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색을 들키다
건널목을 건너던 사내 갑자기 담배 한 대 달란다
골초는 담배를 안 피운다고 말한다
신호등 앞에서 가끔 양심을 정지시킨다
세상이 물결치며 만든 파도가 버겁다
그 파도를 사랑할 줄 모른다
원룸에 두고 온 그림자를 찾아 사람의 숲을 배회하거나
도시의 생각을 훔쳐보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다
거울을 수시로 본다 그것이 내가 하루동안 지은 죄다
거울 속에 사는 그 여자 하루종일 머리 빗는 모습이 음악적이다
찬 공기를 많이 움켜진 겨울나무의 앙상한 팔을 좋아한다
잎이 무성해지면 나도 덩달아 깃발처럼 펄럭일지도 몰라
사랑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모른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비 오는 새벽에 눈을 뜬 적이 있다
빗소리 같은 그대를 보고싶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몽롱한 그대가 아스팔트를 흠뻑 적셨다
구두 속 양말에 구멍이 났다
꿈 속에서 이리저리 그대 찾아 돌아다닌 탓이다
밤의 허리를 뚝 잘라 태종대로 달려갔다는 그대의 말에
으르렁거리는 슬픔에 시동을 걸지만
밤은 언제나 두렵고 슬픈 먼길이고
나의 뒷모습은 언제나 어제 분 바람이다
건조한 일상보다는 황홀한 재앙을 꿈꾼다
독립을 위해 평화로운 식민지를 자주 방문한다
마음의 도둑은 나를 훔쳐간지 오래여서
들뜬 나의 심장은 뜨겁게 얼어버렸다
아, 너무나 그리운 내 본색의 도둑에게
내 마음이 앉았던 흔적을 모두 들켜버린 것이다
거울 속의 여자에게 전부 들켜버린 것이다
거울을 깨뜨리니 그 여자 거울 속의 거울을 통해
시적이고 소설 같은 세상으로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