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도전과 순리의 공존이 선명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대로 비워둬도 되고 채워도 되는 이것/ 가까이 있던 것들과 멀리 있던 것들이/ 천천히 자리 바꾸는 시간 혹은 공간 ㅡ「이후」부분
누구나 삶 앞에서는 순교자가 되는 가/ 헛되이 차올랐던 무르고 비린 것들/ 깨끗이 비워내고 등뼈 하나로 남은 몸/ 마침내 황홀한 열반 같은, 잘 마른다는 이것 ㅡ「겨울 덕장에서」부분
“빈 몸 가득 바람의 살 단단하게 차오르고, 햇살의 잔뼈들도 순정하게 꽂히니 마침내 황홀한 열반 같은, 잘 마른다는 이것” “그대로 비워둬도 되고 채워도 되는 이것/ 가까이 있던 것들과 멀리 있던 것들이/ 천천히 자리 바꾸는 시간 혹은 공간”에서 고뇌와 근심을 인내하던 그의 사유와 성찰은 극복과 구현이라는 가치질서로 범위를 넓혀간다.
「손의 벽」에는 “마주하여 하나 되면 따스한 기도가 되고/ 의기투합 신명 나면 우레 같은 박수가 되는” 어우러짐에 대해 손을 내밀어 인간 소외가 지배하는 부조리의 세계를 굴복시키자는 따스함과 위로의 메시지를 담고, 「쇄빙선」에는 ‘감내’가 아니라 수용(受容)의 방법을, 「종이컵 연애」와 「캔을 따는 시절」 에는 자본의 메커니즘에 길들여진 사회를 시종일관 단호하고 강한 이미지로 속도감과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의미와 형식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고, 간결과 명징을 우선으로 하는 그의 섬세하고 예리한 촉을 따라 가노라면, 삶이란 결국 크고 작은 상처와 치유를 반복하면서, 억압과 은거의 공간을 왕래하면서, 가장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삶의 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면의식의 묵시적 기능은 어디까지 작용이 가능하고, 감내와 수용(受容), 응축과 절제를 통한 치유의 완성지점은 어디일까. 결국 실존의 무게로부터 탈주하려는 욕망과 벗어날 수 없는 구속 사이에서 상처와 고통을 극복하고자 자신을 벼리고 마음을 다잡고 갈등을 이울게도 하는 과정이 삶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시를 관통하는 그의 품성은 청백하고 경위(涇渭)가 분명하다. 여전히 일방통행인 자기모색과 세상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가 신뢰도를 높일 수밖에 없겠다. 운문의 완성을 지향하는 현대시조의 큰 별이 될 그의 미래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