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정치권에 진출한 386 세대가 많다. 386 세대가 있을 리가 없는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에서는 걸핏하면 386 세대에 대하여 시비를 건다. 그러나 사실 386 세대 중에 정치권에 들어 가서 소위 '빛을 본 사람'은 이 땅의 무수한 연예계 지망 청소년들 중에서 걸그룹이 된 숫자 보다 적을 것이다. 절대 다수는 그야말로 "사랑도 명에도 이름도 남김 없이"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386세대가 아니고 컴퓨터 이전 세대이다. 실제로 내가 컴퓨터를 접한 것은 40대에 들어서였다. 내가 빈민운동을 하는 동안 나는 신앙으로 일을 했지만 실제로 나를 도와서 놀이방, 지역도서관. 청년회 등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던 이들은 모두 대학생들이었다. 서울 교대, 인천 교대, 연세대, 이대 학생들이 와서 한 부분씩 맡아서 활동을 했다.
하안동에서 수해를 만나고 복구작업을 할 때 중앙대학교 미술학과에 다니던 정승각이라는 학생이 찾아왔다. 아이들을 모아서 수해를 당했던 경험을 벽화로 그려 보겠다고 해서 재미있을 것 같아서 모아 주었다. 정승각은 벽화의 재료를 준비해 가지고 와서 아이들과 함께 이틀 동안 벽화를 그렸다.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방송국에 알렸더니 KBS, MBC TV가 동시에 와서 취재를 했다. 그런데 MBC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철거민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위해서 '도시빈민'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쓰니까 PD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목사님 심정은 잘 알겠는데요. 목사님이 그 단어를 써도 1초 만에 지나가서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제발 쉽게 갑시다"라고 사정을 했다. 인터뷰는 하는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었다. 결국 방송은 철거민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해복구 현장에서의 미담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전에도 있었다. 83년도 전두환이 사회정화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열심히 사회를 정화조로 만들고 있을 때 강원도 양구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던 나는 당연직 정화위원이었다.
한 번은 중앙에서 정화위원회 간부가 순시차 내려온다고 와서 긴장을 해서 난리가 났다. 대변인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지방 유지들을 모아놓고 간담회를 열었지만 유지들이 얼어서 아무 말을 안 하기에 내가 이야기를 했다.
"대변인이라니까 이야기한다. '땡전 뉴스'라는 말 들어보았느냐? 뉴스 시간이 되면 일제히 '땡! 전두환 대통령은……. '으로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제발 그런 유치한 짓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대변인은 물론 들어 보았겠지만 내가 구태여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시골에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막상 이야기를 듣는 대변인은 세련되게 넘어갔지만 순간에 보안대장, 경찰서장, 군수 등의 인상이 말이 아니었다.
그 해 여름 방학 때 해마다 내가 돕고 있던 베데스다 선교회에서 여름 방학 때 장애인들을 100여 명을 데려다가 캠프를 했다. 당시에는 장애자들이 밖에 나돌아 다니기도 어렵지만 캠프를 하는 일은 더욱이 어려운 일이었다. 장애인이 100명이면 봉사자 숫자는 그보다 많아야 하는 대규모 캠프로 선교회의 일 년 사업에서 가장 큰 행사이었다.
요즘처럼 차가 흔하지 않을 때라서 교회의 봉고차를 가지고 청년들을 데리고 가서 한 주간 동안 봉사를 하러 가게 되었다. 캠프 전날 문득 이럴 때 대변인을 한 번 써먹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걸어서 나를 기억 하는지 물었다. 대변인은 "아! 내가 까칠한 목사님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내 용건은 우리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데 TV에 좀 내보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내 요청에 대변인은 두 말도 하지 않고 "조처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다음날 12시 쯤 캠프장에 도착하니까 MBC 방송 차량이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데없는 방송중계차의 출현으로 모두들 어리둥절했었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방송국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내가 도착하니까 그들이 나에게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무엇을 하러 오는지도 모르고 이 많은 장비를 끌고 왔단 말이요?" 하니까 PD의 말이 아침에 출근하니까 책상 위에 '양평군 개군면 초등학교로 10까지 출동'이라는 지시사항이 있어서 왔단다. 지금은 감히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때는 그랬다.
그런데 막상 방송에서는 선교회의 활동이 아니라 '무더위에 장애인들도 이렇게 즐겁게 논다'는 미담으로 방영이 되었다. 그래서 방송이 나가고 난 다음에 함께 참여했던 자원봉사 대학생들에게 왜. 방송을 불러들였느냐고 비판만 받았었다.
이번에도 역시 방송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때 만난 PD와의 인연은 이어졌다. 그 후 어느 날 PD로부터 연락이 와서. MBC 홍보용 잡지에 시청자가 제작 현장을 보고서 기사를 쓰는 꼭지가 있는데 써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맡게 된 프로는 황인용이 MC를 하고 가수 이남이가 고정 출연하는 '세상사는 이야기'였다. 그 프로에서 이남이는 밴드와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날 몇 시간 동안 녹화를 하는데 막간을 이용해서 이남이와 대화를 하다 보니 나와 동갑이고 동대문상고 출신으로 응원 단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모교도 야구를 잘하는 학교여서 역시 야구의 명문인 동대문상고와 여러 차례 경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응원단장이었던 나와 이남이와 반대편 스탠드에서 응원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남이는 내 이야기를 듣고 빈민운동에 대하여 대단히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도 돕고 싶다며 필요할 때 언제든지 자기를 꼭 불러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남이를 꼭 한 번 써먹어야지'하고 벼르기만 했지, 그를 초청할 만한 규모와 성격이 어울리는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386 시대의 젊은이들과 함께 했던 8, 90년대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산다. 386 세대는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길바닥에서 약자의 생존권을 위해서 투쟁하며 땀을 흘렸던 大我的 경험을 가진 세대이었다. 즉 젊은 혈기에 욱하는 심정으로 진보, 개혁, 민주를 부르짖으며 잠깐 ‘데모’를 했던 것이 아니라, 大我的 시각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해 시대의 어둠과 장기간 조직적으로 싸웠다.
생각해 보라! 우리 역사에서 언제 젊은이들이 자기를 희생하고 대의를 위해서 집단적으로 투신했던 시대가 있었던가? 종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386세대가 활동했던 그 시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거룩한 시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386세대는 대학생이라는 기득권의 버리는 일부터 해야 했다. 기득권을 버리는 것!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다. 기득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철거현장에서 극적으로 나타난다. 재개발이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 가옥주와 세입자에 갈등이 벌어졌다. 사연은 이렇다. 불럭으로 지은 허술한 집 한 채를 가진 가옥주가 있다고 하자. 가옥주는 건축비 20~30만 원을 들여서 남의 땅에 무허가로 집 한 채를 짓는다. 가옥주가 살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쩌다가 이사를 가게 되면 보증금 20만 원에 월세 5만 원에 세를 놓고 나간다. 그렇게 해서 월세를 사는 사람은 10년이면 6백만 원의 월세를 주인에게 내게 된다.
결국 세입자는 무려 집값의 30배의 값을 내는 셈이지만 재개발이 되면 가옥주는 아파트 분양 입주권을 받게 되고 세입자는 임대 아파트 입주권을 받게 된다. 세입자는 애초에 가옥주가 투자한 돈의 수십 배를 내고 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사유재산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남의 땅에 무허가 주택이라도 가진 사람과 가질 기회를 놓친 사람의 차이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먼저 들어와 무허가 집을 지은 사람에게 기득권이 있기 때문이다. 재개발이 되면 가옥주는 집을 철거해야 하는데 세입자는 가능한한 집을 비워주지 않고 버티게 된다.
이런 세입자들을 보고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 '그것 순 떼쓰기 작전이구먼'하고 생각을 할는지 모르지만 재개발을 하면 막대한 이익이 생긴다. 재개발이 되는 땅은 파면 자원이 나오는 광산이 아니다. 사람이 이제까지 그 지역에서 살아옴으로 해서 어떤 형태로든 그 지역의 발전에 기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도 마땅히 개발이익을 나눠야 옳은 것이다. 철거투쟁의 원칙은 땅이란 기득권뿐 아니라 그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도 기득권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에 그렇게 되지 못하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점점 더 심해지고 말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은 도시빈민들에게 이런 사실을 깨닫게 하고 주민들을 조직하고 훈련해서 단결된 힘으로 싸워서 권리를 찾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돈 안 받고 기술자문을 해주는데도 장애가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며 우왕좌왕하고 갈피를 못 잡으면서도, 평소에 '외부세력' 과는 손을 잡으면 안 된다고 교육을 워낙 잘 받아서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외부세력은 곧 불순세력이라는 식의 공식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개입하면 당국에게 나쁘게 보여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이 깔려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진정으로 자기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된다.
대개의 겨우 세입자들이 실제로 싸워야 할 대상은 가옥주가 아니라 개발의 주체인 주택공사이었다.
한 번은 주민들이 주택공사 사업단에 몰려갈 일이 생겼다. 주민들이 가기 전에 사업단장과 협의를 하기 위해서 내가 먼저 가서 갔다. 그 자리에서 단장은 "목사님! 사실은 제가 요즘 너무 골치가 아파서 부부생활도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뒤이어 주민들이 몰려와서 성질 사납기로 유명한 아줌마가 단장을 보고서 삿대질을 하면서 "야! 이 씹할 놈아!"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주민들을 진정 시킨 다음 "방금 아무개 아줌마가 단장님에게 하신 말씀은 욕이 아니라 격려입니다. 사실은 조금 전에 단장님께서 요즘 여러분들 때문에 신경을 쓰시느라고 그것도 못하신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농성장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어 버렸다.
하안동 시절 처음으로 광명 경찰서에 불려가서 '존안자료'라는 것을 작성했다. 잡범이나 형사범이 아닌 경찰의 관심을 가질 인물이 처음 불려 가면 무조건 '존안자료'라는 것을 작성해야만 했다. 존안자료에는 대상자의 모든 것이 시시콜콜한 것까지 기록되어 있다. 나도 이제 드디어 정식으로 경찰이 관심을 가지고 보호(?)와 감시를 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 많이 출세를 한 것이다.
386 세대의 특징은 당시 유행하던 사회과학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학생들과 함께 활동을 하기 전에 이미 사회과학을 접하고 있었다. 1983년도 강원도 양구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지방에서는 웬만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 당연직으로 사회정화위원회 위원, 경목 등을 해야 했다. 그래서 나도 당연직 경목이었고 새로 서장이 오면 인사를 하고 지내야 했다. 제법 먹물이 든 이가 치안본부에서 한미한 양구군의 경찰서장으로 와서 나와 몇 번 이야기를 해보더니 내게 직원교육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때는 수시로 양구 경찰도 데모를 진압하러 서울로 출동을 하던 때였다. 그래서 내가 데모를 막더라도 학생들이 왜 데모를 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면서 당시 대학생들 사회에서 유명한 사회과학이론인 종속이론을 소개했다. 아마 전두환의 철권통치 시절에 경찰서에서 운동권 이론을 강의한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것이다.
강의가 끝난 후 질문 있으면 해 보라고 하니까 한 나이 많은 형사가 “그거 순 공산주의군.”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요? 김일성 입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자생적 공산주의가 생기게 된 배경은 바로 군사정권 때문이고 그래서 여러분이 고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80년대 전두환의 폭압적인 통치가 소위 자생적 공산주의인 NL파를 양산했듯이, 오늘날은 한국교회의 병리 현상이 안티 기독교 범람현상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