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혁명 뒤 나라 곳곳에서는 교원노조(敎員勞組)가 결성되고, 이듬해에 5·16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혁명 검찰부를 구성하고 교원노조 운동을 용공으로 매도하며 소속 간부들을 잡아들인다. 이때 소설가 이병주(李炳注, 1921∼1992)는 교원노조 고문이라는 명목으로 잡혀 들어간다. 사실은 이병주가 주필로 있던 {국제신보}에 [조국의 부재(不在)]·[통일에 민족 역량을 총집결하라]는 제목의 한반도 영세 중립국화를 주장한, 시대를 너무 앞질러 간 논설을 써서 싣는 바람에 걸려든 것이다. 이 일로 이병주는 군사 정권의 이른바 혁명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을 복역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다. 출소 직후 이병주는 수감 생활을 하며 구상한 소설을 1주일 만에 원고지 5백여 장 분량의 중편 소설로 써낸다. 이병주의 등단작이 된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뜻하지 않은 수감 생활에 대한 일종의 보상인 셈이다. 마흔네 살이 되던 해에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왕성한 필력을 과시한 이병주는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1972)·{예낭 풍물지}(1974)·{망명의 늪}(1976)·{지리산}(1978)·{바람과 구름과 비碑}(1978)·{산하山河}(1979)·{행복어 사전}(1980)·{소설 남로당}(1987) 등의 문제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작가로서 입지를 굳힌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을 즐겨 하던 그는 작가란 햇빛에 바래진 역사를 새로 쓰는 복원자, 준엄한 사관(史官)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모든 역사는 승자들을 위한 기록이다. 따라서 당연히 역사는 승리자 중심으로 기술되고 결과만 따지게 된다. 그러나 문학은 역사가 빠뜨리고 간 것을 챙기고 메워준다. 무명의 패배자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결과만이 아니라 동기도 중요하게 조명을 한다. "역사의 그물로 파악하지 못한 민족의 슬픔의 의미를 모색하는 것"을 자신의 문학적 지향으로 삼은 이병주는 철저한 자료 수집과 취재에 바탕을 두고 한국 현대사를 소설의 공간에서 충실하게 되살려낸다.
1970년대 중반, 문인들이 모인 어느 술자리. 한 젊은 소설가가 술기운을 빌려 이병주에게 대뜸 묻는다. "선생님, 빨치산 하셨지요?" 적당히 술이 올라 기분이 좋았던 이병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린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이병주에게 쏠린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병주가 벌떡 일어선다. "내가 빨치산 한 걸 네가 봤어? 증거 있으면 대보라구, 이 자식아!"
이병주가 들고 있던 술잔이 어느 새 젊은 작가의 얼굴을 향해 날아간다. 이어 말 한 마디 잘못 꺼낸 죄로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한 젊은 작가가 묵묵히 있자 이병주는 분이 덜 풀린 듯 후배 작가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주위 사람들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가까스로 더 큰 불상사로 번지지는 않는다. 이병주는 자신에게 평생 동안 따라다닌 좌익 혐의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의 사상적 편향에 대한 의심 때문에 그는 숱한 오해와 불이익을 당하며, 그의 내면에는 이에 대한 강박증적 피해 의식이 깃들이게 된다. 그가 숨진 뒤 한 유력 월간지에 마치 특종처럼 [나는 빨치산이었다]라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 기사대로라면 6·25 직후 해인사 경내에 피신해 있던 이병주는 그 곳을 습격한 빨치산 부대장 김간도를 만나고, 일본 메이지대학 동창인 그를 따라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다. 그러나 그 기사는 오보였다. 그의 좌익 전력은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 연극동맹을 맡은 것이 전부이고, 그 어쩔 수 없는 '부역 행위' 때문에 진주경찰서에 자수해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이병주의 삶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태평양전쟁, 강제 징병, 해방 공간에서 불거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 한국전쟁, 부역, 남북 분단, 5·16정변, 필화 사건으로 말미암은 감옥살이 등 수난과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다. 그는 삶의 갈피마다 서려 있는 수난과 질곡의 현대사를 어떤 식으로든 토해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해방과 6·25를 전후하여 지리산에서는 2만여 명이 죽어갔습니다. 파르티잔과 군경 토벌대인 이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었지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또 파르티잔의 상당수가 잘못 선택한 길을 갔든지 간에 그들의 죽음은 민족과 시대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합니다. 2만여 생명이 죽어간 민족의 비극을 그냥 묻어둔다는 것은 기록과 문자가 있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들의 일이 가슴에 호소하는 그 무엇으로 남겨져야 합니다."
지리산, 높고 험준한 연봉과 크고 작은 계곡을 거느린 수려하고 웅혼한 이 산은 제2차 세계대전 뒤 동서의 냉전 이데올로기가 집중적으로 대치한 곳이자 이윽고 동족 상잔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펼쳐진 곳. 해방 직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있다."는 말을 따라 칠선골, 뱀사골, 피아골, 칼바위골, 거림골, 백운골 등 골짜기로 깃들인 2만여 젊은이들의 주검을, 그 이름 없는 패자敗者들의 허망한 주검을 끌어안고 침묵하고 있는 산. 이병주는 이 지리산에 묻힌 이름 없는 혼령들의 부름을 받는다. 그의 지리산은 일제의 징용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간 젊은이들이 해방 뒤 좌익 이데올로기를 붙안고 열정에 찬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6·25를 전후해 빨치산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장엄한 서사를 아우른다. 대하 소설 지리산은 1972년 9월 월간 세대에 연재되기 시작해 1977년까지 60회에 걸쳐 실리다가 일시 중단된 뒤, 1985년에서야 마무리된다. 작가가 무려 15년에 걸쳐 완성한 이 대하 소설은 남한 내의 빨치산과 남로당 활동을 최초로 소설화한 작품이다. 지리산은 조정래의 태백산맥太白山脈,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 이태의 남부군南部軍 같은 빨치산 문학의 물꼬를 튼다.
"한이 많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이 풀리려면 아직도 멀었다. 그러니까 계속 써야 한다."
2. {지리산}(1978)
일제 치하인 1938년께, 진주중학교 3학년이던 박태영과 이규는 막심 고리키의 책을 읽고 함께 "진리의 사도司徒가 되자."는 맹세를 했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다. 1940년 학교의 병영 기지화, 조선어 과목 폐지, 일본어 상용 철저, 신사 참배 강요, 교복 강제 착용, 창씨 개명 등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강화되자 박태영과 이규는 학교 안에서 일제의 군국주의와 맞서 싸운다. 이규는 어렵게 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규에 이어 박태영도 곧 일본으로 가는데, 그는 우유 배달부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중학 졸업 자격 검정 시험에 해당하는 전검專檢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다. 박태영은 저와 마찬가지로 우유 배달부이자 일본공산당의 원조격 활동가로 위세를 떨친 적도 있는 도쿄제대 출신의 일본인을 만나 좌익 사상에 빠져든다.
1943년 말 조선의 젊은이들에게도 징병령이 떨어지자 박태영은 학병 입영을 거부하고 일본을 떠날 준비를 하다가 중학교 선배인 하준규를 만나 항일 운동에 뜻을 같이하기로 한다. 박태영은 귀국해 하준규와 함께 덕유산 은신골로 들어간다. 징병과 징용을 피해 입산하는 젊은이들의 수가 늘어나자 그들은 경찰 수색대에 대항하기 위해 무술을 연마하고 무장한다. 인원이 더욱 늘어나자 그들은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인 '보광당'을 조직하고, 본거지를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옮긴다.
박태영은 공산당 지도부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을 만나면서 이론과 실상이 어긋나는 당의 정체를 확인하고 더욱 실망에 빠져 남노당의 복당 권유를 뿌리친다. 1949년 2월께, 그는 해방 전의 '보광당' 시절부터 동지인 순이로부터 지리산지구 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활동하던 하준규가 남한에 단독 정부가 들어설 무렵 월북하고, 노동식은 경찰과 교전하다가 죽었으며, 그리고 빨치산에게 철도편으로 물자를 보급한 자신을 잡기 위해 경찰이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박태영은 이듬해인 1950년 4월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6·25를 맞는다.
얼마 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민군이 패주하자 박태영은 이태와 함께 순창으로 피신했다가, 조선노동당 전라북도당 유격대사령부 산하의 빨치산으로 지리산에 든다. 이태와 박태영은 2만 명이 넘는 토벌대 사이를 기적적으로 뚫고 나오기도 하고, 얼마 뒤에는 이현상이 이끄는 최강의 유격대이며 남한 6도 빨치산 부대를 총지휘하던 남부군 사단에 전속된다. 그러나 덕산 전투 이후 하동읍, 구례읍, 화개장터, 곡성, 운봉 등 지리산 주변으로 다니며 토벌대와 치른 반 년 동안의 전투 뒤 인원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나중에는 250명 정도만 남는다. 10월 중순에 부대가 재편되면서 이태는 본부 요원이 되어 [승리의 길]이라는 산문과 전기를 쓰고, 박태영은 계속 평전투원으로 싸운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는 한편 남한 정부는 대대적인 빨치산 소탕 작전에 나서고, 지리산 곳곳으로 쫓겨다니던 남부군은 얼마 뒤 30명 남짓한 대원만이 남아 전멸 직전에 이른다. 이 때 낙오한 이태는 국군에게 투항하고, 박태영은 공산당에 환멸을 느끼지만, 지리산에서 숨을 거두는 최후의 빨치산이 되기로 결심하고 계속 항쟁한다.
소설은 '에필로그'를 통해 그 후일담을 들려준다. 1956년 1월께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규는 형무소에 있던 순이로부터 1955년 8월 말 지리산 청학동에서 끝까지 버티다가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으로 삶을 마감한 박태영의 비극적 종말을 확인한다. 이승만 정권에 이어 박정희 정권 또한 반공反共을 국시로 택한 남한의 정치 맥락 속에서 볼 때 빨치산의 행적과 고뇌, 비극적 말로를 생생하게 되살려낸 대하 장편 소설 [지리산智異山]은 충분히 눈길을 끌 만한 작품이다. 이병주의 [지리산]은 1938년부터 1956년까지 일제 강점기―해방―분단―6·25를 거치는 민족사의 굴곡을 배경으로 좌익 사상에 젖어 빨치산 활동을 한 지식인 청년들의 파란 만장한 운명을 추적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8년부터 휴전 뒤인 1956년 사이에 있던 일들을 다룬 이 소설은, 전반부에서는 지식인 청년 이규와 박태영의 성장 배경과 성격, 각자의 이념 선택 과정을 그들의 행동 반경인 고향과 서울, 도쿄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가며 그려내고, 후반부에서는 주로 박태영을 축으로 징병을 피해 입산한 청년 학생들이 빨치산의 전사로 변신해 지리산 일대를 누비고 다니는 정황을 담아낸다. [지리산]은 이렇게 광범한 시·공간적 배경과 사건을 거느린 채, 민족의 시련기와 젊은 시절이 겹치며 좌우 이념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들의 고뇌와 파란 만장한 인생 유전을 다룬 작품이다. 일각에서는 주인공인 박태영이 자주 드러내는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들어 [지리산]을 단순한 반공 소설로 취급하는 평자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좌우의 갈등 속에서 좌익 지식 청년층에게 초점을 맞추고, 박태영이 좌익에도 환멸을 품지만 우익으로 전향하거나 우익을 옹호하지 않으며, 결말에 가서도 전향 대신에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는 점 등은 당시의 정치 상황에 비춰볼 때 높게 평가할 만하다. 임헌영은 이병주의 소설을 "분단 문학의 원점"이라고 보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역사 허무주의와 영웅주의가 역사 해석에 깊이 작용하고 있어 과거 복원의 객관성이 충분히 유지되지 못하였"다는 등 평가가 조금씩 엇갈린다.
3. {바람과 구름과 비碑}(1978)
{바람과 구름과 비碑}(1978)는 한국의 사마천(司馬遷)을 꿈꾸었던 이병주가 가장 공들여 쓴 소설 중의 한편이다. 평소에도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는 말을 즐겨했던 이병주는 생전에 놀라울 만큼 다작(多作)을 하며 작가적 역량을 뽐내며 숱한 가작(佳作)들을 내놓았지만 그중에서도 기울어가는 조선 왕조(王朝)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이 소설은 방대한 사료(史料)와 날카로운 역사의식, 그리고 박물지적(博物誌的) 지적 편력을 정교하게 교직(交織)해 내놓은 작가의 대표작의 하나이며 야심작이다.
{바람과 구름과 비碑}는 역사 소설이다. 이때 '역사'가 "물질적 사실과 제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소설'은 그것에 대한 실증적이며 고고학적인 탐사를 넘어서서 그 바탕 위에 서서 그걸 만들고 수시로 바꿔나가며 새로운 역사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의 생생한 숨결과 느낌, 행동의 궤적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훌륭한 역사 소설가라면 사실(史實)에 충실한 엄정한 사관(史官)이면서, 동시에 역사가 누락하는 패자의 눈물과 한숨의 사연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영혼의 사관이 되어야 한다. 이병주는 바로 그런 작가이다. 민비나 대원군과 같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당대 권력층들과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 등의 개화파들이 사실에 입각한 인물들이라면, 최천중·연치성·하준호·구철용·강원수·박종태·최팔용·유만석 등 {바람과 구름과 비碑}의 실제적인 주인공들은 사실의 역사가 누락하고 있는 당대 영혼의 역사를 드러내 보여줄 허구의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소설은 사실(史實)의 재현에 바탕을 두면서도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가상과 허구라는 효모를 버무려 이야기를 발효시킨다. 작가 이병주는 어느 자리에서 {바람과 구름과 비碑}를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당대 지식인들과 일부 지배층이 동학당과 합세해서 청국과 일본의 개입을 막고 혁명의 과정을 밟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 만일 국왕과 동학도가 손을 잡았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 나는 이러한 가상 아래 있을 수 있었던 찬란한 왕국, 기막힌 공화국에의 꿈을 곁들여 민족사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작가 이병주는 그 작가적 야심, 역사적 통찰력, 웅대한 스케일만으로는 각각 국민작가로 손꼽히는 중국의 루쉰이나 일본의 나츠메 소세키에 비견할 만하다. 이 소설의 역사적 배경은 서양의 근대에 뒤떨어졌던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조선은 각각 동양적 근대의 창출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안고 있던 19세기 말이다. 그러나, 세 나라의 운명은 서양의 근대를 따라잡고 넘어서 가야 한다는 내면의 강박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에 따라 서로 엇갈린다. 일본은 일찍이 서구 근대의 문명과 기술을 받아들여 근대적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부강(富强)에 힘써 신흥 열강의 반열에 올라선 반면에 조선의 권력 핵심층은 왕권 다툼에 정신이 팔려 서구 근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문호(門戶)를 굳게 닫아걸고 쇄국(鎖國)이라는 시대착오적 정책을 썼고, 타락한 관리들과 토호(土豪)들은 제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고, 지식인들은 개화파와 수구파로 갈려 소모적 논쟁으로 날을 보내며 국가를 일신할 수도 있었던 기회를 유실(流失)했다. 그 결과 국가적 역량을 남김없이 탕진하고 자력갱생(自力更生)으로 나아가는 길을 스스로 차단함으로써 민족 현실은 궁음(窮陰)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미래의 운명을 일본·러시아·청과 같은 인접 국가들과 영국·프랑스·미국과 같은 세계 열강들에게 맡긴 꼴이 되고 말았다. 이 격동하는 한말(韓末)에 한 청년이 분연히 일어나 나라꼴을 누추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늙은 조선을 뒤엎고 새 입헌군주국을 세울 웅대한 꿈을 품으며 {바람과 구름과 비碑}는 펼쳐진다.
바로 그 주인공이 일개 관상사 최천중이다. 그가 관상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달리 보면 여색을 탐하는 방탕아요, 화려한 언설로 권문 호족들의 마음을 홀려 재산을 빼돌리는 사기사(詐欺師)요, 뚜렷한 생업없이 천하를 주유(周遊)하는 백수건달이나 다름없는 처지다. 그런 점에서 최천중은 백수건달에서 일약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방(劉邦)이나 주원장(朱元璋)에 비견할 만하다. 최천중은 조실부모하고 조선 왕조에서는 입신출세의 길이 막힌 천출(賤出)이다. 하지만 그는 저의 처지에에 비관하지 않고 오히려 이상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큰 뜻을 품어 재물을 모으고 인재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유랑하며, 호학(好學)하는 사람과 만나면 시문을 나누고 가르침을 전할 이들에게는 인간의 도리와 가치에 대해서 훈육하기도 하는 이상주의자요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계해(癸亥), 철종(哲宗) 14년. 장동 김문이 세력을 독점하고 있던 시절, 훗날 대원군이 되어 대권을 휘두르게 되는 이하응은 야심을 감춘 채 장동 김문 일가의 문전을 전전하며 유랑걸식 하던 시절이다. 권문 호족은 춘흥에 취하고 백성은 춘궁에 곯아 졸고만 있는 을씨년스런 봄. 관상사 최천중은 불원한 장래에 망하게 될 이 나라의 왕권을 물려받아 군림할, 왕재가 될 자식을 가져야겠다는 일심으로 왕재를 낳을 밭을 찾는다. 최천중이 여주 신륵사에 머물고 있던 차 마침 불공을 드리러 온 부인의 단정한 옷매무새를 보고 반하여 부인의 귀로를 뒤쫓으며 이 파란만장한 소설의 도도한 흐름은 시작된다.
최천중은 빼어나 지모(智謀)로 시대의 변화를 읽고 나라의 살 길을 궁리한 끝에 돈과 인재를 끌어 모으며 장차 세울 입헌군주국의 초석을 닦는데 혼신을 다한다. {바람과 구름과 비碑}는 최천중이 삼전도장이라는 결사(結社)를 만들고 조선 팔도의 호걸과 인재, 기재를 끌어 모으는 이야기이고, 부패하고 퇴락한 당대 권력 집단을 해체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는 야심을 품은 젊은이들의 혁명사이며, 혈기 넘치는 사내들의 박람강기와 기개와 의리, 여인들과의 애정 편력이 한데 얽히고 설킨 채 흘러가는 구한말 남성 중심의 생활사요 사회사상사이고, 천하 절경을 유람하며 시가(詩歌)를 짓고 기방(妓房)의 가희(佳姬)들과 더불어 음풍농월하며 즐길 줄 아는 호남아들의 풍류사(風流史)이다. 그 혼미를 거듭하는 역사의 격랑을 헤쳐나가는 최천중과 그 휘하의 젊은이들이 권문 호족들을 상대로 벌이는 신출귀몰하며 담대한 모험담의 재미는 무협지를 능가하고, 갖가지 기구한 사연과 인연으로 맺어진 이들이 수많은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펼쳐내는 이야기의 방대함은 삼국지에 비견할 만하다. 이 소설은 난세(亂世)를 살아가는 법을 담은 역사교과서요, 꿈을 펼치기 위해 나아가고 머무를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담은 체서법과 양생(養生)과 수신(修身)의 교훈을 담고 있는 지침서이고, 그리고 각 장마다 난만하게 펼쳐지는 빼어난 한시(漢詩)들을 감상할 수 있는 한 권의 시가집(詩歌集)로도 읽힐 수 있다.
4.
1992년 4월 4일치 도하의 신문들은 일제히 한 작가의 타계 소식을 전하고 있다. 마흔네 살의 늦깎이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이래 한 달 평균 200자 원고지 1천 장, 총 10만여 장의 원고에 단행본 80여 권의 작품을 남기고 갑작스럽게 떠난 작가 이병주의 죽음을 알린 것이다. 그는 "격동의 현대사에 대한 소설적 복원"에 주력한 대형 작가,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일관한, 프로패셔널리즘이 철저하게 몸에 배어 있던 작가다. 생전에 그는 "나는 프로 작가다. 따라서 작품을 많이 써야 하며 어떠한 것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냉정한 평가대로 혼돈混沌과 미제未濟의 시대를 살면서 "양지 쪽으로만 걷는 인간, 위난危難이 저편에서 피해 가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은 격동의 현대사 속에 끼여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부하負荷를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고, 그 삶의 안쪽에 고난과 비극의 무늬가 아로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타고난 체력과 열정, 박람강기로 무장한 작가였던 그의 죽음은 한국 문학의 부피를 늘려온 보기 드문 대형 작가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큰 아쉬움을 남긴다.
이병주는 일제 강점기인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다. 그가 다닌 진주중학晋州中學은 일제의 조선어 과목 폐지와 일본어 상용, 신사 참배, 창씨 개명 강요로 대표되는 식민지 교육 체제 속에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을 만큼 민족주의 정신이 퍼렇게 살아 있던 학교다.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식민지 교육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학풍 속에서 정신을 키운 이병주는 일본 유학을 떠나 메이지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다니던 1944년 학병學兵으로 소집되어 중국 쑤저우蘇州의 일본군 수송대에 배치된다. 그는 일제 패망 뒤인 1946년 3월 8일 중국 상하이에서 미군의 LST를 타고 한국으로 귀환한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 생가로 돌아와 쉬고 있던 그는 진주농고晋州農高의 요청으로 영어 교사가 된다. 해방 뒤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주농고 학생들은 좌익인 '학동學同'(학생동맹의 준말)과 우익인 '학련學聯'(학생연맹의 준말)으로 갈려 싸우고 있었고, 교사들도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 있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병주는 좌우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일종의 회색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학동'과 '학련' 양쪽에서 '반동 회색 분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한다.
이병주가 미국 뉴욕으로 떠난 것은 1990년 10월 8일의 일이다. 그는 복간되는 신경남일보新慶南日報의 명예 주필 겸 뉴욕지사장의 직함을 받고 조용히 출국한다. 뉴욕의 한국 교포 밀집 지역인 플러싱에 거처를 정한 그는 낮에는 원고를 쓰고 저녁에는 시내 곳곳을 산책하며 소일한다. 그가 숨지기 전에 쓰고 있던 소설은 장편 [카리브해]와 야심을 갖고 시작한 역사 실명 소설 [제5공화국]이었다. 건강이 나빠져 1991년 3월 뉴욕에서 돌아와 곧장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하는데, 그때 그는 폐암 선고를 받는다. 주변에 그 사실을 숨긴 채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작가는 속기사를 소개받기로 한 날, 1992년 4월 3일, 이국 땅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사인은 폐암이었다. 그는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그 순간까지 '써야 될 소설'을 준비한 진정한 프로패셔널의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