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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까운 인간관계가 거의 참기 어려울 정도의 명확성에 의해 지배되면 그 관계의 유지가 힘들어진다.” 이 문장이 내가 발터 벤야민의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문장 중의 하나이다. 이 글의 다음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왜냐하면 한편에서는 삭막할 정도로 돈이 모든 중대 관심사의 가운데에 자리 잡게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깨지는 장벽이 되면서, 자연에서처럼 윤리의 영역에서도 절대적 신뢰, 침착함, 그리고 건강함이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다.” 명확성에 의해 지배되어 윤리의 영역이 건강함을 잃어버리는 세상이란 어떤 세상일까?
요즘 사람들은 무엇이든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물건의 정량보다 덤을 얹어주거나 서로에게 기분 좋은 흥정을 하는 모습이 사라져가고 있고, 시간 관리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전보다 더 정확하게, 정해진대로 시간에 맞추어 살아갈 것을 요구 받고 있다. 인문학과 철학과 같은 학문이 이런 정형화 되어가고 명확성의 지배를 받는 세상과는 동떨어져있다는 이유로 학문의 보고인 대학에서 홀대받는 실정 또한 명확한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인간관계도 명확성이 더해져가는 세상에 따라 변해가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이 만나고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 대해 한 사람 한 사람 특별한 의미를 두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고정적이고 획일화된, 하지만 명확한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하고 그 틀에 맞추어 인간관계를 맺는다. 생각해보면, 정보통신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 간의 교류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이 늘어났으니 모든 사람을 개별화 시켜 생각하는 것이 힘들고, 그래서 각자 기준을 세우게 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같은 틀을 적용하려 하는 데에 있다.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은,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들이대던 잣대를 적용하려하면, 우리는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곳을 잃고 ‘돈’을 중심으로 마치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으레 그러듯이 쉽게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만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절대적 신뢰, 그 사람으로부터 얻는 편안함을 잃어버릴 것이다.
나는 발터벤야민이 이 글을 통해 1930-40년대 가난과 정부 탄압으로 힘겨워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정이 사라지고 점점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인간만 남아가는 현실에 대한 깊은 걱정과 후세인들에 대한 경고를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을 단 하나, 혹은 몇 개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개개인은 그렇게 짧게 표현될 수 있는 단순한 존재 또한 아니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참기 어려울 정도의 명확성’에 지배받기를 강요해서도 안 되며 강요받는다 하여 자신을 객관화 시켜서도 안 된다. 인간관계는 불확실성의 연속이라는 발터벤야민이 전하는 메시지를 곱씹으면서, 오늘날의 인관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 또한 주변사람들과 피상적인 관계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첫댓글 현대사회에서 물질적인 것이 인간관계를 맺는 기준이 된 게 안타깝습니다 사람을 깊이있게 사귀기 힘들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 글을 통해 지금 우리의 인간관계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