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반이나 될까. 앳된 얼굴의 열세 살 소년은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훌쩍 모습을 감췄고 얼마 후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약간은 철없어 뵈던 아이돌그룹 ‘이글파이브’ 멤버에서 솔로가수로 홀로 선 것이다.
누나팬들로부터 “잘 자라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으며 돌아온 가수 리치.
지금 그는 뮤지컬 무대에 서 있다. 벌써 세 번째 변신이다. 가장 부러운 건 데뷔한 지 10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는 아직 스물네 살이란 사실이다. <여기까지 전문처리 부탁드립니다>
그는 그냥 나타나지 않았다. 분장실 문틈을 빼꼼히 들여다보는 시늉을 하며 첫인사를 했다. 장난기가 줄줄 흐르는 표정에서 십여년 전의 ‘이글파이브’ 모습이 겹친다. 리치라는 이름을 달고 감미로운 발라드를 부를 때만 해도 ‘그 꼬마가 언제 저렇게 컸지’라며 신기해했는데 이제 보니 어릴 때 모습 그대로다. 그는 요즘 뮤지컬 ‘우리 동네’에 출연 중이다.
“2006년 ‘골목길 이야기’라는 작품으로 뮤지컬 배우로 데뷔했어요. 아는 분께서 ‘뮤지컬이 뜨니까 한번 해보라’고 권한 게 계기가 됐죠. 그러고선 그 매력에 푹 빠졌어요. 한 해에 하나씩은 꼭 해야겠다고 다짐할 정도였으니까요.”
두 번째 작품은 대표적인 스테디셀러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다. 말썽꾸러기 동생으로 출연하면서 그는 확실히 얼굴 도장을 찍었다.
“‘우리 동네’는 저에게 세 번째 작품이에요. 매년 한 작품씩 하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은 지킨 셈이죠. 게다가 개인적인 아픔을 덜 수 있어 더 좋아요.”
그는 얼마 전 2년간 사귄 여자친구를 병으로 잃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어렵게 연애한 탓에 충격도 컸다.
“제가 맡은 배역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 많이 가슴 아파하죠. 무대에 설 때마다 그 친구를 생각하는데 그러다 보니 오히려 공연이 끝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요.”
공연이 없는 날엔 대학로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소극장 뮤지컬을 본다. 최근에 본 작품을 묻자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센다. 그런 그가 가장 감명깊게 본 건 지난해 말 충무아트홀에서 공연했던 뮤지컬 ‘컨페션’이다.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는데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이 바로 ‘라이온킹’이었죠. 넘버가 정말 좋았거든요.”
한국 뮤지컬을 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라이온킹’처럼 마음을 확 사로잡는 음악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연말 그의 정신을 홀딱 팔리게 한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뮤지컬 ‘컨페션’이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음악이 좋았어요. 넘버만 좋다면 창작 뮤지컬도 충분히 승산이 있단 확신이 들었죠.”
그 덕분에 그는 요즘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뮤지컬 음악 작곡에 도전하기로 한 거다.
“당장은 힘들 테니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면서 경험을 더 쌓아야죠. 제 실력으로 ‘라이온킹’보다 좋은 노래를 쓰고 싶답니다.”
|