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화된 과학의 발달에 힘입은 정보화와 세계화로 대표되는 물질문명, 지적 소산물이라 할 수 있는 글쓰기마저 상업주의의 低急한 흐름 속에서 근본을 잃고 표류하는 혼돈시대, 장밋빛 거품과 물방울에 휩싸여 하루치의 삶을 거듭 소진하는 작금의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이 책은 주제넘게 던진다. 생각하는 삶, 참살이(Well-being)를 추구하는 삶, 만족스런 미래의 행복 비전이 제시되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물음과도 통하는 주제. 이미 누구나 그 답을 알고 있다. 인간을 위한 미래와 창조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지적 사고이며, 이러한 지적 사고의 형성과 발전은 책을 통한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애써 다른 길, 보다 가시적인 성과를 드러내 보이는 손쉬운 길을 찾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喝!
앞서 게으름 둘러대며 정약용 선생의 회초리를 피해볼까도 했지만, 이 책은 여러 권의 양서를 읽을 시간조차 없는 바쁜 현대인을 위한 내용 요약의 해제가 아니다. 현학적인 지식의 도구 또한 아니다. 오히려 原典으로 향하는 이정표의 시작일 뿐이며 보다 많은 시간을 요하는 꼼꼼한 책읽기로의 초대장에 다름 아니다. 특히 번갯불에 콩볶아 먹어야할 대한민국 수험생들에겐 딱 안성맞춤이다.
M.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장면에 나오는 저 유명한 일화는 이 책의 발간 취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우울했던 하루와 내일도 슬플 것이라는 생각에 짓눌린 소설의 주인공은 차와 과자를 먹는다. 마들렌느 과자 부스러기와 차가 입천장을 건드리는 순간 주인공은 전율을 느낀다.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쾌감과 벅찬 기쁨을 맛보는 주인공은 두 모금째 마셨을 때는 최초의 느낌 이상의 것은 없었고, 세 모금째에 이르러서는 차의 효과가 줄어들었음을 느낀다. “그만 마셔야 한다. 내가 구하고 있는 진실은 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차는 진실을 눈뜨게 해주었지만, 차츰 힘을 잃어가면서 계속해서 같은 증언을 되풀이할 뿐이다.”
이렇듯 이 책은 독자에게 쾌감과 전율 속에 참된 나를 만나는 아주 특별한 한 순간을 맞닥뜨리게 하는 매개물인 것이다. 한 편의 영화, 아련한 선율, 은은한 향기 등을 통해,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과거의 소중한 기억들을 찾는 그 행복한 순간의 재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이 책의 역할이며, 지적사고와 인간 의지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아득히 깊은 미지의 곳에 잠겨 있다가 마침내 우리의 뚜렷한 의식의 층위로 도달하는 아련한 기억의 소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이 책이 가진 유일한 기능이라면 기능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33편의 고전 명저들을 선별한 이 책은 수많은 보고를 간직한 기억의 양피지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대학 프레시맨 시절 구내서점에서였다. 맑스와 레닌, 엥겔스의 과격한 이빨에 얽매이지 않아야 된다는, 시대적 당위성의 뒷켠에서 ‘마음의 양식’을 위한 잇속 밝은 계산이었다고 하면 우스울까. 霧林이 스러져간 자리에 學林이 깃발을 싹틔우던 시절이었으니. 책의 초판 텍스트는 1975년에 출간되었던 『교양명저 60선-논저편』이다. 10여년 전, ‘대학생=교양인’이던 청년들의 옆구리를 꿰어차고 다니다가, 2000년 『기억의 양피지』로 수정·보완·분권하여 거듭났다. 25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속에 다소간 낯설고
어색해진 표현들을 가능한 한 오늘의 독자에게 맞게 고치려고 노력하였고, 변화된 내용들을 수정하였다. 원저자들의 의도와 표현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비한 점은, 原書가 아닌 다음에야 내재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미비함 역시 독자에게 이차적인 독서와 원전으로의 穿鑿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소기의 목표에 부응하는 방법이 될 것이라 본다.
‘양피지에 기록된 시간’은 제 스스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능동적인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찾기 전에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그저 바라봐주기만을 원하는 수동적인 것이다. 분명, 우리가 보내는 일상적인 삶의 나날들 속에 존재하지만, 애타게 소망하고 갈구하는 이들에게만 스쳐 지나가는 ‘양피지에 기록된 시간’은 우리가 늘상 발딪고 서있으면서도 다다를 수 없는, 저 멀리 자리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마법을 구사하고 있다. ‘양피지에 기록된 시간’에 부여된 생명의 불길은 기억하지 못하는 먼 옛날 바로 우리들이 품은 잉걸이며, 죽음의 손길 역시 우리의 손안에 들어있다. 손바닥을 펼쳐 보라. 아무것도 없다? 벌써 마음으로 깃든 까닭이니라.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느껴라. 방법은? 그래, 죽자살자 선인들의 말씀을 되새겨 좇아라. 다시 손을 보라. 손바닥에 무엇이 놓였느냐? 지식의 굶주림에 사로잡힌 이들의, 또 갈망의 목마름에 신음하는 이들의 희구의 염원을 통해 인류의 생명력은 이어진다. 그게 역사고, 미래의 현존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책이 읽히지도 않은 채 이름 없이 흙으로 썩어갈 때”가 오면, 양피지는 스스로의 효용을 잃어버린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누구도 “더 이상 이 페이지들을 가슴에 꼭 끌어안지 않을 때” 양피지는 잃어버린 환상이 되고 만다. ‘기억의 양피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애원한다. “해묵은 먼지들로부터 이 작은 책을 들어올려, 다 해진 페이지들을 넘기고, 나를 읽어다오, 나를 죽지 않게 해다오!” 이러한 의미에서, 33편의 고전 명저들을 선별한 이 책은 수많은 보고를 간직한 『기억의 양피지』가 되는 것이다. 앞서 게으름 둘러대며 정약용 선생의 회초리를 피해볼까도 했지만, 이 책은 여러 권의 양서를 읽을 시간조차 없는 바쁜 현대인을 위한 내용 요약의 해제가 아니다. 현학적인 지식의 도구 또한 아니다. 오히려 原典으로 향하는 이정표의 시작일 뿐이며 보다 많은 시간을 요하는 꼼꼼한 책읽기로의 초대장에 다름 아니다. 특히 번갯불에 콩볶아 먹어야할 대한민국 수험생들에겐 딱 안성맞춤이다. 두 권의 갈피에 실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참고하여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