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忠武公 李舜臣)
출생과 어린 시절
이순신 (李舜臣 .. 1545~1598) ... 본관은 덕수(德水), 字는 여해(汝諧)이다. 아버지는 이정(李貞),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1545년 한양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양반가문이었으나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이 기묘사화의 참변을 겪은 뒤 아버지 이정(李貞)은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이순신은 적자(嫡子)로 회, 열, 면 등 세 아들을 두었고, 서자(庶子)로 훈(薰), 신(藎) 그리고 2명의 딸을 두었다. 첫아들 회는 노량해전에 참전하였고, 둘째 열은 정랑(正郞)이었으며, 셋째 아들 면은 왜적과 싸우다 戰死하였다.
이순신 兄弟의 이름에 나타난...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李貞)은 지방의 미관말직도 맡아 보지 못한 몰락한 양반이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참으로 원대하였다. 그 꿈은 네 아들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희신(李羲臣)으로, 고대중국의 理想的 人物인 복희씨(伏羲氏)에서 따왔다. 복희씨는 陰陽의 변화에 따른 팔괘(八卦)를 만들어 주역(周易)의 근거가 되었던 인물이다. 둘째 아들의 이름은 이요신(李堯臣)이고, 셋째 아들이 이순신(李舜臣)이다. 물론 요순시대(堯舜時代)를 만드는데 一助하는 신하(臣)가 되라는 아버지 이정(李貞)의 꿈과 기대를 읽을 수 있다.
막내아들의 이름은 당연히 이우신(李禹臣)이 된다. 우왕(禹王)에서 따왔다. 禹王은 治山治水에 노력하고, 근검절약으로 유명한 고대 중국의 왕이다. 13년간 치산치수에 힘을 쓰면서 자기 집에도 들리지 않은 일화가 전해지는 존경받는 왕이었다.
이순신 과거 급제 통지서
임진왜란 以前의 이순신
과거 급제
이순신은 대대로 文臣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세에 처음으로 무과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이 때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여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낙방하였다.
그 4년 후, 1576년 32살의 나이에 비로소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섰고, 1579년에는 해미에서 근무하였다. 그 뒤 북방의 국경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8년에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
첫번째 백의종군
1587년 당시 조산만호(造山萬戶)이던 이순신은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兵力의 증가를 요청했으나, 절도사 이일(李鎰)은 그 요청을 거부하였다. 결국 그 해 가을에 女眞族이 침입하여 많은 양민이 학살되었으나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맞서 싸워 포로 60여명을 포획하였으나, 兵營은 와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순신은 패배하였다는 罰을 받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이 때 이순신은 혼자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여진족을 무찔렀고 당시 이순신의 상관이었던 이일(李鎰)은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갔는데, 뒷날 이일(李鎰)은 자신의 책임을 이순신에게 뒤집어 씌우고 벌을 피하였다. 이 때문에 군관들은 이일을 전부 싫어하였고, 이순신은 여진족의 족장 "우을내기"를 꾀어내어 사로 잡았다. 이로써 이순신은 죄를 사면받았고, 이로부터 유명해졌다.
유성룡의 추천
그 후 전라도 감사 이광(李珖)에게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長), 선전관(宣戰官) 등이 되고, 1589년에는 이산해 등의 추천 그리고 宣祖의 지시가 있었으나, 그해 12월 유성룡의 천거에 의하여 이순신은 井邑 縣監이 된다. 관직에 오른지 14년만이었다. 이순신은 고을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에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하였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 종6품에서 종3품으로 10단계 이상 올릴 수 없다는...)이유로 보류되었다.
1591년 宣祖는 이억기, 이순신 등을 남쪽 요충지로 보내면서 공을 세우라는 전교를 내리고, 대신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하여 벼슬의 각 단계마다 차례차례 동시에 임명하는 방법으로 승진시키면서 그해 2월에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임명하면서, 이순신이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켜고, 이순신은 실제 거기서 근무하였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드디어 1591년 47세의 나이에 정3품 당상인 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 등 많은 신하가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신임하였다. 이때까지는..........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전쟁에 대비하여 휘하의 각 부대를 시찰하고, 군대를 재정비하였으며,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의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령에 이순신은 "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은 40척의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1592년 음력 4월13일 왜군은 15만명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다.
이순신은 남긴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그의 풍모를 짐작할 수가 없다. 유성룡(柳成龍)은 그의 저서 징비록(懲備錄)에서 " 舜臣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 "고 하여 그의 인품과 용모를 전하고 있다.
한편 이순신의 진(陳)에 잠깐 머물렀던 고상안(高尙顔 .. 당시 삼가현감)은 그의 文集에서 " 그의 언론과 지혜로움에 탄복하면서도, 그의 용모에 대하여 복을 갖추지 못한 장수 (非福將也)로 표현하고 있어 흥미롭다.
임진왜란
이순신과 유성룡
임진왜란 당시 全羅左水使 이순신이 없었다면 나라의 보존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발발 당시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이순신이 1572년(宣祖 5)에 丙科로 겨우 과거에 급제하여 從9品이 된 이순신의 출발은 매우 늦었다.
게다가 白湖 윤휴가 그의 저서 "統制使 李忠武公 遺事"에서 ... 순신은 본디 성품이 고상하여 귀족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 라고 적은 대로 아부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이러한 성격과 품성으로 전라좌수사가 되기 전, 이순신은 파직과 좌천, 백의종군을 거듭한다.
이러한 이순신의 품성을 알고 그가 형산(荊山)의 박옥(璞玉 .. 원석)임을 알아본 인물이 서애 유성룡(西涯 柳成龍)이었다. 잠곡 김육(潛谷 金堉)은 이순신의 신도비에서 "유성룡은 이순신과 젊어서부터 좋아하던 사이로서 매번 대장감이라고 칭찬하였다 "고 말했다.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 조정에서 이순신을 추천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武科에 오른지 10여년이 되도록 벼슬이 승진되지 않았다"라며 안타까워 하였다. 유성룡은 당시 이조판서에 있던 이율곡(李珥)에게 이순신을 추천하여, 율곡으로부터 이순신을 만나 보자는 언질을 받는데는 성공했지만...
이순신은 " 율곡은 나와 같은 문중(門中 .. 德水 李氏)인데, 인사권을 갖고 있으니 만나서는 안된다 " 라고 하며 거절하였다. 하지만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 내가 순신을 추천하여 차례를 뛰어넘어 수사(水使..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갑작스레 승진된 것으로 의심하였다 "라고 쓴 대로 유성룡이 아니었다면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없었다. 이 때가 임진왜란 1년 전, 왜적의 동병(動兵) 소식에 유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한 것이다.
한서 무제본기(武帝本紀)의 " 賢者를 추천하는 자는 높은 상을 받고 숨긴 자는 사형을 받는다"는 기록은 인재 추천의 어려움과 중요함을 말해 준다. 또한 송나라 시대에는 잘못 천거한 자도 함께 벌을 받는 거주연좌(擧主連坐)의 제도도 있었다. 이순신의 사생관(死生觀)과 유성룡의 인재등용관(人材登龍觀)이 절실한 시절이다.
거북선의 기원
귀선(龜船)이라고도 한다.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조선 초기의 "태종실록"에 처음 나온다. 1413년(태종 13)에 "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귀선(龜船)과 왜선(倭船)으로 꾸민 배가 海戰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 "라는 기록이 있고, 1415년에는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龜船의 戰法은 많은 敵과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決勝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더욱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 "고 상소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돌격선을 특수하게 제작한 장갑선(裝甲船)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거북선의 기원을 왜구의 침해가 가장 심하였던 고려말기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와 같이 거북선은 고려말 또는 조선초기에 이미 제조,사용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순신에 의하여 창제된 철갑선(鐵甲船)으로서의 거북선이 실용화되었다.
이순신의 거북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인 1591년 2월13일, 전라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된 李舜臣은 왜구의 침략을 미리 염려하여 전쟁준비를 급속히 강화하는 한편 특수 전함인 거북선의 건조에 착수하였다. 이에는 조선기술(造船技術)이 뛰어난 軍官 나대용(羅大用)의 도움이 매우 컸다. 이순신 거북선의 구조 및 제도에 관한 기술적 자료는 보전,전승되지 않고, 이순신이 6월14일에 써 올린 " 당포파왜병장 (唐浦破倭兵壯) "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臣이 일찍부터 섬 오랑케가 침략할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귀선을 만들었습니다 (別制龜船). 앞에 龍頭를 설치하여 아가리로 대포를 쏘개 하고, 등에는 쇠꼬챙이를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가 없게 해서, 비록 敵船 수 백척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으로 돌입하여 대포를 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번 싸움에 돌격장(突擊將)으로 하여금 이 龜船을 타고 적선 속으로 먼저 달려 들어가 천자포(天字砲), 지자포(地字砲), 현자포(玄字砲), 황자포(黃字砲) 등의 각종 총통(銃筒)을 쏘게한즉, 산 위와 언덕 아래와 배를 지키는 세 곳의 왜적 또한 비오듯이 철환을 함부로 쏘아....라는 구절로 거북선을 설명하고 있다.
" 忠 武 公 全 書 "에 실린 거북선
한편 이분(李芬)의 행록(行錄)이라는 책 속에는 그 모습을 후세에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이 있다. 그 내용은 .. " 그리고 또 전선을 창작하니 (創作戰船), 크기는 판옥선과 같은데 (大如板屋),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十字)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칼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 붙일 곳이 없도록 하였으며,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입(口)은 총혈(銃穴)이 되게 하고, 뒤에는 거북꼬리처럼 되었는데 그 밑에도 총혈(銃穴)이 있으며, 좌우에 각각 6개의 총혈이 있다.
대개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 이름을 귀선(龜選)이라고 하였다. 뒷 날 싸울 때에는 거적으로 송곳 위를 덮고 선봉이 되어 나갔는데, 적이 배에 올라와 덤벼 들다가는 칼송곳 끝에 찔려 죽고, 또 적선이 포위하려 하면 좌우 앞뒤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 들어도 이 배는 그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어 가는 곳마다 쓰러지지 않는 자가 없기 때문에 전후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 것으로 항상 승리를 거두었다 " ........
뉴욕에서 발견된 거북선 그림 (2005)
가로 140cm, 세로 239cm의 크기로 2장의 비단천에 그려진 이 그림에는 거북선 위에서 회의 중인장수들과 소형 선박에서 무기를 점검하는 병사들.. 그리고 물건을 나르는 민간인들이 그려져 있다. 특히 이 거북선은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2층의 거북선이 아니라 3층의 구조이다. 그리고 왼쪽 하단에는 해독이 불가능하지만 거북선의 제원(諸元)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 그림은 탄소동위원소 방식을 연대를 추정한 결과 1640년대에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고.. 평양숭실학교 교장이었던 미국인 선교사 데이비드의 손자며느리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그림은 1867년 일본 니가타의 나가오카성벽을 허물 때 발견된 그림이다.
보물 제326호로 지정된 이순신의 허리띠이다. 금속테두리로 두르고 그 안에 구름과 호랑이를 조각한 사각형모양의 장식과 금속으로 만든 꽃무늬의 장식들이 달려있다. 이 허리띠는 明나라의 장수 왕원주(王元周)가 이순신의 용맹과 숭고한 인품을 존경하며 이순신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순신이 직접 사용하던 盞과 잔받침으로 역시 明나라 장수가 선물한 것이다.
난중일기 亂中日記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순신장군의 임진왜란이 일어난 7년 동안의 일기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1592년 5월1일부터 戰死하기 한달 전인 1598년 10월7일까지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니므로 본래는 이름이 없었으나, 1795년(정조 19)에 "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할 때 "난중일기(亂中日記)"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지금까지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친필 초고(草稿)와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일기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많은데.. 이 것은 초고를 정자로 베껴 판각할 때에 글의 내용을 많이 생략하였기 때문이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실려 있으나 초고에는 없는 부분도 있다
親 筆 草 稿
따라서 난중일기의 전모를 알기 위하여는 친필초고를 기준으로 하면서 "이충무공전서"를 참고하여야 한다. 엄격한 진중생활, 국정에 대한 솔직한 느낌, 전투 후의 기록, 수군의 통제 전술, 부하들에 대한 상벌(賞罰), 가족.친지. 부하. 내외 요인들의 내왕과 편지글 등도 실려 있어 임진왜란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일기라면 의례 있기 마련인 신변의 자질구레한 일이나 번민, 고민 같은 것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부인을 생각하며 자식을 걱정하는 것도 잘 나타나 있다. 임진왜란 전체의 경과는 전해 듣고서 알았던 범위 내에서만 간단히 적혀 있고, 사실을 밝히기 위한 방증을 끌어 들이지는 않았다. 다만 스스로 나서서 싸운 날의 전황은 자세히 적었는데, 이 때에도 해석과 평가는 내리지 않았다.
宣祖 ... 이순신을 죽여야 할 세 가지 이유
정유재란이 발발한 직후, 이순신에 대해 제기된 비난 중 하나가 이순신이 원균을 비난하였다는 것이다. 즉 원균은 자신의 십여세에 불과한 첩의 아들까지 군공에 참여시켜 상을 받게 하였다다는 이순신의 원균에 대한 비난이 문제 된 것이었다.
1597년 3월, 당시 투옥되어 고문을 받으면서 취조당하고 있던 이순신을 두고 선조가 " 이순신을 죽여야 할 세가지 이유 "로서 직접 3가지 죄목을 지정해 준 일이 실록에 남아있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였으니 무군지죄(無君之罪)요, 적을 쫓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부국지죄(負國之罪)요, 남의 공을 빼앗기에 이르러 남에게 죄를 씌웠으니 ( 이 것은 이순신이 원균의 나이 많은 아들을 어린아이라고 하여 공을 가린 글을 올린 일을 가리키는데.. 실록에는 작은 글씨로 부기되어있다) 제멋대로가 아닌 것이 없고, 어려워 꺼리는 것이 없는 죄 (無非縱恣無忌憚之罪 .. 무비종자무기탄지죄)이다. 이토록 허다한 죄상이 있으니 법에 부쳐야지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법에 물어 죽여야 한다. 신하된 자로서 반드시 죽여야지 용서할 수 없다. (선조실록......1597.3.13)
무군지죄 無君之罪
無君之罪의 진상 이러하다. 석달 전인 宣祖 29년12월12일, 부산의 왜영(倭營)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왜군의 피해가 많았다. 당시 부산으로 출장갔던 수군장수 안위가 돌아 와 이순신에게..자신이 은밀히 음모하여 방화하였다고 보고한다. 이에 이순신은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안위에게 포상해 주기를 청하였다 (선조 30년.1월1일).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도체찰사로 남쪽에 내려 가 있던 우의정 李原翼으로부터 장계가 올라 온다. 부산왜영의 대화재는 이원익의 군관들이 미리 계획하여 성사시켰으므로 이순신의 부하들에게 포상하면 안되고, 이원익의 군관에게 포상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조 30년. 1월2일)
바로 이 것이 이순신이 " 조정을 속인 무군지죄 "의 전모이다. 이순신 스스로 조작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포상을 청한 것도 아니고, 그저 부하의 보고를 믿고 그대로 청하였던 것이었다...
부국지죄 負國之罪
敵을 쫓아 치지 아니하니 나라를 저버린 부국지죄(負國之罪)는 바로 요시라의 반간계(要時羅의 反奸計)에 의한 분명한 누명이었다. 조선과 왜국간에 이중첩자로 활동하던 요시라(要時羅), 그는 일본의 재침에 방해가 될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하여 허위정보를 흘렸고, 선조가 이에 속았을 뿐....
무비종자무기탄지죄 無非縱恣無忌憚之罪
제멋대로가 아닌 것이 없고, 어려워 꺼리는 것이 없는 죄 (無非縱恣無忌憚之罪) ....원균이 나이어린 첩의 자식까지 군공자로 올려 상을 받게 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이순신은 원균을 비난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는 새롭게 등장하는 사건도 아니었고, 이미 3년 전인 선조 27년 11월12일의 경연에서 "그 일은 원균이 잘못한 일이다..라는 호조판서 김수의 보고로 일단락되었던 사건이었다.
이순신의 문제 제기는 " 원균의 첩이 낳은 어린 아들까지 군공자로 올려 상을 받았다 " 이었는데, 당시의 원균측은 "원균의 본처가 낳은 장성한 아들인 원사웅(元士雄) "으로 왜곡하여 이순신을 모함한 것이다. 원사웅은 실제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원균과 같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국보 제 76 호
이순신, 그 죽음의 진실
전사설 戰死說
자살설 自殺說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이 사망하면서 임진왜란은 끝이 난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의혹들이 제기된다.
전사(戰死)를 가장한 자살이라는 의혹은 대제학을 지낸 이민서(李敏敍)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제기된다. 그는 이순신이 스스로 갑옷을 벗고 탄환에 맞아 죽었다는 기록을 남긴다. 하지만 이민서는 숙종시절의 인물이다. 이순신이 활동한 당시의 기록인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이 전사하였다고 나와 있고,
또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이 저술한 "이충부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는 .. 지나가는 탄환에 맞아 ... 숨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순신의 자살설은 17세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조경남(조경남)은 그의 저서 "난중잡록(난중잡록)"에서 .. "이순신은 친히 북채를 들고 함대의 선두에 서서 적을 추격하였다 "라고 적어 죽음을 자초한 모습으로 그려 자살설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난중잡록은 그 글의 가치가 인정되어 후일 "선조실록"을 작성하는 일에 조정에서 그 원본을 빌려가기도 하였다.
심지어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까지 이순신의 사망에 대한 의혹이 실려 있다. 전공(戰功)이 커서 용납될 수 없기에 스스로 죽음을 작정하였다는 이유까지 제시한다. 그 기록에는...
공로가 클수록 용납되기 어려운 것을 스스로 알고 싸움에 임해 자기 몸을 버렸으니, 公의 죽음은 본시부토 작정한 것이다...
"이충무공전서"는 이순신이 사망한지 197년 후인 正祖 때 출간된 책이다. 그렇다면 왜 이순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후세의 사람들은 이순신이 죽을 고비에서 벗어난 후 죽음을 결심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죽을 고비란 1597년 가등청정을 생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체포된 뒤 사형 직전까지 간 일을 말한다. 이 일은 일본의 이중간첩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으나, 당시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죽어 마땅할 인물로 몰고 갔다.
그 때 이순신의 억울함에 깊이 공감한 사람들이라면 그가 스스로 죽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 특히 이순신을 천거하였으며 언제나 그의 든든한 후원자이었던 유성룡의 실각은 이순신에게도 곧 닥쳐 올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순신, 죽음의 진실 3 ... 은둔설(隱遁說)
은둔설이란 ..이순신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미리 친족 및 측근들과 합의하고서 노량해전 당시에 야음을 틈타서 몰래 빠져나가 그 후 약 16년간 은둔하며 살아 갔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는........
1. 이순신이 부하인 유형(柳珩)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예로부터 만약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하여 인정을 받아 보려는 생각을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을 물러나는 그 날에 죽음으로써 유감될 수 있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 "
2. 이순신이 남긴 시(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이 은둔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북래소식묘무인 北來消息杳無因 북쪽 소식 아득히 들을 길 없어 백발고신한불신 白髮孤臣恨不辰 외로운 신하, 시절을 한탄하네 수리유도최경적 袖狸有蹈催勁適 소매 속에는 적을 꺾을 병법있건만 흉중무책제생민 胸中無策濟生民 가슴 속에는 백성 구할 방책이 없네 건곤암참상응갑 乾坤闇讒霜凝甲 천지는 캄캄한데 서리 엉기고 관해성전협을진 關海腥氈血揖塵 산하에 비린 피가 티끌 적시네 대득화양귀마후 待得華陽歸馬後 말 풀어 목장으로 돌려 보낸 뒤 폭건환작침계인 幅巾還作枕溪人 두건 쓴 처사되어 살아 가리라
3. 조선 水軍은 원거리 포격전을 주로 구사하였기 때문에, 야간보다는 주간에 海戰에 임하였다. 하지만 노량해전만큼은 夜間에 이루어졌는데, 이 것은 야음을 틈타서 이순신을 도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추정이다.
4."이충무공전서"에 부록으로 수록된,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이 기록한 행록(行錄)의 이순신의 최후의 모습에는 의심스러운 점들이 많다는 얘기이다. 그 기록에는 이순신이 적의 유탄에 맞아 사망할 당시 이순신의 사망을 알았던 인물은 아들 회(회)와 조카 완(莞) 그리고 몸종 김이(金伊)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이 사망한 뒤 임시로 함대의 지휘를 맡은 인물이 역시 아들 회(회)이었다. 하지만 참모들과 부하 장수로 가둑한 기함(旗艦) 지휘소에서 함대 사령관이 저격을 당해 사망하였을 때 그 것을 단지 3명 밖에 알지 못하였다는 점, 그리하여 그 지휘권이 고참 부하장수가 아닌 신출내기인 아들과 조카에게 돌아 갔다는 점이 극히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결국 이 것은 이분(李芬)의 기록은 이순신의 은둔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결정적 증거라는 것이다.
5.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에 "사망"하여 그 시신은 20일 뒤인 12월10일에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진다. 하지만 국가가 장례비용을 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는 그로부터 80일이 경과한 다음해 2월 11일에 치러진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뒤인 1614년 묘지가 이장된다. 이 것은 이순신이 노량 해전 이후 은둔하여 장례를 치루기 전까지 새생활을 정착한 뒤, 1614년에 실제로 사망하여 장례를 치렀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순신의 장검 (長劍) ... 보물 제326호
이 장검(長劍)은 바로 "한산섬 달 밝은 밤에 ... 긴 칼 옆에 차고 ... "의 그 긴칼이다. 이 칼은 1594년(선조 27)에 한산도 陳中에서 칼의 장인(丈人)으로 이름 난 태귀연(太貴連)과 이무생(李茂生)이 만든 것으로, 이순신이 항상 벽에 걸어두고 정신을 가다듬던 칼이다.
길이가 197cm, 칼집을 제외한 무게가 4.3kg이며 손잡이에는 남색 천을 십자로 감았고, 칼 끝에는 당초문(唐草紋)이 새겨져 있으며 칼등에는 홈이 파져 있다. 손잡이 부분도 매우 길어 두 손으로 잡을 수 있는데 약간 휘어져 있고, 칼집의 끝 부분은 은으로 된 장식기 뭍어 있다. 칼 위에는 이순신의 친필 검명(劍銘)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삼척서천 三 尺 誓 天 석자가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동색 山 河 動 色 산과 물이 떨고 일휘소탕 一 揮 掃 蕩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혈염산하 血 染 山 河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이순신에 대한 외국인의 평가
우선 임진왜란 때의 明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의 평가이다. 진린은 처음에는 작은 나라의 장수라며 얕보고 함부로 대했으나, 이순신으로부터 목숨을 구원 받은 이후에는 태도가 완전 바뀌어 이순신을 존경하며 따랐다.
진린은 사람들에게 " 이야(李爺)는 하늘이 내린 장군 "이라고 말했다. " 야(爺) "는 아비 야자로 윗 사람에게 붙이는 존칭으로 어르신 정도의 어감이다. 진린은 자신의 명나라에 올린 보고서에 "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과 보천욕일(補天浴日)의 功이 있다 "고 극찬한다. 즉 " 이순신유 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 (李舜臣有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 ... 이에 명나라 신종(神宗)은 도독인(都督印)을 비롯한 팔사품(八賜品)을 내린다.
경천위지는 천하를 잘 다스린다..는 뜻이다. " 하늘의 뜻을 깁고 해(日)를 목욕시킨다 "라는 의미의 보천욕일(補天浴日)은 어마어마한 공적을 가리킬 때 쓰는 말로 중국 신화에서 유래한다.
일본 교과서의 이순신장군
한편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이순신을 잊지 않고 존경하였다. 일본에서 군신(軍神)으로 존경받던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 해군제독 동향평팔랑(東鄕平八郞..도고 헤이하치로)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승축하연에서 기자의 질문을 받는다. "넬슨과 당신을 비교하면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 이에 도고제독은 " 넬슨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전함으로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나는 러시아 발틱함대의 1/3 규모로 싸워 이겼다 "라고 대답하였다. 즉 자신이 넬슨보다 더 훌륭하다는 얘기이다.
다시 기자가 질문을 잇는다. " 조선의 이순신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 이에 도고는 " 이순신장군에 비하면 나는 일개 하사관에 불과하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내 함대를 갖고 있었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였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1905년이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이었다. 식민지의 위인을 세계적인 위인보다 더 윗 반열에 놓은 일본의 도고이었다.
明나라, 진린(陳璘)의 전승보고서
1597년 정유재란(정유재란) 때에 명나라 진린(陳璘)은 水軍 5,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도우려 내려와 전남 강진군 고금도에서 이순신과 함께 戰功을 세운다. 처음에는 이순신과 不和하였으나, 이순신이 그에게 공을 돌리고, 전공을 세우도록 도와주자 이순신에 감복하여 진정으로 존경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황제 神宗에게 보고서를 올려 이순신의 공적과 당시 조선의 분위기를 전하는 한편, 이순신의 戰後의 운명을 염려한다.
후일 明나라가 멸망하자, 그의 손자 "진영소"는 남경으로부터 배를 타고 한반도로 내려와, 그의 할아버지인 진린(陳璘)이 전공을 세웠던 강진과 해남에 정착하여 광동진씨(廣東陳氏)의 유래가 된다.
全 文
황제폐하(皇帝陛下) .. 이 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命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遼東)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 또한 장수로서 지녀야 할 품덕(品德)을 고르게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께서 貴하게 여기신다면 우리 明國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의 淸나라)를 견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땅을 모두 무리 明國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께서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臣이 간청하옵건데...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 년간 수 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 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이순신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에게서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白衣從軍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 굴하지 아니하고 국왕에게 忠義를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선의 국왕은 원균(元均)에게 조선수군통제사의 지휘를 맡겼으나, 그 元均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하는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니 당황한 조선 국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 봉했나이다.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도 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倭船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시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난다면 이순신의 목숨은 마로 풍전등화(風前燈火)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의 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이순신을 해(害)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 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이 다 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께 충을 다 할 것입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淸나라)를 견제케 하여 주소서......
都督印과 팔사품(八賜品)
팔사품(八賜品)이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明의 신종(神宗)에게 이순신의 전공을 보고하자, 神宗이 이순신에게 하사한 8종 15개의 유물을 말한다. 이 유물둘은 도독인(都督印)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쌍을 이루어 모두 15점이 되며 충무 충렬사(충렬사)에 보관하고 있다. 1969년에 아산 현충사가 준공됨에 따라 都督印은 모조품을, 나머지 유물들은 각기 한벌씩을 현충사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보물 제 440 호
팔사품(八賜品)의 내용물은 ... 이순신을 都督으로 임명한다는 도독인(都督印) 1개, 호두령패(虎頭令牌) 2개, 귀도(鬼刀) 2자루, 참도(斬刀) 2자루, 독전기(督戰旗) 2 폭, 홍소령기(紅小令旗) 2폭과 남소령기(藍小令旗) 2폭, 곡나팔(曲喇叭) 2개 등이다.
187대 통제사 신관호(申觀浩)가 八賜品을 채색화로 그려 병풍을 만들었다
이순신의 女人들
이순신도 인간으로서 남자이었기에 욕망을 해결했어야 할 것이다. 전장을 떠돌던 무장이지만 아직은 피가 식지 않은 50세로 여자가 필요한 때이기도 하였다. 당시 사대부가 의 남자가 그러했듯이 그에게도 첩이 있었고, 그들로 부터 소생도 있었다. 1594년 9월15일의 일기에서 " 부안사람이 꿈 속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달수를 헤아려 보니 낳을 달이 아니어서 꿈 속이지만 내?았다 " 고 적고 있는데, 관계한 달수까지 헤아릴 정도이었던 부안사람은 첩이었던 듯하다.
1596년은 이순신에게도 무척 힘든 시기이었다.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러가 명나라와 왜군 사이에 휴전협상이 지리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왜군들은 화친회담을 빌미로 마음대로 바다를 휘젖고 다니고 있었고, 조정은 이순신에게 나가 싸울 것을 압박하였지만, 협상 중이었으므로 경솔히 행동할 수도 없었다. 원균(元均)과 그의 후원자인 윤두수(尹斗壽) 등은 끊임없이 이순신을 음해하고 있었다. 이순신에게는 전쟁보다 더한 스트레스에 피곤한 시절.. 그래서 이 해에는 유난히 많은 여자들과의 이야기가 일기에 오른다.
1596년 9월12일 .. " 길을 떠나 해가 질 무렵 무장(茂長)에 이르러 여진(女眞)과 잤다 " 그리고 9월 14일 .. " 하루 더 유숙하였다, 여진과 두 번 관계하였다 " 9월15일 " 체찰사가 茂長縣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들어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여진과 세번 관계했다 " 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대부분의 난중일기 국역본(國譯本)에는 빠져 있다. 아마도 이순신의 이미지를 배려하여 그랬을 것이지만, 지나친 과잉친절 아닐지?? 女眞이라는 여인은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연인으로 나중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상은 官奴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관노는 수령이나 외부 손님의 몸시중을 들었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19일의 여인은 좀 색다르다. " 이 날 광주목에 들러 있었는데, 마침 광주목사 최철균이 파직되었다. 이날밤 최철균이 서출 딸인 최귀지와 잤다 "고 적혀 있다.
여진이라는 여인과 잠자리를 하기 하루 전인 1596년 9월11일에는 " 산월(山月)과 술 마시며 얘기하다가 밤이 깊어 헤어졌다 "는 기록과 함께 말미에 "누명을 벗길 수 없었다 "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山月은 實存하였던 한양의 名妓 내산월(柰山月)이다. 전쟁의 와중에 한양의 명기가 멀리 영광까지 걸음하였다는 것은 무엇이며, 게다가 누명을 벗길 수 없었다..라는 말은 무엇이지 ?
당시의 풍습에는 장군들이 진중에 첩을 데리고 다니는 일이 흔하였다. 왜군과의 전투에서 적장의 목을 베고 첩으로 살던 조선여인을 구하기도 하였으니 피아간에 흔했던 일이었다. 그러니 이순신은 최소한 진영에서만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1593년 5월30일의 일기를 보면 " 해 질 무렵 남해 현감 기료근이 우리의 배 옆으로 배를 대는데, 배 안에서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 두려워 한다. 가소롭다. 나라가 위급할 때 여인을 태우고 놀아 나다니... 그러나 그의 대장 원균수사(元均水使)부터 그러하니 어찌하랴 "하며 통탄한다. 이순신은 당시 사대부로서 女色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함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위의 첩자(牒字)는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전시체제의 긴급 상황에서 왕명에 따른 직권으로 발송한 차첩문서, 즉 직첩(職牒)의 특이한 사례이다. 水軍의 전력이 극히 약화된 정유년 1597년 말, 연해지역 의병장(義兵將)에게 공식적으로 그 지휘권을 부여함으로서 원활한 군사활동을 독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이 첩자를 받은 인물은 흥양의 의병장 신군안(申君安)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첨정을 지낸 다음, 정유재란 시에 향리에서 義兵을 일으켜 바다와 육지를 전전하던 중, 그 해 12월 수군통제사 이순신으로부터 의병장 임명의 첩지를 받았고, 그 뒤 의병활동을 계속하며 많은 전과를 올리 뒤 1598년 순절하였다.
첩자의 주요 내용은 의병에 대한 지휘통솔권이 수군통제사에게 있다는 점, 신군안(申君安)이 보낸 의병 활동 결과 보고에 치하한다는 내용 그리고 의병장에 임명하니 더욱 분발하여 싸우되 특히 군률(軍律)을 엄격히 하라는 것..등등이다.
이순신의 수결 (手決)
이순신의 수결(手決 .. sign)이다. 일심(一心)을 草書化 한것이며, 오른편의 그림은 수결을 정하기 위하여 이것 저것 연습해 보던 흔적들이다. 일심(一心)은 一片丹心의 줄인 말로 이순신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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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규봉(金圭鳳)의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非山非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