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22. 저녁 8시. 롯데콘서트홀. 멘델스존 한여름밤의 꿈
셰익스피어, 그는 천재다. 나는 그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 -엘리자베스 여왕-
지난 천년간 최고의 문학가의 1위는 단연 셰익스피어 -영국BBC 앙케이트-
천년동안 역사상 최고의 인물에 몽골의 칭기즈 칸, 최악의 인물로 독일의 히틀러, 최고의 여배우는 그레타 가르보, 성악가로는 엔리코 카루소, 천재로는 셰익스피어, 작곡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1995년 워싱턴 포스트-
셰익스피어는 생전에도 그리고 죽어서도 영원히 영국인들에게 고마운 존재이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 이후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루고, 인도를 비롯한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며 막대한 부를 누렸던 영국. 결코 해가 지지 않는다 자부하던 영국. 그러나 1, 2차 대전의 무서운 휴유증으로 이빨 빠진 늙은 사자가 되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셰익스피어의 혼령은 세계 여러나라를 두루두루 돌며 조국을 먹여 살렸다. 재작년이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이고 올해가 서거 400주년이라고 한다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는 언제나 천재중 천재로 사랑받고 있고, 전세계적으로 그의 연극은 늘 무대에 상연되기 때문이다. 요컨데 그는 유명세를 넘어 일종의 전설이 되고 있다.
이미 독자들에게 여러차례 밝혔듯이, 큰이모부는 독일인이다. 가문의 뜻을 받들어 내과의사가 되었지만 한때 이모부는 영문학, 특히 셰익스피어에 심취해 있었고, 작가가 되고싶어 했단다.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관련 서적으로 빼곡한 책장, 안락의자에 앉아 독서를 하며 못 다 이룬 젊은시절의 꿈을 회상하는 게 이모부의 유일한 낙이다.
지난 6월 말러 교향곡 5번 이후 정말 오랜만에 무대 위 지휘자 성시연씨를 만났다. 말쑥한 연미복 차림. 여성이라는 성(性)을 초월한 듯한 그 당찬 걸음걸이는 여전했다. 변화라 한다면....대담하고 대단히 절도있게...시원시원한 지휘를 할 때마다 경쾌하게 흔들리는 단발머리의 나부낌이라 할까?! 슬쩍 조르주상드가 오버랩된다.
호탕한 여걸 성시연씨와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이라니!! 마치 선머슴 같은 여자가 아기자기한 스타일의 쉬폰 원피스를 막무가내로 입겠다는 식이었다. 공연 전 브로셔를 들여다보다가 그녀의 리즈시절 멘델스존 이탈리아 교향곡에 대한 애피소드를 읽었다. 가벼운 아침식사사를 기대했다가 스테이크를 먹고왔다라는 어느 관객의 위트있는 평이었는데, 역시 내 그럴줄 알았다니까... 뭐 차이코프스키의 템페스트 교향적 환상곡이야 그럴싸하겠지만 ....
수년전의 그날처럼 오늘밤도 여전히 육덕진 멘델스존일까?!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그녀의 멘델스존은 아도니스보다도 호리호리하고 아름다웠다.
여하튼 한여름 밤하늘에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요정들을 만나려면 유럽으로 가야하는데, 그러려면 일단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기로 한다...그런데 어째!! 바다 사정이 심상치 않다...잿빛 하늘, 몰려드는 먹구름, 그 아래 생기를 잃은 적막한 바다, 점차 거세지는 듯한 풍랑... 폭풍우의 전조를 감지한 서너마리의 갈매기가 오락가락 한다. 주위는 점차 밤처럼 어두워진다. 어느 순간 희미한 실체와 마주쳤는데, 바로 정령 에어리얼이었다.
바닷물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뒤집히는 순간 무수한 거품이 피어올랐고 거센 바람이 훑고 지나가자 파도는 미친 듯이 춤을 추었습니다.
거대한 파도에 비하면 그들이 탄 배들은 가랑잎같이 작고 위태로워 보였으며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처럼 쉴새없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수평선 부근은 금방이라도 무서운 폭풍이 몰려올 것처럼 시뻘겠습니다.
-그림동화집 어부와 그의 아내 중에서-
성시연, 프로스페로는 바로 그녀였다!! 다년간 음악이란 마법을 연마한 그녀가 수십명의 충성스런 종복 에어리얼들을 일제히 불러 모으고, 요술지팡이로 명령을 내리자, 고요하던 홀에는 돌연 번갯불이 번쩍이고 천둥이 쳤다. 그러자 집채만한 파도가 집어삼킬듯한 기세로 밀려왔다.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와는 전혀 다른 모습, 요컨데 성날대로 성이 난 바다였다. 그 긴박감에 두 손이 땀으로 눅눅했다.
밖에는 사나운 폭풍이 휘몰아쳐서 그는 제대로 걷기도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집들과 나무들이 마구 쓰러지고 산들이 부르르 떨고 있었으며 거대한 돌들이 바다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늘은 칠흙처럼 컴컴했으며 천둥번개가 쳤습니다. 바다에서는 시커먼 파도가 교회의 첨탑이나 산맥처럼 높이 치솟아올랐으며 그 끝은 하얀 거품으로 뒤덮혀 있었습니다.
-그림동화집 어부와 그의 아내 중에서-
이윽고 격렬하던 폭풍우가 다소 누그러들면서 구름 뒤 한줄기 금빛 햇살이 비치듯, 차이코프스키 특유의 서정적 멜로디가 나온다. 그 따스한 선율에서 프로스페로의 용서와 사랑이 느껴진다. 이제 위대한 마법사의 원통함이 다 풀린 것일까?! 다행히 우리가 탑승한 배는 전복되지 않았지만 육지에 닿을 때까지 한치의 긴장도 늦추면 안된다. 바다 위에는 끊임없는 위험이 도사린다. 폭풍이 연이어 일어날 수도 있고 지금처럼 아폴론의 가호 아래 순풍에 돛을 달고 항해할 수 있다. 이것이 셰익스피어와 차이코프스키가 묘사한 바다의 진풍경이다.
오오, 전원이여, 내 언제 그대를 다시 보리. -베르길리우스-
마침내 아테네와 인근의 숲에 다다랐다. 여러분들은 환상과 동심이 가득한 앙리 루소((1844~1910) 혹은 맥스필드 패리시(1870~1966)의 작품을 떠올려도 좋겠다. 목관악기가 연주하는 네 번째 긴 여운의 꼬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가볍고 부드러운 현악기의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시골에 사는 요정의 섬세한 날개가 나뭇잎에 스치어 바스락거리는 소리일 것이다.
"마치 요정들이 직접 연주를 하는 듯하다." -로베르트 슈만-
성시연씨가 돌변했다.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하다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연미복조차 나이트가운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하긴 한여름밤에 벌어지는 헛소동이니까....중간에 녹턴(야상곡)도 나오잖아?! 10대 때 작곡한 서곡과 이후 덧붙여진 극음악들간에 무려 16년이라는 시간적 공백이 있는데도, 여전히 동심을 잃지 않던 멘델스존처럼 그녀도 소녀가 되었다.
무려 3쌍의 남녀가 나온다. (테세우스 공작과 아마존의 히폴리타 여왕은 거론만 된다.) 이들은 요정들의 왕과 왕비인 오베론과 타이타니아, 라이샌더와 헤르미아, 디미트리어스와 헬레네이다. 나레이터 2명이 아테네 젊은 연인들의 복잡 미묘한 감정선을 목소리로, 발레리노와 발레리나가 몸짓으로 대변했다. 그 결과 멘델스존의 극음악에대한 이해도를 높이긴 했지만, 무대가 좀 산만해서 음악을 진득히 감상하기 어려웠다. 어쨌튼간에 관객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 건 사실이다.
그는 그렇게 찬연히 빛나는 갈색 피부, 빛이 통과할 듯한 섬세한 손가락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만물이 수렴되는 빛의 중심이었다.
-플로베르, 감정교육 중에서-
오오!! 이 사랑의 봄은 어쩌면 변하기 쉬운 햇빛의 반짝임을 닮았는가! 지금 반짝이는 햇빛을 함빡 쬐는가 싶으면, 이윽고 구름은 모든 것을 숨겨간다! -세익스피어-
열 여섯 살의 소녀는 장미 같은 얼굴인데도 연지를 발랐단다. -폴리도리-
당나귀 머리를 쓴 우둔한 보텀과 왕비 타이타니아를 둘러싼 촌극 그리고 오베른 왕의 충복 요정 퍽의 익살도 있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는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다. 사실 나는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는...."모태솔로"여서 이 희가극에 나오는 아테네 젊은이들의 맘을 다 이해 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남의 연애사는 언제나 흥미롭다. 어쩌면 모든 노처녀는 "B사감"인지도 모른다.
이 어쩐 기괴한 광경이냐! 침대 위에는 기숙생에게 온 소위 <러브레터>의 봉투가 너저분하게 흩어졌고 그 알맹이도 여기저기 두서없이 펼쳐진 가운데 B여사 혼자 아무도 없이 제 혼자 일어나 앉았다.
"난 싫어요. 당신 같은 사내는 난 싫어요." 하다가 제물에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러더니 문득 편지 한 장을 (물론 기숙생에게 온 <러브레터>의 하나) 집어 들어 얼굴에 문지르며.....
-현진건, B사감과 러브레터-
드디어 그 유명한 결혼행진곡(축혼행진곡)이 나온다!! 아마도 이 음악이 울려퍼질 땐 그동안 참 고급지게 주무시고 계셨던 어르신들도 눈이 번쩍 떠졌으리라.....그러고보니 10월에는 참 결혼식 초대가 많았다.^^ 여인들은 저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면사포를 쓰던 추억을 떠올릴테지....친정 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가슴 졸이는 가운데 입장하던 결혼식.....오늘밤 테세우스의 궁 연회장에서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물론이려니와 수많은 관객도 합동 결혼을 했다.
다시금 서곡의 서두에서 들리던 목관악기의 여운이 다시금 들린다. 해질녘 시골 여염집에서 저녁밥 지을 때 나는 굴뚝 연기처럼 소박하고 구수한 소리......처음 듣던 목관 소리가 현실에서 몽환 세계로의 초대라면, 후반부에 제차 나온 목관의 울림은 동심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은유하는 듯 했다. 한마디로 동화책 한권을 다 읽은 듯한 느낌.
셰익스피어는 이 극에서 몽환과 현실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으며, 또한 외관(外觀)과 실재(實在)를 대담하게 대조한다. 외관과 실재의 두 요소는 이 극의 내적 본질을 이루고 있다. 외관과 실재는 그의 극에서 교향곡의 주제처럼 상호 작용을 하는데, 높아졌다가 낮아지고, 잠시후 하나로 합쳐지는가 하면 이내 분리되어 음악에서의 대위법(對位法)과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셰익스피어의 솜씨가 한층 성숙해
진 것이다. -셰익스피어 희극선, 혜원출판사 p514-
성시연씨의 선 굵고 열정적이며 절도있는 지휘로 빚어진 음악, 극중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 하나하나 세세히 표현하려는 발레리나와 발레리노, 원작과 음악의 교두보 역할을 한 두명의 나레이터....계절적으로 좀 늦은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들의 노력으로 멘델스존이 17세부터 꿈꾸던 한여름밤의 꿈이 실현되었다.
다만 한가지 아쉽다면 조명이 너무나 촌스러워 요정세계의 환상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다는거?!
벌써 10시였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신선과 요정이 사는 세상에 아주 잠깐 있다 현세로 돌아왔더니 벌써 몇 세기가 흘러가 있더라고....오베른의 시종 퍽에게 홀린 느낌이다.
"혹시 저희네 요정들의 한 짓이 마음에 안 드시거든, 이렇게만 생각해 주세요. 잠시 졸고 계시는 사이에 꿈을 꾸신 거라고요.
그럼 안녕히들 주무십시오."
마지막 퍽의 대사가 귓전에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