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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뎀 나무 아래의 축복
본문: 왕상 19:1-8
왕상 19:1-8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行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先知者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告하니 2 이세벨이 使者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來日 이맘때에는 丁寧 네 生命으로 저 사람들 中 한 사람의 生命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神들이 내게 罰위에 罰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저가 이 形便을 보고 일어나 그 生命을 爲하여 逃亡하여 유다에 屬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自己의 使喚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4 스스로 曠野로 들어가 하룻길쯤 行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求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只今 내 生命을 取하옵소서 나는 내 列祖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天使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甁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使者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植物의 힘을 依支하여 四十晝 四十夜를 行하여 하나님의 山 호렙에 이르니라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 850명과 싸워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바알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로 데리고 가서 칼로 목을 베고 진멸시켰습니다. 이 때 북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입니다. 또 그 부인이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이 이 소식을 듣고 사자를 엘리야 선지자에게 보냈습니다.
‘네가 거짓 선지자들을 죽여?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바알 선지자들을 죽여?
내일 이맘 때 저 사람들이 죽은 것처럼 네 목숨을 내가 뺏아가겠다’
고 왕상 19:2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 라”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엘리야 선지자는 자신이 활동하고 있던 북 이스라엘을 떠나서 남 유다로 이동합니다. 남 유다의 제일 남쪽 경계가 브엘세바입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가 남 유다도 불안하니까 남 유다의 제일 끄트머리 브엘세바로 도망간 것입니다. 당시 엘리야 선지자가 이스르엘이라는 장소에 있었는데, 거기서 브엘세바까지는 약 142킬로미터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142킬로미터를 내리 도망간 겁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는 브엘세바에 자기 사환을 남기고 자기 혼자 하룻길을 걸어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광야는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고 밤에는 무서운 추위가 엄습하는 곳입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잠이 들었습니다.
왕상 19:4을 보면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내가 내 열조보다 못하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하반절을 아주 실감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오 여호와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엘리야 선지자가 얼마나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850명 거짓 선지자와 싸워 승리할 때는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자기를 죽인다고 하니까 자기가 생각했던 종교개혁이 다 이루어지지 않고 나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하는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로뎀 나무 아래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엘리야 선지자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엘리야 선지자를 다시 축복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참 살기 힘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장사도 안 되고 사업도 안 되고 수중에 돈도 없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 로뎀 나무 아래에서 엘리야 선지자를 축복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과 사업도 축복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1.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와 주시는 축복입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잠들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왕상 19:5에 그 천사가 엘리야 선지자를 어루만지고 일어나서 먹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천사를 가리켜 왕상 19:7에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아무리 깊은 좌절 가운데 빠져도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가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 있지만 하나님은 찾아와주십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브엘세바에서 하룻길을 걸어왔습니다. 하룻길은 약 25km입니다. 광야를 25km를 걸어간 겁니다. 광야는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작렬 하고 밤에는 살을 에는 추위가 엄습합니다. 그곳을 혼자 25km를 걸어간 겁니다. 왕상 19:4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상 19:4 스스로 曠野로 들어가 하룻길쯤 行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求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只今 내 生命을 取하옵소서 나는 내 列祖보다 낫지 못하니이 다' 하고
지금 엘리야 선지자는 광야 깊은 곳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엘리야 선지자의 좌절과 절망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알려주는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 깊은 곳에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버림받았다, 나 같은 것은 못난 놈, 이 못난 놈은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도 바로 그 장소에 하나님은 찾아와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시 139:8을 보면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내가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부는 지옥입니다. 지옥에 자리를 폈다, 완전히 지옥에 들어갈 정도로 삶이 죽음 직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시 139:9-10에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 계시며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엘리야 선지자처럼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 있지만 바로 그 자리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줄 믿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찾아왔습니다. 어루만져 주시며 일어나서 먹으라고 너무 친근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왕상 19:5을 보면 천사가 어루만지며, 왕상 19:7에도 또다시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어루만지며 두 번이나 어루만져주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이 와서 등을 툭툭 두드리면서 ‘이 사람아 힘내’ 한 마디 해보세요. 얼마나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됩니까?
오늘 살아계신 아버지께 찾아와주셔서 어루만져 주시고 힘내라고 말씀해주실 줄 믿습니다.
사람의 어루만짐과 하나님의 어루만짐은 천지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시면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 임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 입에 하나님의 손을 대셨습니다. 렘 1:9을 보면 그 순간에 하나님 말씀이 예레미야 입에 들어오는 겁니다.
렘 1: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또한 단 8:18에 다니엘 선지자가 엎드려서 깊은 잠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시니까 다니엘 선지자가 힘이 나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어 깊이 잠들매 그가 나를 어루만져서 일으켜 세우 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시기만 하면 완전히 엎드러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엘리야 선지자를 어루만져 주시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어루만져 주시고 다니엘 선지자를 어루만져 주신 것처럼 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나를 이 절망 속에서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찾아와주셔서 여러분을 어루만져 주시고 여러분의 자녀와 사업과 장사하는 것을 어루만져 주셔서 다시 한 번 벌떡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말씀을 주시고 먹고 마시게 해주시는 축복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어루만진 다음 무엇을 했습니까?
1) ‘일어나서 먹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말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왕상 19:5에 일어나서 먹으라고 말씀을 주시고, 이 말씀을 듣고 보니까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었습니다. 이 떡과 물을 마시고 엘리야 선지자는 다시 누웠습니다. 얼마나 지치고 피곤하면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마시고 또 쓰러졌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또 어루만져 주시고 깨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마디 말씀을 더 추가했습니다. 왕상 19:7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는 표현이 추가된 겁니다. 히브리 원문을 보면 왜냐하면 그 길이 너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직 엘리야에게는 사명의 길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네 길이 현재 너보다 더 크다고 말씀한 겁니다.
왕상 19:4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죽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나를 데려가십시오, 열조보다 못한 놈 내가 살아서 뭐합니까?’
하나님께 말씀드릴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아직 죽을 때가 아니야, 네 길이 남아 있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직 사명의 길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우리와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교회는 사명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변화의 길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왕하 2:11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를 불수레 불말과 함께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죽여 달라고, 나 그냥 여기서 죽어야겠다고 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래서 천사를 두 번씩이나 보내 깨워준 겁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명의 길을 감당하도록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명만 주실뿐만 아니라 그 사명을 감당하는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너를 보니까 현재 네 믿음과 체력과 형편은 네가 가야할 길과 비교가 안 된다, 네가 가야할 길이 더 커, 그러니 내가 주는 것을 먹어야 네 길을 갈 수 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신비한 음식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은 사명만 주실뿐만 아니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까지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좌절과 깊은 절망에 빠진 엘리야 선지자에게 새로운 힘과 능력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런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왕상 19:6을 보면 숯불에 구운 떡, 한 병 물을 먹고 마셨습니다.
19:8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두 번째로 먹고 마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를 볼 때도 두 번째도 하나님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 주실 먹을 것, 두 번째 주신 양식은 첫 번째 주신 것과 다른 겁니다.
두 번째 주신 먹을 양식은 신기한 양식이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두 번째 양식을 먹고 40일 40주야를 다른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넉넉히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신비한 양식입니까?
왕상 19:8에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식물의 원문은 ‘바로 그 식물’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떡이 아니라 두 번째 양식을 가리키는 겁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하 아킬라 하히, 가 ‘그 식물’입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양식을 가리킵니다. 두 번째 주신 양식을 먹고 40 주야를 걸어간 것입니다.
신약 시대 사도 요한은 처음에 하나님 말씀을 먹고 대언했습니다. 이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은 다시 작은 책을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계 10:10을 보면 이 작은 책을 먹었는데 입에는 달고 배에서 쓴 신비한 양식이었습니다. 게 10:11에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작은 책의 말씀을 다시 먹고 다시 예언한 겁니다.
사도 요한은 작은 책의 말씀을 먹고 다시 예언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한 번 먹고 두 번째 특별한 양식을 먹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40일 동안 걸어서 도착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특별한 양식을 먹기만 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살아간다할지라도 넉넉히 도착할 줄 믿습니다.
이 식물은 놀라운 힘을 공급합니다.
이 특별한 양식,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요 6:50에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6:51에는 더 자세하게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떡만 먹기만 하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40일을 걸어갔습니다.
40일이라는 숫자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4는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을 가리키는 땅의 숫자입니다. 10은 충만한 숫자입니다. 1-10까지 하고 다시 1로 넘어갑니다. 4×10=40입니다. 이것은 이 땅의 전체 인생살이가 고난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땅의 삶이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그 식물, 하나님이 주신 식물을 먹으면 다른 것을 안 먹어도 넉넉히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엘리야에게 주신 것처럼 바로 그 식물, 특별한 양식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양식을 먹으면 아무 것도 안 먹고 엘리야 선지가 호렙산까지 도착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작은 책의 말씀을 먹고 승리하였듯이 엘리야 선지자가 두 번째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40일 동안 승리하였듯이 우리도 마지막 때 주신 하나님의 식물을 먹고 남은 생애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적으로,
끝까지 인도하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브엘세바 광야에서 호렙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브엘세바에서 호렙산까지는 자그마치 350Km가 넘는 머나먼 길입니다. 당시에 비행기가 있습니까, 자동차가 있습니까? 걸어서 350Km, 길도 없는 광야를 지나 시내산까지 간다는 것은 엄청난 고난의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호렙산까지 인도하시고 애굽에 종살이하던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까지 인도했습니다. 시내산이 곧 호렙산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 예수님께서 변화하실 때 모세도 나타나고 엘리야도 나타났다고 나옵니다.
우리도 마지막 때 시온산에 서야 합니다.
계 14:1에 “어린양과 함께 14만 4천이 시온산에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온산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시 23:1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23:3에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시 23:3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기만 하면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시 107:30에는 “소원의 항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각자 소원이 있는데 그 소원의 항구로 끝까지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슨 걱정 근심 염려가 필요합니까? 다 맡기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시면, 반드시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온산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엘리야 선지자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로뎀나무에서 ‘로뎀’은 히브리어로 ‘로템’인데, ‘묶다’는 뜻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으려고 했지만 나에게 새로운 사명의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로뎀 나무 아래에서 모든 절망과 좌절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과 믿음으로 묶여졌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식물, 특별한 양식을 먹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에 묶여 있습니까?
돈에 묶여 지내고, 다른 사람을 짓밟아서라도 높은 곳에 올라가겠다는 명예와 권력욕에 묶여 있고,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세상을 즐기면서 살 것인가 세상 쾌락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엘리야 선지자가 다 내려놓고 다시 하나님 말씀에 묶인 것처럼 오늘도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 말씀에 묶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묶여서 바로 그 식물, 특별한 양식을 날마다 먹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산 호렙에 한 분도 낙오되지 않고 도착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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